Chapter 287
기념일이 조금씩 다가오면서 아카데미는 부쩍 바빠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외부인이 들어오는 건 물론이요 광장은 점포가 점차 늘어났다.
아마 저 점포는 머지않아 길거리 음식점으로 변하겠지. 외부의 음식이라 맛이 어떨지 궁금하다.
‘근데 사람이 엄청 많이 오네.’
연말이라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많은 만큼 유입되고 있는 인원도 상당했다.
아카데미 붕괴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데 이리 많으니 여러모로 곤란하다.
더군다나 가이아의 신자는 거의 없다. 아무래도 성직자는 대부분 비잔틴에 몰려가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나마 다행히 리제가 굳건히 남아있다는 점이랄까. 든든하다 못해 혼자 무쌍을 찍을 수 있는 수준.
지금 내가 할 일은 혹여 악마가 들어왔나 확인하는 것이다. 리제의 말로는 남색 이상만 출입이 가능할 거라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공연 쪽인데…’
본래의 스토리대로라면 ‘광대’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역할이다.
사냥꾼과 달리 광대라는 수식어가 조금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언행은 광대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문제는 익살스러운 광대가 아니라 무서운 광대라는 점이지. 웃는 얼굴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딱히 보이는 건 없구나.’
앞으로 공연이 진행될 단상을 기웃거려도 보이는 건 마땅히 없었다.
중간에 관계자가 다가와서 무슨 일이냐고 묻기는 했지만 나는 이리 말하며 넘길 수 있었다.
“공연 참가. 어떻게 해?”
“아. 참가자 분이셨군요. 여기에 이름을 적어주세요. 혹시 따로 어떤 종목을 하실 건가요?”
“춤이요.”
“춤이라면 음악이 필요하겠네요. 혹시 생각해 놓은 음악이 있으신가요?”
“음…”
생각보다 디테일해서 놀랐다. 하물며 달랑 문워크 하나만 추기에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
그래서 노래까지 추가했다. 조금 울고 싶긴 했으나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흑역사 정도야 넣어야지.
이후로 음악까지 대충 고른 후에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바쁜 와중에도 혼자 작업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깡! 까앙! 깡!
광장과 멀리 떨어진 공방 구역. 하지만 연말이 다가오는 만큼 공방 지대도 조용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오직 한 곳에서 망치질 소리가 널리 울려퍼졌다. 나는 망치질 소리가 들린 곳으로 걸어갔다.
모두 예상했겠지만 제인의 공방이다. 그녀는 연말이 다가옴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공방에 남았다.
‘고향이 더 위험할지도 모르지.’
제인의 고향이자 과학의 나라 산티아는 현재 치안이 매우 불안정하다.
일반 시민의 범죄율이 높은 게 아니라 혁명군의 활동으로 언제 어디서 폭탄이 터질지 모른다는 의미다.
물론 혁명군이 테러를 저지르는 건 대부분 높으신 분들의 한해서지만 윗선이 그걸 역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산티아는 가급적 안 가는 게 좋다. 심심하면 어디서 폭탄이 터져버리니까.
-치지직! 치직!
소리소문 없이 제인의 공방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망치질 소리 대신 빛이 번쩍번쩍거리는 걸 보아 용접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뒤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슬슬 매서운 겨울임에도 공방은 상당히 더웠다. 때문에 제인도 작업복을 반쯤 걸친 듯한 모양새다.
작업복 안에는 땀에 흠뻑 젖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땀 때문인지 속옷 라인이 선명하게 보였다.
“후아.”
때마침 작업이 끝난 모양이다. 제인이 용접용 마스크를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땀을 뻘뻘 흘렸는지 이마를 팔로 닦는 모습까지. 대장장이도 상당한 힘이 드는 걸로 알고 있다.
‘슬슬 근육이 잡히고 있네.’
대장장이는 힘과 체력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우선 불과 가까울뿐더러 망치질까지 하기에 열량 소모가 극심하다.
제아무리 제인이 천재여도 체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터. 적어도 그레이스보다는 체력이 좋을 것이다.
“제인.”
“응? 앗! 오셨습니까!”
제인이 내 부름에 격하게 환영했다. 각종 도구들을 내팽겨치며 우다다 달려오기까지.
덕분에 그녀의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열심히 작업하고 있던 건지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확인차에 오신 겁니까?”
“그냥 구경.”
제인을 찾으러 온 이유는 별거 없다. 말 그대로 구경 겸 안부 인사다.
투자금이 부족하다면 모를까 웬만해서 그녀가 나를 먼저 찾아올 일은 없다.
안에 박혀있는 걸 좋아하는 성향도 그렇고 사람과 만나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
그나마 엘리가 챙겨주기는 하지만 제인이 거북해 하는 편이다. 전형적인 아싸의 표본이다.
‘이 성향 덕분에 화를 피하는 거지만.’
아카데미 붕괴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제인은 공방에 처박혀 있다.
심지어 본인의 일에 집중한 나머지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더라.
