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3
사천에는 덕현친왕부가 있다·
무려 친왕 그것도 황제의 친동생이다·
친왕이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낸 적은 없으나 사천 제일 호족인 당가의 가주 정도면 큰 명절마다 인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 덕현친왕이 가주전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이 미친 딸년이 대체 뭘 하고 돌아다녔길래·
딸년은 딸년이고 친왕은 친왕이었다·
당가주 당투중이 막 절을 올리려는 때였다·
자유가 웃으며 입술 앞으로 손가락을 세웠다·
그에 당가주가 물에 뛰어드는 기묘한 동작을 취하며 얼어붙었다·
“아빠? 왜 그래?”
그러자 문제의 딸년이 손님들 앞에서 버르장머리도 없이 반말로 찍찍 묻는 것이다·
어여쁜 막내딸이라고 훈육을 못한 것이 아주 천추의 한이었다·
결국 그의 잘못이긴 했지만·
“흠 흠· 아니다· 이 자세가 몸에 좋다고 누가 그러지 않더냐·”
당투중이 어설프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영 불편한 자리였다·
사실 왕부와 당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대대손손 사천은 당가의 영역이었다·
난데없이 왕부가 들어서며 성도 땅 대부분의 주인이 되기 전에도 그러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권에 얽힌 복잡한 암투가 시작되나 싶었는데 왕부에서 먼저 발을 빼내니 이후로 야금야금 계속해서 이권을 빼돌리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맹렬히 머리가 돌아갔다·
친왕께서 굳이 비밀로 하고 방문하실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간 십여년을 없는 사람처럼 지내셨는데·
이번에 나온 초석 광산을 숨긴 것이 들켰나?
왜 또 하필이면 버르장머리 없는 딸년이랑·
그때 돌연 당투중의 머리에 벼락이 쳤다·
아· 그렇군· 친왕께서도 사내이신가·
친왕쯤 되면 아주 특급 신랑감이었다·
황통도 황통이거니와 기본적으로 사람의 됨됨이가 바르고 타인을 연민할 줄 알며 분쟁을 싫어하니 가히 군자라 할 인물이었으니까·
당투중의 태도에 한결 여유가 돌았다·
어쩌면 속만 썩이던 딸내미 덕을 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당가주가 태연을 가장하여 이어지는 수순으로 한 명씩 인사를 받았다·
“그래 귀빈들께서는· 오· 대모님의 기명제자시라고? 검후께서는 안녕하신가? 그래·”
대모의 기명제자 서문청·
당가주쯤 되는 무위로 면사를 꿰뚫어보지 못할 이유가 없었기에 당투중이 금방 낙담했다·
그럼 그렇지·
얼굴 말고는 제대로 된 구석이 없는 딸내미가 왕비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여야지·
어쨌든 친왕께서도 사내는 사내시로다 하고·
“아 어르신께서는· 아· 예· 알겠습니다·”
그냥 서문청의 수발 드는 노인·
“초려로구나· 기억이 나지 않을 리가 있겠니? 그래· 모용 노야의 희수연에서 보았었지· 팽가 놈도 별 탈은 없지? 뭐야 경지가 올라? 아니 그 짜식은 밥 먹고 도만 휘두르나·”
팽초려·
솔직히 오대세가를 넘어서 십대 세가 아니 개중 진주언가가 사라졌으니 구대세가 가주 중 팽초려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덩치도 덩치거니와 덩치를 하고선 예쁜 뱁새라는 이름을 한 번 듣고 나면 그야말로 뇌리에 박혀버리니까·
팽가주도 매번 저렇게 클클 줄은 몰랐다고 하는 판이 아니던가· 농담하기를 저럴 줄 알았으면 태산 혹은 태붕이라 이름을 주었을 거라고·
그리고 마침내 친왕 전하의 차례였다·
“거기 영준하신 자제분께서는···?”
