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아청은 현대인다운 판단력을 발휘했다·
어설프게 도망을 치면 따라잡힌다·
현대의 많은 이야기들이 알려준 교훈이었다·
그래서 열흘을 꼬박 자고 먹고 달렸다·
청은 마음을 놓았고 무림에서 새로 붙인 취미에 다시 열중할 수 있었다·
바로 식도락이었다·
아아· 이 서늘한 객잔의 향기·
참으로 긴 모멸의 시간이었다···
식탁에 앉아있자니 점소이가 다가왔다·
다분히 불편한 얼굴이었다·
무림 생활 2년차의 원숙함으로 이제 중원의 식사 예절 정도는 알았다·
객잔에서 자리란 중요한 것이다·
객잔의 중앙과 창가를 제일으로 치고 그에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리의 가치가 떨어졌다·
그리고 뒤뜰로 향하는 뒷문에 가까운 자리가 개중 제일 나쁜 자리였다·
싼 거 먹는 놈은 알아서 나쁜 자리로 가야한다·
객잔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러나 아청은 볕 드는 창가를 떡하니 차지했다·
열흘을 달리고 먹고 잤으니 꼴이 엉망이다·
주제에 상석을 딱 차지했으니 점소이의 표정이 밝으면 더 이상하다·
하지만 이 모든 규칙은 칼 앞에 의미가 없다·
식탁에 떡하니 기대어 놓은 검 한 자루에 점소이가 감히 다른 소리는 못 하고 불친절하게만 굴었다·
“뭘 드립쇼?”
“크큭···”
아청이 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점소이의 표정이 구겨지는 순간 아청이 은원보 하나를 탁자 위에 딱 올려놓았다!
“허억!”
“그래· ‘은원보’다· 여기서 제일 맛있고 잘하는 거 내놔· 세 개 내놔· 술도 내놔· 비싼 거 내놔·”
“알겠습니다!”
점소이가 숨을 있는 힘껏 들이마셨다·
“여기 손님께서 동파장육! 서유산생! 초기탕어! 주문하셨습니다! 조가죽엽청도 곁들이십니다!”
비싼 주문일수록 크게 외쳐야 한다·
점소이의 본분이었다·
이 손님 비싼거 시키셨다구요!
객잔 사람들 여기 보세요!
이 사람 갑부에요 갑부!
이를 통해 중국인들이 가진 진리 천박한 배금주의가 아주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대륙 민족의 특성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당해 보면 안다·
기분 쩐다!
객잔의 손님들이 아청을 부러운 눈으로 보았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것이었다·
헉 동파장육 서유산생 초기탕어까지!
오이오이 얼마나 부유한 녀석이냐구!
그리고 성내최고미녀(청백지신)이 다가와 죽간 한 장을 건네는데···
“쩝·”
아청이 인상을 찌푸렸다·
상상 속의 성내최고미녀(청백지신)이 경멸스럽다는 표정으로 아청을 내려다보았기 때문이었다·
낙양에서 아청은 눈호강을 톡톡히 했다·
개중 우호적인 눈빛이 한 번도 없었다·
나를 위해 웃어주길 원하는 나 이기적인가요?
그때 점소이가 나타나 술과 말린 과자를 아주 조심스레 내려놓고 뒷걸음질로 사라졌다·
어쨌거나 온갖 주접을 떨 정도로 아청의 기분은 좋은 상태였다·
아청의 기분이 좋은 경우는 셋 중 하나였다·
맛있는 음식이 눈 앞에 있거나·
지엄한 생사결을 통해 흠뻑쇼를 즐겼거나·
아니면 돈이 많거나·
그런 의미에서 지난 열흘의 도주 과정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흑영회의 아가씨 이름은 모르겠지만 집안에서 아주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 것 같았다·
내리사랑은 황금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버르장머리와 악업을 보면 얼마나 오냐오냐 자랐는지도·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한 것이거늘·
두 관이 넘는 황금은 흑영회주에게 주는 교훈 값으로는 충분했다·
그렇게 자식이 삐뚤어지게 놔두니까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하고 깝치다 뒈지는 것이에요·
다른 자식은 잘 키우길 바라요·
이 정도면 아동 전문가 오 선생님 수준의 큰 선생 아닐까?
그런데 사실 내가 죽였다는 증거도 없쥬?
정신 차리니 죽어있었을 뿐이구·
저 혼자 내 손에 머리카락을 감은 후에 스스로 목을 잘라서 자살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러니까 내 잘못은 하나도 없지·
오히려 세상 쓰레기를 셋이나 치웠으니까···
“씨발 밥 더럽게 안 나오네·”
아청이 욕설을 흘렸다·
그러니까 술 한 잔 먹고·
“끄아 쥑이네·”
중원인의 독주 사랑은 유별나다·
숟가락 한 숟갈 들어갈 술잔에 담긴 죽엽청이 혀와 목을 거칠게 할퀴고는 명치에 닿아 화르륵 불타올랐다·
너는 술이 쓰냐? 나는 달다·
왜냐하면 죽엽청은 원래 달기 때문이다·
뭐야 근데 원래 이렇게 맵나? 술이 매워?
아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뒷맛으로 아리게 올라오는 매운 맛이 기묘한데 그게 또 일품이었다·
몰라· 원래 이런가 보지·
홀짝거리고 있다 보니 요리가 나왔다·
겉면이 노릇하게 익은 돼지고기·
속은 부드럽고 겉도 부드럽다·
뭔가의 회와 함께 곁들인 튀긴 가지와 야채·
중앙에 허여멀건한 것이 조금 있는데 모르겠다·
초장이 없어 아쉽지만 농후한 단맛이 일품이다·
이름 모를 뭔가 대단히 큰 물고기 통째 찜·
민물고기 특유의 무른 살이 찜과 만나 발라먹기가 아주 지랄 같았다·
그래도 맛은 좋았다·
총평· 훌륭함· 도장도 콱·
대강 맛을 본 아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먹어볼 때였다·
“···”
이 돼지고기 맛이 굉장하다!