더 나아가 일이 다 끝나고 나서야 무슨 일 있었어요? 라고 묻기까지. 오히려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제인.”
“네.”
“제인은 기념일 때 안 놀 거야?”
“어… 저는 그런 자리 거북해서…”
내 질문에 제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실로 내향인스러운 대답이다.
바깥보다 안이 훨씬 편안한 타입. 굳이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내가 아니라 엘리가 끌고 갈 것 같기는 한데…’
엘리는 제인이랑 같이 축제를 즐기겠다며 선포했다.
어차피 자신은 전투에 도움이 되지도 않을 거고 기미가 보인다 싶으면 제인이랑 같이 도망칠 거라고.
더군다나 포로리가 곁에서 지켜줄 테니 만약을 위해서라도 엘리랑 같이 지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일단 공방의 위치가 달라졌으니까.’
제인의 옛 공방은 공방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시설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만 있고 다른 건 없다.
그만큼 공방 지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환경이 더 낫다.
그러니 몬스터가 제인의 공방을 급습할 수도 있다는 소리. 이걸 방지하는 게 좋다.
무엇보다 혼자 있는 것보다 엘리랑 함께 다니는 것이 더 낫다.
“밖에 나가자. 조금만 둘러봐.”
“네? 하지만…”
“바람도 쐴 겸 나가자. 여기 공기 안 좋아.”
“그… 알겠습니다.”
공기가 안 좋다는 말에 제인도 마지못해 수긍했다.
실제로 후덥지근한 열기와 더불어 용접의 여파로 공기가 별로 안 좋다.
환기도 시킬 겸 겸사겸사 제인을 데리고 가는 것이 낫다. 그녀의 건강을 위해서다.
“그럼 잠깐 씻고 오겠습니다.”
“응.”
이후로 제인이 깔끔하게 씻은 후로 공방 밖으로 나섰다.
제인의 복장은 대충 껴입은 수준이었는데 이것마저 허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가 옷을 사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혹시 겨울옷은 미처 사지 않은 건가. 나는 의아함을 품고 물었다.
“옷. 그거밖에 없어?”
“네?”
“엘리가 사준 거는?”
“아. 그건 아직 안 입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입을 계획입니다.
“…왜?”
“이게 편합니다.”
어쩜 아싸의 특징을 전부 들이부은 것 같냐. 기껏 옷을 사줘도 자기가 편안한 옷만 골라입었다.
그렇다고 엘리의 정성을 무시하느냐? 그건 또 아니다. 본인이 필요하면 그제서야 입을 것이다.
“게다가 아깝잖습니까. 기껏 사준 옷을 함부로 입기에는 미안합니다.”
“…”
화룡점정으로 구두쇠의 면모까지. 정말이지 훌륭한 조합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외모가 받쳐주다 보니 뭘 입든 간에 잘 어울리는 편이다. 특히 제인은 소위 옷발을 잘 받는 몸매다.
엘리는 가슴이 너무 큰 바람에 입을 수 있는 옷이 한정적이지만 제인은 적당히 큰 편이라 꽤 괜찮다.
“시바르 형아?”
“?”
제인이랑 광장 곳곳을 둘러보고 있을 때쯤이었다. 낯익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에 고개를 돌리니 개구쟁이 같은 인상을 물씬 풍기는 꼬마애가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머리를 짧게 깎아서 그런지 몰라도 짱구의 현실판처럼 느껴지는 소년.
“던?”
“여기서 뭐해? 이 누나랑 왜 같이 있어?”
말보로의 아들 던이었다. 던은 질문 다음으로 또다른 질문을 꺼냈다.
뭐부터 답해야 할지 순간 애매했지만 일단 첫 번째 질문부터 답하기로 정했다.
“그냥 구경하고 있었어.”
“안녕하십니까. 또 보네요.”
제아무리 아싸인 제인이어도 어린애는 귀여워하는 법.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던은 그런 제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상한 말을 꺼냈다.
“그렇구나. 우리 엄마랑 아빠 같은 거지?”
“음?”
“그럼 형도 자식 있어? 옆에 엄마 같은 여자가 있잖아.”
“어…”
조금 당황스러운 사고방식이다. 동시에 지극히 어린애스러운 발상이다.
남녀가 함께 있으면 응당 자식도 있어야 한다는 다양한 의미로 곤혹스러운 발언.
그 발언에 나는 눈을 끔뻑이다가 제인을 쳐다봤다. 제인도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인지 딱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그 그 그게 무 무슨 말씀이신지…?”
얼마나 당황했으면 저런 식으로 말을 더듬거릴까. 제인의 얼굴도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던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도리어 본인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맞지 않아? 엄마랑 아빠는 남녀가 둘이 있으면 자연스레 아기가 생긴다고 들었는데?”
“…”
“저번에도 같이 있었고 이번에도 같이 있고. 그럼 엄마랑 아빠지.”
말보로가 던을 잘못 가르친 건 아니다. 그냥 아이들의 사고방식이 이런 식인 거다.
