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기엔 아직 여유가 남은 시각·
이제야 천천히 처소 주변에 등불이 켜지고 있었고· 하늘은 달을 기다리며 노을을 떠올리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며 가을을 맞이하기 시작할 무렵·
처소 한 편에 배치된 작은 창고·
그 안에는 여러 인물이 모여 있었다·
하나 같이 가지각색의 개성을 지닌 무엇하나 겹치지 않는 이들·
성별도 무공도· 하다못해 입은 옷조차 제각각이지만, 그런 이들에게 고통 점이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한 사람을 상관으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
오로지 그 한 명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존재들·
명령이 떨어진 순간, 그 명령이 무엇이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번 모임 또한 명령에 일환이었고, 그런 명령을 받은 이들 중 한 명·
검은 머리칼에 짧은 머리를 지닌 여인, 통칭 봉순이는 구석에 있는 한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끄···끄으····”
침음소리가 들린다·
벽을 따라 구석진 곳에서 들려오는 신음이다·
제대로 선다면 이 방 천장에 닿을 것 같은 거대한 덩치·
어마어마한 근육에 악력에 한에선 여기 모인 이들 중 가장 강할지 모르는 사내였다·
봉순이 본인조차 싸우면 질 거라고 확신할 만큼의 강자였거늘·
“끄흐···흐으으으·····”
그런 사내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듣기로 아마 이틀 내내 저러고 있었다고 하던가·
땀을 뻘뻘 흘리는 걸로 보아 기운을 봉인 당한 것 같았다·
그 상태로 이틀째 머리를 박고 있다·
상상만 해도 고통스러운 광경이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 사내를 보며 불쌍히 여기지 못했다·
아니, 불쌍하게 생각해도 쳐다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사내 위에 앉은 청년·
그가 있는 한 절대 불가능한 일이리라·
꿀꺽·
이를 보던 봉순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무, 무서워·’
두렵다·
보통 겁을 먹지 않는 봉순이건만, 그녀는 지금 상황이 그 무엇보다 무서웠다·
봉순이가 모시는 주인·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자 언젠가 자신에게 씨를 줘야 할 남자·
이른바 교주라 부르는 주인이 그 원인이었다·
‘교주···· 왜, 왜 화났지?’
봉순이는 떨리는 손을 숨기며 연신 침을 삼켜야 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평소에도 화가 났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거나 한껏 짜증 난 얼굴을 하고는 했지만, 이번엔 다르다·
되레 무표정·
청년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벌을 받는 사내, 당덕 위에 앉아 있었다·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방에 모인 전원· 그들의 생존본능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교주···· 교주가 화났어·’
저것이 분노다·
무표정 속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기운은 주변을 가득 채워내고 있으며, 빛을 삼킨 듯 어둠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숨이 막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리도 화가 난 걸까· 목을 꽉 조여오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느낌·
그런 아득한 느낌에 봉순이는 떠올렸다·
‘짜, 짜릿해····’
···나쁘지 않은 감각이라고 말이다·
조금 더 겪었다간 위험할지 모를 일· 그 상황이 봉순이를 더 자극하고 있었다·
‘후욱! 후욱!’
이상한 감각에 끝내 중독될까 싶을 즈음·
“···끄흐····”
힘들어 하는 당덕을 보며 청년이 시선을 보냈다·
“힘들어?”
“아···아닙···· 아닙니다···”
“그래, 안 힘들어야지·”
씨익·
청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그 즉시 사방에 있던 이들이 몸을 한 번 짧게 떨었다·
“말도 제대로 안 쳐 듣는 놈이 힘들기까지 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렇지?”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그럴 필요 없어· 들을 필요 없는 말이니까 안 들었겠지·”
쿠구궁·
“크헉····”
갑작스런 무게감이 더해졌는지 당덕이 헛숨을 터트렸다·
“대단하신 귀악창께서 내 말 따윈 들을 필요 없지? 그렇잖아?”
“끄으으으···!”
“적당히 끝내고 합류할 준비 하라니까 싸움이 재밌어서 깜빡했다고? 그걸 변명이라고 해? 이 새끼가· 내가 너 쌈박질이나 하라고 작전 짠 줄 알아?”
“···죄···죄송합니···다····”
이젠 팔까지 떨리기 시작한 당덕·
그 거대한 팔뚝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보자니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기운으로 짓누르던 와중·
“야·”
“어···으···응·····”
청년·
구양천이 옆에 있던 철지선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도 당덕은 죽어나가고 있었다·
“만약에 말이야· 진짜 그냥 묻는 건데·”
“···뭔데?”
“지금 상황에서 황보세가를 치워버리면, 조금 곤란하겠지?”