젓가락으로 들면 얌전히 집히는 것이 입에서는 빙수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살과 지방이 동시에 사르르 녹아드니 그야말로 녹진한 지방의···
“···”
뭔가 허여멀건한 것 푸딩 같은 생김새에 옅은 분홍색 미세한 핏줄 같은 것도 보인다·
입에 넣으니 이런 세상에 그야말로 녹진한 지방의 근데 맛이 좀 겹치네·
이럴 땐 야채로 입가심을···
“···”
튀긴 가지· 튀긴 가지였다· 맛있음·
맛은 상당히 안정적이야· 그런데···
“···”
“···”
“···”
“···야 꼬맹아?”
아청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아까부터 미묘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바라보는 꼬맹이때문에 식사가 제대로 안 넘어갔다·
열 살쯤 되었을까?
아이는 작고 빼빼 말라 안쓰러울 정도였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법이란다· 그리고 시선도 폭력이야 폭력! 내가 그런 순진무구한 눈빛에 굴할 줄 알았니? 그렇게 불쌍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얘야 이것 좀 먹어보렴 할 줄 알고?”
“···”
“하· 어이가 없네· 정말로 그럴 거라 생각했다면 난 그렇게 마음 약한 사람이 맞단다·”
“···?”
먹을 것으로 서러운건 진짜로 서러운 거다·
아청이 강호 생활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
특히 만두 씹고 있을 때 옆에서 요리를 처먹는 새끼들은 칼로 회쳐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할 정도였다·
중원의 만두는 속없는 빵뿐이다·
아청은 현재 부유했다·
미래의 부유함에 대해선 아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더욱 부유했다·
그리고 그건 이유 없는 친절의 원인이 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고기 머글래요?”
“!!!”
아이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아청이 큼직한 덩어리를 젓가락으로 콕 찍어 내밀었다·
아이는 떨리는 눈으로 고기를 한 번 보고 홱홱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고 또 고기를 보다가·
마침내 덥석 물었다·
아이는 말이 없었지만 표정으로 말을 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것이 있냐는 듯한 어째서 모르고 살았는 지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아이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아청이 낄낄거리며 아예 젓가락을 쥐어주었다·
“자 여기 앉고 그래 꼬맹아· 젓가락질은 할 줄 알지? 알아서 집어먹어라? 나는 상대가 아이라고 봐주지 않는 냉정한 사람이야· 애초에 자기 건 자기가 챙겨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법·”
아청이 맹렬한 식사를 시작했다·
아이는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하는 요리 접시를 보곤 결연하게 젓가락을 뻗었다·
이후 식탁에는 두 거지가 존재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명아!”
비명 같은 외친과 함께 한 여인이 우당탕 달려들었다·
아청은 고수라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인의 표정이 워낙에 절박하고 시선이 아이를 향했길래 그냥 놔뒀다·
여인이 아이를 낚아채듯 품에 안았다·
—-
“감사 감사합니다···! 대협···!”
어머니뻘 되는 중년 여인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양소월이라 하는 여인이었다·
너무 압도적 감사여서 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냥 애가 귀여워서 그런 건데요 뭘· 장명아?우리 장명이는 몇 짤?”
아이가 대답 대신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요 녀석 귀엽기는·
아청이 흐뭇하게 웃을 때였다·
“저 대협···”
“예?”
“장명이는 올해 열여섯이 되었습니다만···”
“네?”
아청이 아이의 비쩍 마른 꼴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열 살 초과로는 안 보였다·
“아이가 몸이 좀 약해서 또래보다 조금 못 자란 면이···”
어머님 좀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아청이 말을 참았다·
알고나서 보니 아이의 벌건 얼굴이 달리 보였다·
부끄러움이 아니라 수치심이었던 것이다!
열여섯이면 그러니까····
학교에 다닌 지가 너무 오래되어 학년과 나이를 바로 맞출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 8살? 맞나? 그럼 9 10 11 12 13 14 15 16·
아청이 손가락을 접어 겨우겨우 계산을 마쳤다·
중학교 3학년이라고? 얘가?
중학교 3학년 앞에서 님 몇 짤 따위 발언을 했으니 당연히 수치스러워 할 수밖에는·
아청이 경악했다·
그리고 양소월과 진장명을 번갈아 보았다·
양소월은 아주 곱게 나이먹은 아주머니였다·
차림은 빈궁해도 어딘가 기품이 있었다·
진장명은 볼이 움푹 들어간 꼬맹이였다·
애는 못먹었는데 애엄마는 멀쩡하네?
이거 혹시 설마·
게다가 애는 말도 못 하고·
그래도 선업으로 기운 아줌마라 방심했더니·
아청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 대협 오해십니다·”
“오해요? 무슨 오핸데요?”
“아이가 좀 아픈 아니 좀 많이 아파서···”
양소월의 표정에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다·
부정할 수 없는 애틋한 모정의 증거였다·
아 괜한 오해였구나·
아청이 머쓱해졌다·
“혹시 너도 한약 같은 거 잘못 먹었니···?”
“···뭐라는 거야· 못생긴 게·”
아청이 놀랐다·
말했다!
뭐야 말도 할 줄 알아!
아니 열여섯이면 당연히 말을 하겠지만·
그보다? 잘못? 들었나? 내용이? 쫌?
오잉? 기껏 먹여 놨더니 싸가지의 상태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날더운데 잘 지내고 계신가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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