“아빠 얘는 됐어· 덤으로 붙은 비실이야·”
“덤으로 붙은 비실이오· 자유라고도 하고·”
“음· 그 잘 오셨소이다·”
당투중이 해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당투중에게는 두 명의 부인과 여덟 명의 자식이 있었다·
두 명의 부인에게 내리 아들만 일곱이오 그 끝에 한 줄기 광명이 비쳤으니 금지옥엽 막내딸의 탄생이었다·
오빠가 일곱 명· 아들놈들 무심함에 질려버린 두 어머니 가문의 모든 어르신들과 직계 방계 사촌들까지 아주 보기만 해도 이쁘다며 자지러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객관적으로도 무림오화에 속하는 미모를 가진 어여쁜 소녀였으니·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는지 설명이 필요한가?
그야말로 당가 서열 일 위 가문 최고의 소악당이었다·
그나마도 당가의 가풍이 엄했던지라 소악당에 그친 것이다·
그래도 어른이 야단을 치면 순순히 무릎 꿇고 울면서 반성을 하니 애가 영 막돼먹지는 않았다고·
그리고 그 소악당이 저녁 식사에 앞서 일곱 오빠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내가 그 면사 뒤집어쓴 계집애한테 얼마나 수모를 당했는 줄 알아? 이대로는 못 참아! 안 참아!”
당난아가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장남 당진철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아야 아무리 그래도 그 여인은 도가의 큰어르신쯤 되는 배분이란다· 우리가 세가라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태상가주님 배열이야·”
“뭐에욧 지금 오빠 이 난아가 그 치욕을 당했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사죄하라고 막막 그랬단 말예요!”
“허나 그리 큰 손님께 어찌 독을·”
“난아가 사람들 앞에서 울고불고 빌었는데· 오빠가 난아 오빠가 맞아요? 어쩜 그리 매정할 수가 있어요!?”
“형님 아아 말이 맞지 않습니까· 아무리 도가의 어르신이고 나발이고 저자 한복판에서 당가 직계를 무릎꿇리는 법이 있답니까?”
“뭐 큰 독 쓰자는 것도 아니잖소· 배나 아프고 말 터인데 나랑 일곱째랑 같이 배아픈 척 하고 새벽에 좀 왔다갔다 하지· 음식에 문제가 있어서 직계들도 그렇다는데 뭐 따지고 들까?”
“윽 형님· 저두요?”
“역시 현 오빠! 진 오빠밖에는 없어요! 흥 큰오빠는 도대체 누구 편이에요?”
“아니· 아아야· 나는 그저·”
“정 그러면 큰형님은 못들은 척을 하쇼· 셋째 형이랑 넷째 형이랑 막내랑 하독을 할 테니까· 사합독이면 신의가 와도 못 잡지·”
“윽 형님 하독도 제가 해야 하는···?”
“기왕이면 그 면사도 확 벗겨버려요! 얼마나 추한 얼굴을 했나 그것도 볼 테야·”
“그건 일곱째가 넘어지는 척 하면서 잡아채면 되겠구나·”
“아니 형님? 그것도 왜 제가···?”
“밥먹는 것도 좀 방해해요! 옆에서 떠들면서 침도 막 튀기고 해줘요! 막 웃으면서 씹다만 것들 고명으로 얹어주란 말예요!”
“그건 일곱째가 전문이 아니냐· 일곱째가 그 소저 옆에 앉으면 해결될 문제지·”
“그건 좀· 저도 제 체면이란 게····”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다만 모두 명심해라· 진철 형은 소가주시니 아무것도 못 들으신 거다·”
“형님들? 제 의견은···? 대체···? 혹시 제 말 안 들리세요?”
