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아청은 충격을 받았다·
호의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기껏 구하고 나니 새까만 인어공주를 본 왕자가 차라리 스스로 물거품으로 변해 사라진 심정이 이러할까·
“오우 우리 꼬맹이 싸가지의 상태가? 배고플 때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고 배부르고 나니 못생긴 거? 아앙?”
“···쯧· 누나는 무슨· 웃기시네·”
“죄송합니다 대협·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작년부터 좀 삐딱하니 얘가 왜 이러는지· 아이고·”
작년? 그러면 열다섯· 중학교 2학년·
아청이 납득했다·
사춘기는 인정이지· 암·
그러나 애엄마는 맺힌 것이 있었다·
“갑자기 그냥 말을 안 듣는데 안 듣기만 하면 다행이지 하지 말라는 건 꼭 하려 들고· 하기사 어미가 미울 만도 하지· 물려줄 것도 없는 년이 몸뚱이 하나 건강하게 낳아주지도 못하고···”
“아! 그딴 소리 하지 말라고! 진짜 짜증나게!”
진장명이 빽 소리를 지르곤 계단으로 달려 올라갔다·
덕분에 마음에 상처 입은 어머님과 단둘이 남게 된 아청만 난처해졌다·
“어···· 그· 한잔하실래요?”
“그럼 염치 불구하고 딱 한 잔만···”
“아유 힘드시겠어요·”
“힘들긴요· 어미가 못나서 자식이 불쌍하니 이 꼴인가 봐요· 그냥 평범하게 그것도 안 돼서·”
양소월이 서글픈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한 많은 익숙한 동작으로 잔을 꺾어 마시는데 그리고 나선 입을 가리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쳤다·
양소월이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바짝 낮췄다·
“저기 대협·”
“네?”
“조심하십시오· 술에 독이 들었습니다·”
“네?”
양소월이 손수건을 슬쩍 내보였다·
마시는 척만 하고 뱉은 술로 축축했다·
아청이 손수건과 술잔을 번갈아서 보다가 냅다 술을 꺾어 삼켰다·
“대협!? 어찌!?”
“크으· 쥑이네· 아이고 입에 붙어서·”
뒷맛으로 은은히 올라오는 매운맛·
입이 마비되는 듯 얼얼한 가운데서도 선명하게 불타오르는 매움이 있었다·
얼얼한 맛이 마· 매운 맛이 라·
합쳐서 마라맛!
한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맛·
고대로부터 조상님들이 즐기신 맛·
심지어 수박도에 그려져 있는 전통의 맛이었다·
이게··· 의도한 맛이 아니야?
원조 마라 맛집답게 술도 마라 맛이 나는 줄 알았는데·
마라 잘하는 집이 아니었다니!
“체질 때문에 괜찮아요·”
캐릭터 메이킹을 할때 아청은 추천글을 보고 만들었다·
능력점 분배를 하고 운명성을 고르고·
그리고 체질을 골랐다·
아청이 고른 체질은 시혈독인·
아청은 정작 본게임을 해보지 못해 몰랐지만 본래 무림생사전의 AI는 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데에다 UI도 은근 불편했다·
쓸데없이 해독제만 열 종류가 넘어가는데 그게 비싸고 퀵슬롯은 네 개뿐이라 중독도 한두번이지 그 짜증이 보통이 아니었다·
시혈독인은 모든 독 면역을 제공하는 체질·
천무지체나 자연지체 구음지혈 같은 사기 체질을 놔두고 굳이 시혈독인을 추천하는 이유였다·
그래서 아청도 중독에서 자유로웠다·
무림 출도 그 해에 살아남기 위해 풀과 버섯을 뜯어 먹고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연명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아청의 생존은 이렇듯 뉴비를 위해 노심초사 공을 들인 무림생사전 커뮤니티의 고인물들이 만들어준 결과였다·
당장 아청이 글을 읽고 쓰고 또 원주민과 말이 통하는 기적이야말로 한글패치의 위대함이었다·
그저 자기네들이 즐기는 게임이 더 흥하기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기기를 바란 그 선의!
