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62
예상대로 에스테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자신의 신성함을 어필했지만 이미 내 신경은 그런 주장을 한쪽으로 듣고 다른 한쪽으로 흘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솔직히 득달같이 달려들어 제발 보여달라고 난리를 치는 용장들의 외침까지 같이 무시하는 건 좀 버겁긴 했어도 어찌저찌 검신에 코팅된 마력 기관을 바라보며 사색을 가질 수 있었다·
마력 기관이라는 게 눈으로 보여지는 게 아니라서 긴가민가 했으나··· 몇 번을 확인해도 마력 기관이 맞다· 겨우 비늘 조각 하나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제 기능을 발휘하는 완성품이었다·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에파가께서 가호를 내리셨거나 바즈칼께서 축복을 내리셨거나 니앗에젤프가 선물을 줬거나· 당연히 소거법에 의해 첫 번째 가능성은 자연스럽게 폐기된다·
그랬다면 에스테가 진즉에 알아차렸을 테니까·
“좀 노력해서 나머지도 해보지?”
[···노력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주인도 음식 먹다보면 ‘아 더 이상 못 먹겠다·’ 하는 느낌 받잖아· 그런 거라고·]
그리고 에스테의 주장과 용린이 세 장이었다는 점에 근거하여 니앗에젤프의 선물일 가능성도 낮아진다· 애초에 에스테에게 이런 기능이 있을 거라는 건 아무도 몰랐던 사실일 뿐더러 설령 그 사실을 수천 년을 살아온 덕에 니앗에젤프 혼자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세 장 중 뭘 쓸 줄 알고 이런 작업을 쳐 놓는단 말인가·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바즈칼께서 저를 좋게 봐주신 모양입니다·”
거기까지 판단을 하고 난 다음에야 어깨를 으쓱이며 용장들에게 에스테를 넘겨 준 뒤 최대한 의연하게 마지막 가능성을 입에 올렸다·
순간 에스테에게 달려들던 용장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정말 겨우 그런 말 한마디로 상황을 끝낸다고···?’ 라는 의미가 가득 담긴 시선을 보냈지만 당장 더 고민해 봐야 알 수 없는 건 똑같은데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겠어·
아니나 다를까 그 뒤로 용장들이 에스테를 붙잡고 한참을 씨름했음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흠흠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용사님도 바쁘시니 이 이상 욕심을 부려서 시간을 빼앗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하하하 저 역시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혹여라도 내 입에서 좀 더 살펴봐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기를 고대하던 용장들의 수염마저 기운이 빠져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도 교단을 돕던 도중에 나온 거니 마냥 시간을 허비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확실하게 선을 그은 덕인지는 몰라도 용장들의 포기는 빨랐다· 어쩌면 오늘만 날이 아니라는 장생종 특유의 믿음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갑옷 외에도 내 요청에 맞춰 제작된 파우치와 혁대 등을 차는 동안에도 그들은 더 이상 에스테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말씀하신 일은 빠른 시일 내에 진행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용사님의 앞날에 축복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언제 그랬냐는 듯 미우드 용장을 필두로 정중하게 예를 취하며 배웅해주는 용장들을 뒤로한 채 작업실을 벗어나자 지금까지 낄 틈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던 호위대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질문했다·
“용사님은 가시는 곳마다 새로움이 끊이질 않으시는군요·”
“저도 그게 불만입니다· 당최 삶에 여유가 없네요·”
표면적으로는 이제 겨우 16살이니 나름 유머러스한 답변이 될거라 여기고 한 말이었지만 어째 예상과는 다르게 기사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곳에서의 일정은 무사히 끝마쳤군요· 흡혈종의 건으로 돌아가는 열차는 용사님께서 원하실 때 얼마든지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어찌하시겠습니까?”
용무가 다 끝났으면 당연히 돌아가는 건데 굳이 물어본다는 건 아직 자잘한 일이 남았다는 뜻· 다행히 이번 드워프 왕국 방문에서 내 용무라고 할 만한 건 얼마 없었기에 이를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부산물 정산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모양이군요·”
딱히 질책하는 어조로 말한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위대장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애초에 물건이 사고 팔리는 건 기사들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저런 반응을 보이니 오히려 내가 다 미안해질 지경이다·
“많은 거래가 이루어졌던 덕에 참고 할 만한 기록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매물이 나온 건 오랜만인지라 여러모로 가격이 요동치는 모양입니다· 최선의 결과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기다리고 싶어도 내가 쉬는 동안 세상이 멈춰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 이상 늦장을 부릴 여유가 없다· 호위대장도 아마 그 사실을 알기에 자기 일처럼 미안해하는 것이리라·
“물건이 물건인 만큼 구매자를 찾는 것도 문제겠죠· 거래는 협상 담당자 분께 맡기고 돌아가야 할 거 같습니다· 데나 왕께서도 따로 저희를 붙잡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이대로 가면 되겠죠?”