“헤헹! 역시 오빠들이 최고에요! 큰오빠만 빼고·”
당가의 비열한 음모가 깊어지고 있었다· 만·
청이 면사를 쓰고 다니는 이유는 일단 할아범이 워낙 극성맞게 구는 것이 첫째였다·
둘째는 딱히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교의 수입원 중에서는 산맥 너머 요사스런 피부를 한 색목인들의 교역품이 한 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최리옹이 마교 비작부 사천 지부에 방문해서 개중 가장 귀한 면사를 강탈해왔다·
본래 저 개봉의 공주에게 진상해야 할 물건이 난데없이 사라졌다고· 그 소식을 들은 상인이 거품을 물었지만 어차피 청은 모르는 일이다·
밖에서는 안 비치고 안에서는 시야가 훤하게 튼 것이 과연 귀물은 귀물이었다·
밥 먹을 때도 한 단 접어 코끝으로 조정하면 그만이었으니 잘 때 말고는 매양 쓰고 다녀서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세번째 이유도 있었다·
면사가 처음에는 하늘하늘하니 좀 거슬렸는데 익숙해지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출도 전의 한민족 역시 마스크로 하관을 가려 마음의 안정을 얻지 않았던가·
몸의 불편함은 익숙해지면 그만이지만 마음의 편안함은 어느새 필수품처럼 깃들어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다만 이유가 사라지면 굳이 쓸 필요는 없다·
세 번째 이유·
자기 배분 아는 청이 세가에 들었으니 눈치 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굳이 마음의 평화를 쫓을 필요가 없었다·
두 번째 이유·
몸이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 몸이 편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첫 번째 이유·
최리옹도 해어독화를 보고 살살 배알이 꼴린 것이다·
최리옹의 눈에는 해어독화니 사천제일미니 해 봐야 청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으니까·
하다못해 미물인 고양이도 어여쁘면 둘러메고 나와서 동네방네 자랑을 하는 판이 아닌가·
(영역동물인 고양이는 괴롭겠지만)
그리하여 자유가 눈만 끔벅거렸다·
“···?”
“뭐야· 못 볼 꼴 봤나?”
“친구?”
“왜 맨얼굴 보니 낯설어?”
자유가 문득 떠오르는 대화가 있어서 분명 생각 없이 저보다 예쁜 여인을 보고 투기하지 않느냐 물었더란다·
그때 돌아온 내가 왜 투기를 하냐는 그 대답을 제멋대로 이해했다·
해어독화가 저보다 예쁜 여인이 아닌데 투기를 할 이유가 없겠지 그야·
“그 굳이 그 미모를 가릴 필요가 있었느냐?”
“아씨· 미모 이지랄·”
소름이 돋은 청이 자유의 팔을 퍽퍽 때렸다·
“악 악 그만 그만· 아프다 진짜 아프단 말이니라·”
자유가 팔을 마구 문지르며 몸을 사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시퍼렇게 멍이 드는 타격이다·
“말투 관리나 좀 하지? 어째 점점 성의가 없어진단 말이지·”
“크흠· 버릇이 된 것이라 내 어쩔 수 없이·”
“됐고 오리나 먹으러 가자· 아우 진짜 굶어 뒤지겠네· 대체 몇 시야?”
그렇게 서문청이 당가의 연회장에 강림했다·
청의 체형을 유심히 보았던 팽초려가 단박에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오 청아야 면사 벗었구나? 뭐야 예쁜 얼굴 왜 감추고 다녔어? 이 새끼 뭐? 자기는 얼굴 안 본다고? 그럼 그렇지·”
가장 먼저 움직인 이는 당가의 넷째였다·
스윽 밀며 들어오는 넷째의 움직임에 일곱째 막내가 당황했다·
“어 형님? 제 자리···”
“허허· 감히 형수님 옆자리를 탐하느냐?”
“아니 갑자기·”
“되었다 비켜 윽·”
순간 뒷통수를 치는 손길이 또 하나·
“너야말로 저리 가라·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는데 어찌 형을 놔두고 먼저 장가를 시도해·”
결국 둘째가 막내의 자리를 차지하고 점잖은 표정으로 꿈틀꿈틀 실실거렸다·
그에 당난아가 독기 어린 미소를 띄었다·
둘째 오라버니가 직접 나서시려는구나!
그래 생각보다 쬐애끔 이뻐서 당황했지만 어디 한번 당해 봐라 하고·
물론 그렇게 될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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