그 선의가 지금의 아청을 살아 숨 쉬게 했다!
아청이 새삼 전율하며 생각했다·
시발 이 게임 추천한 새끼 가만 안 둔다· 진짜·
아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 하나 조져버리고 싶은 이때다·
조져버릴 사람과 명분이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점소이!”
“앗 손님! 갑니다!”
점소이가 행복한 표정으로 달려나왔다·
돈 많은 손님은 점소이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점소이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목 아래 칼끝이 닿으면 누구라도 슬픔에 잠기기 때문이었다·
“감히 내 술에 독을 타? 넌 오늘 뒤졌다· 지옥에 가서 부모님께서 묻거든 술에 장난질 치다가 일찍 올라왔다고 해라·”
아청이 목소리를 깔았다·
“아이고 손님! 아닙니다! 제가 아닙니다요!”
“니가 아니라고? 그럼 누군데?”
“고것이···”
아청이 점소이의 업을 보았다·
숫자는 42· 아쉽게도 선업이었다·
뭔데 점소이주제에 선업이 이래 높지?
동네 거지새끼들이라도 먹여 살렸나?
아청은 선인에게는 관대하다·
“좋아· 아니라는 건 믿어주지· 누가 시켰어?”
“아이고 그것이···”
“술이 심심해서 독으로 변했을까· 아니면 술 만든 사람이 너무 심심한 나머지 아무나 죽으라고 한 병 독을 타서 팔았을까·”
점소이가 눈치를 보았다·
아청이 이번에는 당근을 던졌다·
“보아하니 점소이 인상이 참 좋아· 그러니까 나는 우리 점소이 믿어· 그러니까 누가 시킨 사람이 있는 거겠지?”
물론 인상이 더러운 점소이는 없다·
가끔 있더라도 불합리한 노동에 화가 난 객잔 아들내미 정도였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그저···”
“으아 화가 난다! 나는 화가 나면 손이 떨려! 그러다 죄 없는 점소이 목이 날아가면 어떡해!”
“살려 살려주세요!”
“안 돼 안 살려줘 살릴 생각 없어· 빨리 말해·”
점소이가 울먹거렸다·
아청은 중년 남성의 뜨거운 눈물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죽어랏! 음식에 장난치는 개새끼들아! 나으 월광검이 굶주렸다!”
아청이 진각을 밟아 몸을 날렸다·
객잔의 궁빈석 구석탱이 으슥한 곳에 허접한 만두 몇 개 올려놓은 사내들을 향해서·
대가리 하나가 하늘에 치솟고 피가 분수처럼 쫙쫙 뿜어졌다·
아청이 몸을 적시는 뜨뜻함에 함박웃음을 짓고 술의 원수를 향해 마저 검격을 이었다·
독이나 타는 소인배들답게 실력은 형편없었다·
세 구의 시체와 한 구의 예비 시체가 남았다·
배를 틀어쥔 사내가 피를 뱉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그야· 다들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는데 딱 너네만 눈치를 보고 있었잖아·”
사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다라고? 아니면 어떻게 하려고···”
“뭐 아니어도 어차피 칼 맞고 죽을 팔자던데· 너네 말야 나쁜 짓 많이 하고 다녔잖아? 맞으면 복수 성공· 틀려도 쓰레기 처리·”
악업을 가득 쌓아놓은 놈들이었다·
범인 아니면 뭐 선한 일 했다 치고·
아청은 전혀 손해를 보지 않는 구조였다·
“그래서 내가 먹은 독이 뭐야?”
“크큭 그걸 알려줄 것 같나? 이렇게 된 판에?”
