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9
부그르르르-
포옹!
수면 위로 파랑의 머리가 쏙 올라왔다.
장소상으로는 여기가 맞는데.
그녀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산 산 산 산.
뭐 한반도니까. 강줄기를 타고 꽤나 내려온 모양이다.
주변으로 오로지 우거진 산에 사이로 흐르는 강.
짙게 깔린 물안개까지 더해지니 분위기가 아주 압권이다.
그나저나 대체 왜 이런 곳으로 불러낸 건지.
누가 봐도 수상한 장소이지 않은가. 파랑의 집에서도 멀고.
정말 파랑이 올 거라고 생각한 걸까?
…라고는 생각하지만 그간 겪었던 일이 아니었다면 파랑은 아무것도 모른 채 여기로 왔을 것이다.
‘아 시크릿 스카우트 뭐 그런 거구나’ 하고.
아주 대놓고 수상하니 외려 수상해보이지 않는 효과.
세계정부라는 이름값도 한몫한다.
아무리 음습하다 기분나쁘다 해도 일단은 정부니까.
‘설마 정부가 나를 불러내서 암살하겠어?’ 라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의 허점을 절묘하게 파고든 수다.
하지만 이런 허점을 파고드는 묘수는 상대가 그 허점에 대해 완벽히 인지하고 있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정부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파랑은 한 수 앞선 채 대국에 임하는 것이다.
사일로가 먼저 접촉해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
어쨌든.
파랑이 뭍으로 나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딱히 수상한 점은 없는데.
이제부터 파랑은 세계정부를 상대로 연기를 해볼 생각이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B급 헌터.
크게 한 건 터트린 덕에 세계정부와 커넥션을 만들 기회를 얻어 신난 평범한 소시민 헌터 유파랑이 되는 것이다.
그녀가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허접하다…. 나는 허접하다….’
“여러분 얘 진짜 허접해요. 다리 걸면 그대로 넘어지고 음식 뺏어먹으면 막 침울해하고.”
아잇 갑자기 이게 왜 떠오르는 거야.
진짜 허접해진 파랑이 고개를 휘휘 털고 양복으로 환복했다.
음 별거 없는데 약속 장소는….
“반갑습니다.”
“으우와아아아아악!!!!”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파랑이 깜짝 놀라 거의 뒤집어지다시피 했다.
아니 이 사람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인가.
가까스로 출항의 발동을 참는 데에 성공한 파랑이 눈앞의 사람을 노려보았다.
뭔가 장교처럼 보이는 제복에 세계정부 인장. 얼굴은 온통 백색인 데다 눈구멍도 없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다. 흑장발에 체형은 여성인 것 같고….
무엇보다 훈장 훈장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어깨에 가슴에 팔에. 척 보아도 나 높은 사람이오 하고 티내는 것만 같다.
일단 정부 놈. 나쁜 놈. 위험한 놈.
파랑이 경계태세를 최대로 끌어올리면서도 허접한 연기를 계속했다.
“누 누구세요?!”
“유파랑 헌터 되십니까.”
은행 카운터에서 자주 듣던 고저 없이 단조로운 목소리. 약간 변조된 건지 중성적인 목소리 사이로 기계음이 살짝 섞였다.
척 봐도 뭔가 높고 비밀스러워 보이는 사람.
“유파랑 헌터 되십니까.”
아까와 똑같은 톤. 생각이 꼬리를 무는 탓에 대답을 까먹고 있었다
최대한 당황스러워하는 연기 연기. 그들이 파랑이 가진 정보를 알아낸다면 즉시 죽이려 들 거다. 그러면 정보고 뭐고 말짱 꽝이니.
아니 그리고 내가 먼저 질문했는데 다짜고짜 뭐라는 거야. 빈정도 약간 상했다.
그래서 대답도 일부러 뭐같이 했다.
“아 네. 되세요.”
“…확인했습니다.”
가면을 써서 눈이 안 보이는 탓에 긴가민가했지만 파랑은 확실히 느꼈다.
이 여자 방금 파랑 뒤의 강을 의식했다.
“따라오시죠.”
여기서는 급습하지 않겠다는 건가.