“···응···?”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구양천의 말에 철지선은 잘못 들었다는 듯 표정을 구겨야 했다·
“그게···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야· 황보세가를 버릴 생각을 하면 어떻게 될까·”
“···”
현 상황에서 황보가를 배제한다?
심지어 버릴 생각을 한다고 하면···
철지선은 고민을 짧게 끝냈다·
사실 듣자마자 정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곤란하겠지?”
그것도 아주 아주 많이 곤란할 것이다·
여기까지 판을 깔아놓고 황보가를 제외할 생각이라면···도대체 어디부터 바꾸고 채워 넣어야 할지 감도 안 잡힐 지경이다·
하지만·
“뭔가 계획이 있는 거야?”
철지선은 그보다 구양천을 믿었다·
저 친구는 뭔가 합리적인 이유가 없으면 말을 내뱉지 않으니,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분명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아니·”
“응···?”
들려온 말에 철지선이 당황을 머금었다·
“그냥 좀 열 받는 일이 있어서· 다 엎어버릴까 생각했거든·”
“그게 무슨····”
미친 소리지? 철지선은 말을 뱉으려다 말고 악착같이 참아내야 했다·
“아니다· 됐어· 반쯤 농담이야·”
“···”
반은 진담이라는 소리잖아·
그 소리가 더 무섭다는 걸 정녕 모르는 걸까·
“혹시, 화난 것도 황보가가 이유인 거야?”
“음?”
철지선의 물음에 구양천이 묘한 표정을 띠운다·
“무슨 말이야· 나 화 안 났어·”
“···”
“···?”
“끄····”
퍽이나 그렇겠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다·
구양천이 내뿜고 있는 감정이 얼마나 짙고 지독한 것인지·
말 해줘야 할까?
잠깐 고민하지만 철지선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잘못 말했다간 맞는다·’
괜히 물고 늘어져 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지난날의 체감으로 필히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그냥 모른 척 넘어가자·
그리 생각하며 철지선이 마른침을 한 번 삼킨다·
그때·
“아 참, 그건 괜찮냐?”
구양천에 물음에 철지선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 말이야?”
“이번에 제갈가의 씨족이 잡힌 거· 말이야·”
“아아····”
이어진 설명에 그제야 철지선이 무슨 말인지 깨닫는다·
맹에 대항했다는 제갈가의 후인들· 그 습격을 구양천이 이용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에 관해 구양천은 철지선에게 정말 괜찮으냐고 묻는 것이었으나·
“무슨 상관이겠어·”
철지선은 다소 싸늘해진 눈빛으로 답한다·
“그들은 진짜가 아니니까· 상관없어· 어떻게 되든·”
“으음·”
차갑고 또 마른 대답·
이를 듣고 구양천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필두마를 버림 패로 사용하겠다던 전략·
그걸 쓰기 전에 구양천은 미리 철지선에게 말을 물었었다·
상황에 따라 제갈가의 언급이 나올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제갈가의 후인들을 쓸 계획이라고·
또한, 이후 제갈가에 관한 세간의 인식이 더 안 좋아질 수 도 있는데· 이 작전을 써도 괜찮겠냐 물었었고·
이에 철지선은 딱 한 가지를 물었다·
제갈가의 명예를 다시 찾게 해주겠단 약조는 변함이 없느냐고·
이 말에 구양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어도 삼 년· 그 안에는 제갈가를 예전과 같은 명성으로 올려주겠다고 말이다·
“약속은 꼭 지켜·”
“그래야지·”
대답을 하면서도 구양천은 철지선을 살폈다·
‘진짜가 아니다라·’
필두마 놈들은 진짜가 아니다·
그 말이 어지간히 거슬린다·
‘전생에 필두마는 천유랑아의 호위부대를 겸했었지·’
그랬던 사실이 지금 시대로 와선 의문으로 바뀌었다·
필두마는 사실 제갈가의 씨족이었고·
천유랑아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이 연관성이 과연 우연일까 싶은 것인데·
‘그런 상황에 철지선이 필두마쪽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은···’
철지선은 유약하고 어느 정도 정을 지닌 놈이다·
쌩판 모르는 타인의 죽음에도 어렴풋이 죄책감을 가질 만큼 유약한 놈이거늘·
이런 놈이 필두마의 죽음에 개의치 않는다는 것으로 보아·
‘싫어하는 인물 쪽이었다고 봐야 하는데·’
대체 왜 제갈세가의 후인이 다른 후인을 싫어하는 걸까·
‘신의나 제갈혁도 마찬가지였지·’
필두마는 물론 신의를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였기에,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알아봐야겠네·’
슬슬 알아봐야겠다·
어차피 저놈에 관해선 알아볼 게 좀 있었던 만큼· 이 일이 끝나는 대로 움직여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판단한 다음·
구양천은 품에서 서찰을 한 장 꺼내 철지선에게 건네준다·
“이건 뭐야?”