덕분에 제인이 더욱 당혹스러워하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은근 이런 면모에 약하구나.
이에 내가 부정하려던 찰나 문득 재미있는 장난이 떠올랐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응. 곧 생길 거야.”
“시 시 시바르 님?!”
“그렇지? 역시 내 생각이 맞다니까.”
던이 의기양양해지는 동안 제인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흘러내린 안경이 그녀의 감정을 대변했다.
이런 식의 장난은 처음 당하다 보니 적잖게 당황스럽겠지. 타격감도 만만치 않았다.
“던! 또 어디에 간 거야!”
“앗. 아빠다.”
그러다 때마침 던의 아버지이자 아카데미 교수 말보로가 찾아왔다.
말보로는 나와 딱 마주하자마자 응?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아하하. 이거야 원. 시바르 학생이었구나. 그 옆에는…”
“아빠. 아빠. 저 형이 아빠고 저 누나가 엄마래.”
“아 아니. 그게…!”
소개를 하기도 전에 던이 폭탄발언을 던졌다. 이제 제인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손까지 휘저으며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하기 힘든 것 같다. 언변이 그닥 좋지 않은 편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제인은 사람을 상대하는 데에 큰 힘을 쏟는 편이다. 지금도 과부화가 다가오기 직전이겠지.
“…아아. 대충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겠네. 던이 그런 거라면 그런 거지.”
“그렇지?”
다행히 말보로가 눈치 빠르게 넘어갔다는 걸까. 그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아무래도 소개를 물 건너 간 것 같다. 왜냐하면 말보로 뒤로 그의 아내가 다가왔거든.
말보로의 인상은 다소 험악한 것에 비해 아내분은 건실하게 생겼다. 던의 얼굴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다.
“그럼 두 학생 모두 축제 잘 즐길 수 있도록. 우린 이만 가보마.”
“안녕! 다음에 아기 보여줘!”
끝까지 폭탄을 떨어뜨리고 떠나는 던이었다.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며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던의 양손을 각각 말보로와 그의 아내가 잡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다.
나도 지구 시절에 저럴 때가 있었는데 말이지.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히 있었다.
‘…나도 엄마 아빠 보고 싶다.’
다 큰 성인이어도 부모의 품은 그리운 법이다. 그 그리움을 참을 수 있는 것이 성인이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강제적으로 떨어지다 보니 그리움이 배가 되어 나를 괴롭혔다.
과연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설령 돌아가더라도 내가 아는 곳이 맞기는 한 걸까.
내가 사라지면서 부모님이 어떤 고생을 하고 있을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
“…”
나와 제인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오직 말보로네 가족을 눈에 담을 뿐.
그러다 묘한 기류가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니 때마침 제인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이 상황이 자주 연출되는 것 같은데 착각이려나. 이번에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정말 좋은 가족입니다. 시바르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응.”
“저는 부모님 없이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저 기분이 뭔지 모릅니다. 부럽네요.”
제인의 부모는 산티아의 윗선에게 제거당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진실을 모른다.
진실을 알았다면 제인도 무사하지 못했겠지. 할아버지라는 분도 그걸 알기에 조용히 키우셨다.
나는 제인의 푸른 눈동자 속에 담긴 부러움을 읽고는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우와아아~”
던이 부모의 손을 잡은 채 하늘 높이 뜨고 있었다. 양옆의 부모가 던의 손을 잡고 끌어올린 것이다.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장면이었으나 동시에 쓸쓸해졌다. 나는 왜 여기에 끌려와서 이런 개고생을 하는 건지.
“시바르 님?”
“응?”
“시바르 님도 부모님이 안 계시지 않습니까?”
뭐야. 왜 갑자기 패드립을 날리는 거지.
훈훈했던 분위기를 와장창 깨뜨리는 제인의 질문. 나는 그 질문에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제인은 문제점을 전혀 모르는 건지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저도 부모님이 안 계십니다. 저도 시바르 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요.”
“…”
“이런 말씀을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제인은 머쓱한 듯 뺨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더니 이내 당당히 내밀었다.
소위 말하는 악수 신청. 내가 먼저 내밀었다면 모를까 제인이 먼저 제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딱 한 가지. 제인의 신뢰를 샀을 때의 이야기다. 제인에게 이러한 용기는 신뢰의 증표나 다름없다.
“없는 사람들끼리 잘해 봅시다!”
“…”
근데 화법은 여전히 아싸스러운 화법이네.
나는 눈을 끔뻑였다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뒤이어 제인의 손을 붙잡았다.
대장장이 일로 굳은 살이 박힐 대로 박힌 그녀의 손. 의외로 매우 단단한 손이었다.
“응. 잘하자.”
“감사합니다!”
제인은 힘차게 대답했다.
[신앙이 상승합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혼돈의 주둥아리와 맞먹는 제인의 주둥아리… 공통점은 둘 다 악의가 없다.
님! 재미있게 보셨다면 선작 추천 댓글 하나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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