그러면 파랑도 약간은 여유가 생긴다.
“저기 혹시 누구세요? 정부에서 나온 분 맞으신가요?”
“맞습니다.”
“아하…. 혹시 오늘 부르신 이유를 간략하게라도 알 수 있을까요? 제가 한 마디도 전해들은 게 없어서. 혹시 뭐 나쁜 일이거나 한 건 아니죠?”
“아닙니다. 유파랑 헌터. 저희는 그저 당신과 협력하고 싶을 뿐이예요. 이건 사담이지만 저도 방송 즐겨 보고 있습니다.”
아 협력. 그러시겠지.
너희는 협력하고 싶은 사람한테 타격대를 보내나?
당연히 방송도 즐겨 보시겠지. 눈깔에 불을 키고 파랑의 약점을 찾아야 할 테니.
파랑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미 파랑의 머릿속 미니 유파랑들은 정부를 전력으로 쳐부술 준비가 만땅이었다.
황량한 벌판 아래 수많은 미니 파랑들이 저마다 횃불 농기구 조리도구 등을 들고 결의를 다졌다.
그래도 방금의 대답으로 알아낸 희망적인 사실 하나.
아직 정부는 그들의 악의를 파랑이 눈치챘다는 걸 모른다.
파랑에게 자신감이 +1.
그래도 정부가 미운 건 마찬가지라. 눈앞에 선 여성의 칭호가 파랑의 속에서 ‘정부 년’으로 격하되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대답은 성실하게.
“와 정말요! 영광이네요!”
“만나뵙게 돼서 제가 더 영광이죠. 여기서는 대화하기가 어려우니 따라와주시겠어요?”
얼마나 급하면 따라와달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긴 이해는 간다.
파랑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그들로서는 확실한 홈그라운드로 끌어들이는 것이 훨씬 나으니.
여기서 파랑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의 가짓수를 생각해볼 수 있다.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나는 또 그 숫자를 봐버리고야 말았다.
첫째 세계정부가 사살을 시도하는 경우.
둘째 세계정부가 생포 납치 혹은 무력화를 시도하는 경우.
셋째. 세계정부가 회유를 시도하는 경우.
아래로 갈수록 발생확률이 낮고 파랑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커진다.
이미 각 시나리오에 대한 계획을 짜둔 파랑이 얌전히 터벅터벅.
약간은 긴장한 채로 눈앞의 정부 년을 따라갔다.
그렇게 하염없이 산길을 터벅터벅터벅터벅.
하루에 여섯 시간이나 수영을 하다 보니 기본적으로 체력은 일반인을 한참 초월하는 파랑이다.
혹시 저격이 날아오진 않을까 사방을 경계하면서도 티를 내면 안 되니 곁눈질이나 청각 육감으로 사주를 경계.
그러는 동시에 정비한 흔적조차 안 보이는 가파른 산길을 올라간다.
얼마쯤 걸어 올라갔을까 파랑의 눈앞에 드디어 사람이 만든 것 같은 무언가가 나타났다.
둘러쳐진 철조망 두꺼워 보이는 외벽 어째서인지 산속에 위장해 있는데도 회색으로 칠해진 외부.
그야말로 ‘산 속 비밀기지’의 정형이요 정석.
지나가던 나쁜 놈 하나 붙잡고 털면 딱 이곳의 위치를 불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총성은 없었으니 파랑이 생각한 세 개의 가능성 중 ‘사살’의 가능성이 살짝 내려갔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정부 년이 철조망 앞으로 걸어가 무언가를 건드렸다.
파랑이 어깨너머로 살짝 보니 두꺼비집처럼 생긴 무언가를 철커덩 열고 그 안의 버튼들을 탈칵탈칵 누르는 모습.
이윽고 안쪽의 스피커에서 차가운 남성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피 눈물.”
정부 년이 대답했다.
“독약 물.”
삐이이이- 철커덩.
경보음이 한 번 울리더니 열리는 문. 아마 암구호였던 모양.
파랑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양복 주머니의 순간이동 장치는 언제든 준비를 마쳤다. 물론 머리카락 속에 숨긴 출항도 그러했다.