“맹에서 오늘 받은 거·”
무림맹에서 받아왔다고 하니 곧장 철지선이 받아 펼친다·
그 순간·
“뭣···!?”
내용을 확인한 철지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 반응에 구양천이 픽 웃으며 설명을 이어 붙인다·
“나보고 대주를 해달라면서 주더라고·”
“대주···? 너보고 대주를 하라고 이걸 줬다고?”
“그렇다더라·”
“무림맹이 미친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정파라는 것들이···· 왜 너한테 맹의 대주직을 하라고···? 진짜 맹을 말아 먹을 생각인 건가···?”
“내가 봐도 그···뭐 이 새끼야?”
듣다 보니 뭔가 이상해 되물었다· 그러자 철지선이 말실수를 했다는 듯 입을 스윽 가린다·
“···말이 좀 헛나왔네·”
“아닌 것 같은데? 진심이 막 느껴지던데?”
“아, 아니야·”
안색이 파래지는 철지선· 녀석을 향해 뭐라 더 말하려던 찰나, 구양천은 귀찮다는 듯 혀를 짧게 찼다·
지금은 이러는 것조차 귀찮았다·
“됐으니까· 어때 보이는지 말이나 좀 해줘 봐·”
“조건에 관해서? 아니면·”
“조건이야 딱 봐도 정신 나간 수준이니까· 그건 됐고· 할만한 일인지 아닌지· 그걸 말해달라고·”
“···”
물음을 들은 철지선이 살짝 눈을 좁힌다·
“대주직을 받을 생각이야?”
“글쎄· 봐서?”
“···위험한 일이야·”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가 정해둔 일정에도 차질이 생길 거고· 아무리 네가 강하다지만···· 그곳은 호랑이 소굴임은 다르지 않아·”
“그 말도 맞지·”
마교는 본격적으로 이름이 퍼지기 시작했다·
맹에선 어떻게든 입을 막으려고 하고 있으나· 그마저 쉬이 되진 않고 있는 모양·
그렇겠지·
‘다른 것도 아닌 도왕의 사망인데·’
습격이야 제갈가의 짓이라고 못을 박으면 그만이지만·
그 위에 천마라는 놈이 나타난 것은 물론, 육좌 중 한 명이었던 도왕이 습격 탓에 사망까지 해버렸다·
팽가에선 이를 맹에서 붙잡고 있던 마교의 인물, 귀악창의 짓이라고 보고했고·
그의 손에 비성도는 치명상을 입었으며, 도왕은 사망했고 맹의 무인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고 공식 발표를 진행했다·
여기서 문제가 있으니·
그건 바로 당덕이 도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금제를 이용해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누군가 도왕을 죽였고· 이걸 당덕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리 보는 게 옳았고·
구양천은 이 일의 주범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팽우진·’
비성도 팽우진·
이 새끼가 저지른 짓이다·
놈이 제 아비를 죽여 놓고 마교에 뒤집어씌웠다는 것인데····
어찌 그랬느냐를 떠나 마교는 이를 구태여 반박하기 위해 나서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믿을 놈은 없을 거야·’
이미 하남을 습격하고 개판을 만들어내 악명이 생긴 상황·
여기서 사실 도왕은 우리가 죽인 게 아닙니다· 라고 해봐야 믿을 이는 없었고·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거든·’
이렇게 생겨난 악명이 또 마냥 나쁜 건 아니었다·
실제로 도왕을 죽인 당덕은 신예 강자로 자리를 매겨진 상황이고· 당덕의 악명이 높아진다는 건 내게 이득인 부분이었다·
그래서 구태여 수를 쓰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마교에 관한 얘기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맹이 공식적으로 척살령을 내려주길 바라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척살령은 말 그대로 무슨 수를 써서든 그들을 죽이라는 뜻·
어떤 일을 진행하고 있든, 마교가 나타났다는 보고만 나오면 즉시 담당 지부는 물론, 맹의 강자가 나서 사냥을 준비하게 된다·
전생에 한 번 걸려봐서 잘 아는데, 이게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었다·
‘똥도 제대로 못 쌌지·’
나중이 되어선 기감에 걸리는 순간 태워 죽였으니 편했지만·
초반엔 뒷간도 조심히 가야 했다·
똥 통에 숨어있다 찔러 올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그런 상황인 만큼, 내가 직접 대주로 가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 수 있었으나·
“근데 또· 이것만큼 좋은 기회는 없잖아·”
“뭐?”
