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
파랑이 터벅 터벅 걸어가 털썩 의자에 앉았다.
뭘 보고 따라하는 건지 모를 비릿한 썩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고 다리까지 꼬아 주면 유파랑식 위협 완성이다.
눈앞의 정부 년은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겠소’라는 표정으로 일관 중.
파랑을 보는 눈빛이 정말 일생의 원수 보듯 하는 눈빛이다.
파랑이 눈도 깜짝 안 하고 사일로가 준 서류를 펼쳐들었다.
양면으로 인쇄된 서류였는데 앞면에는 정부 년의 신상정보가 뒷면에는 퍼스널 스킬을 제외한 정부 년의 스킬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다.
파랑이 그것을 과장되게 펼쳐 정부 년이 반대 면을 읽을 수 있도록 들고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유 정보 상황의 주도권이 모두 자신 쪽에 있음을 보여주려는 동작이다.
아니나 다를까 파랑이 읽고 있는 신상정보의 반대 면. 스킬 목록이 인쇄된 것을 확인한 정부 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대로 분위기 조성.
파랑이 집중해서 서류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황다혜 35세. 출생지 현재 거주지 모두 한국.
세계정부 산하 동아시아부…어쩌고 저쩌고.
파랑이 대충 건너뛰었다. 세계정부 놈들의 단점 중 하나다.
정부기관인 주제에 전세계를 관리해야 하니 산하 조직이며 부서며 뭐가 존나게 많다.
그러니 직함도 따라서 존나게 길어진다.
파랑이 그 길다란 직함 중에서 핵심만을 딱딱 골라 챙겼다.
요약. 한반도에서 정부가 벌이는 더러운 일 담당.
서류상으로는 뭐 특수작전 3과 과장이라느니 어쩌니 되어 있지만.
뻔하지. 파랑을 잡아다 고문하려고 한 년 아닌가.
그런 년이 과장으로 있는 특수작전과가 무슨 일을 할 지는 불보듯 뻔했다.
생각해보니 기분이 나빴다. 파랑을 유인해 산속에서 고문하는 게 ‘특수 작전’이었다는 말 아닌가.
파랑이 정보를 계속 읽어내려갔다.
부모 모두 10년 전 사고로 사망 형제자매 없음.
현재 독신. 약혼자가 있었으나 5년 전 살인사건에 휘말려 사망….
그밖에 집주소라던가 연락처는 딱히 관심이 없었기에 스킵.
다음으로 스킬 목록.
[쇼크웨이브(S)] [날벼락(S)] [고군분투(S)] [스파크 펄스(A)]…
예상대로 전기 계열 능력자다. 눈여겨볼 만한 스킬은 고군분투 정도.
심플하게 주변에 아군이 없으면 능력치가 크게 올라가는 스킬이다.
파랑을 혼자 고문실에 끌고 들어간 건 이것 때문이었나.
파랑이 스킬 정보까지의 정독을 끝내고 황다혜의 눈빛을 티 안 나게 살폈다.
그녀의 표정에 드러나 있던 완강한 저항의 의지가 살짝 수그러든 것이 보였다.
아마 파랑이 스킬 정보를 읽는 동안 뒷면에 새겨져 있던 자신의 신상정보를 본 탓이리라.
파랑이 서류를 책상 위에 툭 올려놓고는 다시 팔짱을 꼈다. 그리곤 발을 까딱까딱.
눈빛을 보니 딱히 뭐에 홀린 것 같지는 않은데.
세뇌 최면 매혹… 그 비슷한 것들.
그런 상태이상에 걸린 것을 헌터 업계에서는 ‘홀렸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홀린다는 것은 마치 질병과 같아서 뭐에 홀렸는지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뭐에 홀렸는지 알지를 못하면 정신을 남김없이 파괴해서 쓸어내 버리는 것 외에는 답이 없기 때문.
보통은 행동으로 알아내는데 딱히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도 않는 것 같고. 눈에도 이상 없음.
다음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파랑이 이번에는 메모용으로 준비된 종이에 연필로 슥슥 그림을 휘갈겼다.
전생 화가에 현생에서도 그림을 취미로 꾸준히 하는 파랑이다. 금세 거칠면서도 화려한 그림이 나타난다.
파랑이 그린 것은 크리노라는 괴어. 갯고사리라는 종이 변이한 괴어다.
그것을 황다혜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어 보았다.
“뭐 느껴지는 거 없으세요?”
“말하지 않겠다.”
이성이 남아있다. 크리노에 홀린 것도 아니고.
그러면 맨정신인 상태에서 그 지랄을 했었다는 건데.
이러면 파고들 수밖에 없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요?”
“있을 것 같나.”
“있어야죠. 생사람을 잡아다 고문하려고 했는데.”
“생사람? 하….”
정부 년 황다혜가 허탈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하지만 어이가 없기는 파랑도 매한가지였다.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말해요. 왜 나에게 그렇게 큰 원한을 품고 있는지 그리고 당신들 목적은 뭔지. 싹 다. 아는 대로 전부.”
“방금까지 내 신상정보를 신나게 봐놓고선 아직도 눈치를 못 챘나?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씨발 진짜 모른다고.
한을 품은 육두문자가 파랑의 가슴께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이 년의 대가리에 당장에라도 ‘증거’를 때려박아버리고 싶다.
수리가 덜 된 게 한이지.
다행히 눈앞의 정부 년은 파랑에게 영겁의 고통을 줄 생각까지는 없었는지 마침내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끝까지 날 기만할 셈인가? 아까 네가 보던 서류는 장식용이야? 이 살인마 년이.”