“예 열차와 선로의 수리도 끝마쳤으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귀국하셔도 된다 통보 받았습니다· 좀 더 좋은 시기에 따로 연락을 드린다는 말씀도 함께 말이죠·”
당장 나를 붙잡지 않은 용장들과 데나 왕의 배려가 고마울 지경이거늘 어차피 들어올 돈 직접 체감하겠다고 시간을 때우는 건 꼴이 우습잖아·
“잘됐군요·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깔끔하게 돌아갈 때가 맞다· 내 결정에 호위대장을 비롯한 기사들은 두말없이 수긍하며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그렇게 우린 그간의 체류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순식간에 귀환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
휼겐 대사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열차 소리에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동음만으로도 열차를 구분 지을 수 있는 그였기에 제국행 열차라는 것은 듣자마자 알아차렸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간 것은 열차가 아니라 열차에 타고 있는 승객 때문이었다·
“역시 부탁이라도 해보는 게 맞지 않았을까 그리 후회하고 있나?”
상석에서 들려오는 국왕의 목소리는 평온하다·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모든 가신들은 심각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데도 그는 국왕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줄 알았다·
“아쉬워말게· 미우드 용장이 거래를 잘 마친 덕에 언제든 구원을 부탁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잖나·”
“왕국의 형제들을 믿지 못 하는 것은 아니오나···”
“적의 규모가 규모이다보니 불안한 마음이 앞서는 거겠지· 이 자리에 자네의 의중을 곡해할 돌머리는 없으니 그리 조심할 필요 없어·”
데나 왕이 던진 농담은 시답잖은 것이었으나 가신들은 너나할 것 없이 동조하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왕이 말했으니 슬퍼도 웃는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심각한 분위기를 풀고 타개책을 마련하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그만큼 왕국의 전선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데나 왕이 부정적인 의견만 내지 않았다면 누구 하나 직접 나서서 마신의 용사나 제국을 붙잡고 협상이라도 하고자 기를 썼을 정도로·
“버러지같은 괴물 놈들의 머릿수가 늘어난 것도 사실이고 왕국 전역에 있는 열차들을 끌어다가 수비로 돌려야 할 정도로 긴박한 것도 사실이지· 허나 엘드미아 에가는 마신의 용사일세·”
이와중에도 투구를 벗지 않아 표정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왕국이 처한 현실을 입에 담는 데나 왕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덕분에 가신들은 데나 왕이 이어서 할 말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우리는 피해가 막심할지언정 버틸 수 있지만 마신교는 그렇지 않지· 우린 왕국이 전복될 위기에 놓인다 하더라도 몇 개월은 더 남았지만 저들은 아니야· 그런 이들의 희망을 억지로 붙잡으려 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거라 생각하네·”
데나 왕의 말은 정론이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면한 위협이 안겨주는 불안감 때문에 아쉬움을 버리지 못했다· 데나 왕 역시 그런 가신들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더 말하는 대신 본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보고나 마저 듣지· 경계에서 넘어오는 놈들의 움직임이 계획적으로 변했다고?”
“그렇습니다· 네 발 달린 것들만 있는 무리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두 발로 걷는 것들이 문제입니다·”
분명하게 ‘명령’을 전달하고 부대의 움직임에 변화를 준다· 장군직에 앉아 있는 드워프의 보고는 한층 더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니앗에젤프가 겨울의 주인이라 불리며 얼어붙은 산맥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규정하고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적다· 하지만 그가 ‘무엇으로부터’ 산맥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더욱 적다·
그건 니앗에젤프의 바람이기도 했다· 얼어붙은 산맥 저 너머에 악신에게 오염되어 손쓸 도리조차 없는 땅이 있고 그 안에서는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퍼져 봤자 좋을 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없는 위협이자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의 위협이다· 어차피 완벽하게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를 온 세상이 알게 해봤자 과거 선신들이 일궈낸 업적을 폄하하는 것들만 생겨나며 악신 추종자가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지금까지 그 판단은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근래에 이르러 뭔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왕군은 악신의 힘을 이용하고 그러기 위해 악신 추종자까지 생겨나는 요즘이니··· 왜 갑자기 그런 기형적인 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지에 대해 굳이 고민할 필요 없다는 것만큼은 좋군·”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데나 왕의 농담이었으나 이번엔 그 누구도 쉬이 웃지 못했다·
모종의 이유로 악신의 기운이 태동하며 그 권속들이 슬금슬금 과거의 힘을 되찾고 있다는 소리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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