“아직까지 워프를 차단하거나 왜곡하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일로에게서 확답을 받은 내용이다.
사일로의 기술로 불가능한 거라면 지구의 그 누구라도 불가능할 것이니.
파랑의 탈출이 막힐 걱정은 없다.
파랑이 워프할 예정인 스테이션은 사일로에서 미리 점거해 두겠다고 했으니 도착 직후 봉변당할 일도 전무.
워프 장치도 손 닿는 곳에 하나 품 속에 깊숙이 또 하나. 두 개나 챙겨 왔다.
파랑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상황을 최소화하고자 한 것.
그녀가 긴장한 채 철조망 문의 안쪽으로 향했다.
아까는 수풀과 나무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내부는 파랑의 상상과는 조금 달랐다.
들어서니 보이는 것은 마치 전생에서 보았던 영화 속 미군기지와도 같은 풍경.
한구석에서 오와 열을 지어 푸쉬업 중인 근육질의 남녀들 반대편에는 잘 관리되어 반딱반딱 윤이 나는 거대한 군사 무기들.
밀리터리 몰라요인 파랑으로서는 바퀴 달린 게 탱크요 뾰족한 건 뭐지 미사일인가? 정도의 감상이었다.
군데군데 막사가 쳐져 그늘이 졌고 마찬가지로 우락부락한 남녀 몇이 손부채질을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파랑에게 일절 관심도 주지 않는 걸 보니 미리 전달받은 모양.
파랑이 그들의 눈이나 표정 등을 유심히 훑었다.
‘딱히 뭐에 홀리거나 한 것 같진 않아.’
누가 봐도 건장한 군인들이다.
파랑이 적당히 감탄하는 척을 하며 정부 년을 계속 따라갔다.
그리곤 문제의 벙커 앞.
정부 년이 이번엔 품에서 카드키를 꺼내더니 문 옆의 키패드에 갖다댔다.
그리고는 바짝 붙어 키패드를 빤히.
아마 홍채 인식이거나 뭐 그런 느낌인 것 같았다.
“강황가루.”
“빛이 있으라.”
암구호가 한 번 더.
그리고는 철커덩 우르릉 기이이잉 문이 열리고 파랑은 비밀스럽고 음습하기 짝이 없는 세계정부의 숲 속 비밀기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쪽은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회색의 칙칙한 복도.
중간중간 갈라지고 십자길이 나오는 와중에 길을 안내하는 어떤 표식도 없다.
그런데도 정부 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길을 찾아가는 모습.
파랑도 최대한 길을 외우려 노력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다시 저벅저벅.
마침내 파랑과 정부 년이 한 철문 앞에 도착했다.
딱 보아도 두꺼워 보이는 철문.
“들어가시죠.”
문을 열자마자 ㄱ자로 꺾인 구조라 안쪽이 안 보인다.
파랑이 정부 년을 따라 안쪽으로.
ㄱ자인 줄 알았던 통로는 ㄹ자로 절대로 바깥에서 안쪽을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파랑이 정부 년을 따라 통로를 통과해 방의 모습을 확인했다.
온통 회색인 방 안 여러 가지 기계들이 파랑을 반겨주었다.
뾰족한 팔이 여러 개 달린 수술대처럼 생긴 의자 쇠사슬 달린 침대 한쪽에서 달궈지고 있는 화로.
욕조도 하나 변기도 하나.
구석마다 감시 카메라가 하나씩 총 네 개.
벽면에는 기괴하게 생긴 쇠붙이들이 한가득.
‘아하.’
그제야 파랑이 세계정부의 의도를 알아챘다.
왜 이 외진 곳으로 불러냈는지 어째서 자신을 즉시 사살하지 않았는지.
그들이 파랑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그야 이 공간을 보면 딱 알 수 있지 않은가.
‘고문실은 처음인데.’
출항 안 챙겼으면 어쩔 뻔 했어.
철컹.
파랑이 지나온 통로 너머에서 철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때다
+ 인공지능현자 님께서 AI 표지를 적선해주셨습니다. 여러 개를 받았는데 전부 너무 예쁘네요. 공지의 팬아트/표지 모음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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