“처리해야 할 놈들이 죄다 거기 모여있을 텐데· 멀찍이 하나하나 따 먹는 것보다· 가서 싹 끝내는 게 편하지 않겠어?”
묵연은 물론·
난 아직 맹에서 얻어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거기에·
‘봉순이를 제대로 써먹지 못했거든·’
기껏 준비해둔 비수를 쓰기 딱 좋은 상황이지 않은가·
“말도 안 되는 말이야·”
이런 말에도 철지선은 부정적인 반응만 가득했다·
“정녕 하겠다면···· 계획은 물론 앞으로의 일정을 다 바꿔야 하잖아·”
“어·”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거야?”
“모르지·”
“뭐?”
구양천의 대답에 철지선이 벙찐 표정을 짓는다·
대체 저게 무슨 대답인가 싶어서였다·
“모르겠다고···?”
“어· 모르겠어·”
“근데 어째서···?“
“모르겠는데· 해야 할 것 같아·”
“전혀 이성적인 부분이 없잖아···!”
해야 할 것 같으니 하겠다·
안 하는 게 더 좋은 이유가 수십 가지거늘, 구양천의 대답에 철지선은 복창이 터질 것 같았다·
하나·
“해야 할 것 같으면 하는 거야· 언제나 그랬어·”
구양천은 확답을 내놓는다· 절대 바꾸지 않을 거라는 태도였다·
“그럼 아까도 말했지만, 계획이····”
“맞지· 계획이 조금 수틀리겠지?”
조금 정도가 아니라고· 철지선이 그리 말하려고 하지만·
“그러니까 이제 알아와·”
“응···?”
구양천의 덤덤한 말에 철지선이 멈칫해야 했다·
방금 뭐라 한 거지···?
“다른 놈한테도 연락을 보내 둘 거니까· 이제 부터 너도 알아오라고·”
“뭐···뭘 말하는 거야?”
아니길 바란다·
그리 믿으며 되묻는데·
“내가 이 일을 저지르고도 괜찮을 계획· 그걸 찾아오라고·”
“···”
“부탁해?”
부탁을 방자한 명령·
그제야 철지선은 깨달았다·
구양천은 애당초 정답을 정하고 물어본 것이었다고·
또한·
처음부터 자신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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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나 무림맹·
나는 어제와는 사뭇 다른 공간에 앉아 있었다·
그때도 썩 나쁜 공간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이번엔 그보다 더하다·
훨씬 품격이 느껴지고 준비를 확실히 했다고 체감되는 귀빈실이었다·
‘맹 내부에 이런 공간도 있었나·’
살면서 처음 들어와 보는 방이다·
실상 있는 줄도 몰랐다· 하기야 내 주제에 언제 이런 방을 와봤겠는가· 애당초 맹에서 좋은 방이라면 나와 상관없는 공간이었다·
‘색다르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이런 방에 떡하니 들어오다니·
여러 의미로 감회가 새롭다·
그렇게 주변을 슬쩍슬쩍 둘러보고 있을 무렵·
“예상외의 일입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곧장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쳐다본 위치엔 탁상 너머 한 노인이 보인다·
가능한 두 번은 보고 싶지 않던 노인네·
검존의 두뇌라 불리며 맹을 전성기로 이끌었던 책사의 표본·
제갈혁의 등장 전까지만 해도 희대의 책략가이자 전쟁터의 악몽이라 불렸던 노인·
전쟁터의 악몽·
묵연을 보며 내가 물었다·
“그런가요?”
“예, 설마 하루 만에 오실 거라고는 정말 예상치 못했습니다·”
말을 듣고 나도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마음을 정했으면 빨리빨리 끝내는 게 낫지 않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면, 성왕께서 답을 정하셨다는 뜻으로 봐도 된다는 것인지요·”
“예·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그렇군요·”
그 뒤로 침묵이 잠시 오간다·
묵연은 내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듯 가만히 날 쳐다봤고·
나 또한 그런 시선을 잠시 마주 보다 이내 입을 다시 열었다·
“제게 주셨던 ‘부탁’ 말입니다·”
“예·”
“받아들이겠습니다·”
“···!”
재빨리 나온 대답에 묵연의 눈이 커진다·
설마 받아들일 줄 몰랐던 걸까?
무슨 반응인지 자못 궁금하나, 파고들지 않았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단·”
뒤이어 본론을 끄집어낸다·
“조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제 부터다·
이제 부터 나는·
맹의 두뇌와 맹렬한 흥정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