그리고 파랑의 머리가 잠깐 백색이 되었다.
살인마? 예? 저요? 제가요?
“무슨 개소리야 살인마?”
“끝까지 모른 척할 셈이야?!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내가 이 입으로 하나하나 네년의 뇌리에 처박아주지. 3년 전 나타났던 연쇄살인마. 2주간 15명을 살해하고 도주. 이후 행방불명.”
파랑은 정신이 아득한 느낌이었다. 이 미친 년은 대체 무슨 아니 하.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 세상에 다시 나타나선 뭐?! 인터넷 방송?! 잠수를 막아?! 개 같은 년!! 하늘도 무심하지지. 드디어 네년을 내 손으로 잡아 죽일 기회가 드디어 왔었는데!!!!”
혼자서 말하다가 감정에 북받쳤는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정부 년.
파랑이 저 멀리 날아가려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상황을 정리해보려 노력했다.
그러니까 눈앞의 이 미친 년은 지금 파랑을 5년 전에 나타난 연쇄살인마로 알고 있고 정황상 3년 전에 죽었다는 약혼자가 그 살인마에게 당했다.
진짜 순도 100% 개소리다. 파랑도 그 연쇄살인마를 안다. 원작에 나오니까.
2주간 15명을 살해한 것까지는 사실. 하지만 범행 현장을 한시우 헌터에게 들켜 그대로 즉결심판 당했다.
애초에 지금 같은 세상에 살인마가 도망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 것 같은가. 전 세계에 눈과 귀가 있는데.
파랑은 그 연쇄살인마가 재판받는 것까지 뉴스를 통해 지켜본 몸이다.
그리고 파랑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이 미친 년이 자기 약혼자를 살해한 범인이 현행범으로 체포됐다는 걸 모를 리는 없다.
남은 가능성은 하나.
‘기억을 조작당했어.’
해저의 무언가가 ‘3년 전 살인사건의 범인은 유파랑이다.’라는 디테일하면서도 인간적인 세뇌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범인은 높은 확률로 아니 무조건 인간.
파랑이 한숨을 푹 쉬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기 위함.
밖으로 나가니 정장 차림의 사일로 남성이 다가와 물었다.
“어떤 것 같습니까.”
“기억을 조작당했어요. 괴어의 짓은 아니고 사람에 의해서요.”
“인간에 의한 기억의 조작이라…. 아 그거라면 짐작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뭐죠?”
“특수작전과의 상위 부서 부서장이 정신계열 능력자입니다. 그에게 세뇌당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군요.”
“그게 누구죠?”
정신계열 능력자라면 파랑도 그 정보를 알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자오 양이라는 자입니다.”
자오 양. 자오 양….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혹시 그 사람 퍼스널이 뭐죠?”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이장폐천(以掌蔽天)이라는 스킬입니다. 페널티는 무엇인지 아직 모르지만 세뇌 계열 정신 공격의 보정치를 크게 올려주는 것이 능력이죠.”
‘이장폐천 자오 양!!’
그제야 파랑이 자오 양이라는 인물을 기억해냈다.
파랑이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며 절대로 세계정부의 고위직으로 있을 리가 없는 사람.
이장폐천 자오 양은 원작에 등장한 중국의 사이비 교주다. 한시우에게 살해당한.
작중에선 파랑이 황다혜를 정부 년이라고 부르듯 계속 교주 사이비 등으로 불리는 탓에 이름을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대강당에 300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을 무릎 꿇려 놓고 집단 세뇌를 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더랬지.
“유파랑 헌터 말대로 2년 전까지는 사이비 교주로 지냈습니다. 그 뒤 갑자기 행방불명되었고 1년 전쯤 돌연 나타나 세계정부 측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죠.”
2년 전. 원작에서 한시우 헌터가 자오를 격퇴한 시점과 일치한다.
원작에서는 역으로 정신 공격에 당해 완전히 폐인이 되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했는데. 여기서는 아니었던 모양.
이미 원작이 바뀌었다는 것을 한 번 확인한 파랑이었기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원작에는 자오의 세뇌를 푸는 방법이 명쾌하게 나와 있다.
종류를 불문하고 자오가 건 세뇌보다 강한 정신공격을 가하면 깔끔하게 둘이 상쇄되어 세뇌가 깨진다.
보통의 세뇌는 중첩되면 뇌가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완전히 붕괴하지만 자오의 세뇌만은 다르다.
이 정도면 세뇌 계열 상태이상의 해제 방법치고는 초초초간단한 편이다.
파랑이 이것을 포함해 자오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사일로에게 전했다.
사일로 연구원이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오의 세뇌는 굉장히 강합니다. 그자가 특작과의 과장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약하게 세뇌를 걸었을 리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해제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겁니다.”
그건 확실히 그랬다 작중에서도 슬레이어즈 멤버만이 세뇌 해제에 성공했을 정도이니까.
2년 전의 슬레이어즈라면 이미 세계 최강자 반열에 우뚝 섰을 시점이다.
그래서 파랑이 결단을 내렸다.
황다혜를 유리창 딸린 잠수정에 넣고 바다로.
“절대 지켜보거나 관측하지 마세요.”
“아 알겠습니다.”
사일로 목격을 원천차단. 파랑을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크라켄.”
유리창 끄트머리로 아주 살짝 크라켄의 촉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부 년은 그대로 기절했고 2시간 뒤 세뇌가 완전히 풀린 채 파랑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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