“그럼 말고·”
맛이 괜찮아서 물어봤는데 싫다는데 어째·
안녕 내 마라 소스야·
아청도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어차피 뒤지면 나오겠지 하고·
아청이 검을 들었다·
“저승에 가서 왜 왔냐고 묻거든·”
“니 애미 따먹으러 왔다고 할 거다·”
죽어가는 주제에 독기가 가득 들었다·
아청이 한숨을 쉬며 월광검(6호)을 휘둘렀다·
“커헉? 크륵 크륵···”
동맥을 피해 기도를 예리하게 베어내면 사람은 말을 못 한다·
사내가 목을 부여잡고 그래서 내장이 흘러나와 다시 배를 부여잡았다·
그러다 사람의 손이 두 개인 이유를 깨달았다·
“자 봤죠? 얘가 우리 엄마 욕한 거· 죽게 놔둬요· 건드리면 나랑 아옹다옹 투닥투닥 사이좋게 칼부림 한 번 해보자는 거야·”
아청이 좌중을 슥 둘러보며 밝은 미소를 숨기지도 않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근데 뭐야 업들이 다 왜 이 모양이야?
혹시 나쁜 놈들 정모하는 객잔인가?
불 지르면 선업치 달달하게 쌓이겠는데·
하지만 아청이 나쁜 놈만 보면 악즉참을 외치며 칼부터 나가는 미친년은 아니었다·
그냥 악인을 상대로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뭐 일단 해야 할 일부터 하고·
아청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체를 뒤졌다·
만두 처먹던 놈들이라 그런지 영 개털이었다·
대신 이것저것 잡다한 것은 나왔다·
작은 자기병 몇 개 가루가 든 주머니· 등등·
알뜰하게 챙겨 자리로 돌아온 아청이 눈동자를 떠는 양소월의 시선을 마주했다·
아청이 실수를 깨달았다· 아차차·
“점소이 여기 세숫물 좀 내줘요·”
피를 뒤집어쓸 때는 기분이 좋다·
당연한 상식이지만 어떤 불행한 사람들은 피 자체를 무서워하기도 했다·
그러면 선지국으로 극복하면 되는데·
근데 무림에 선지국이 있나?
선지국 먹고 싶다·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으로 입맛을 한 번 다신 아청이 술병을 기울였다·
오늘도 보람찬 한 건을 자축하며 또 한 잔·
착실하게 숨이 끊어져 가는 악인을 보며 한 잔·
안주가 좋으니 술이 쭉쭉 넘어간다·
—-
양소월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실 제대로 된 무림의 여자 무인은 드물다·
예쁜 무기 들고 꼬까옷 화려한 궁장 차려입고 나들이 나온 여인을 제외하고 나면 그랬다·
사실 무림행이란 여인의 몸으로 차마 두 번은 못 할 생고생이었다·
말이 좋아서 무인이고 실상은 낭인이었다·
집밖을 떠도는 떠돌이가 얼마나 좋은 처지라고·
밖에서 먹고 자고 싸고 그냥 숨을 쉬는 자체가 어떻게 보면 여인으로서는 치욕에 가깝다·
명가의 여무인들이야 하인 끌고 마차 타고 여행처럼 즐길 수 있었다·
무인 행세를 즐기는 귀한 집 따님들도 있다·
돈 없고 배경 없는 여낭인들은 그런 여인들을 보고 무림놀이 하러 나왔다고 표현했다·
양소월은 무산 신녀문 출신이고 그런 무림놀이 하러 나온 여인들을 경멸했다·
그래서 아청에게 호감이 있었다·
자식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니 어미로써도 참 고맙기도 했고·
본래 ‘진짜’ 여자 무인이란 거친 편이었다·
사내들 사이에서 오호호 웃어대다가는 얕잡아 보이기 딱 좋았다·
무림에서 얕잡아 보이면 이미 목숨을 반쯤 내놓고 다니는 것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거친 데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이래서야 아예 광인의 꼴이잖은가·
아청이 그제야 나온 대야에 어푸어푸 세수하는 꼴을 바라보며 양소월이 다짐했다·
이 아이랑은 얽히지 말아야겠구나·
다만 그 다짐은 채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너무 더워서 입맛이 안 도는 하루내요·
차가운 우유에 콘푸라이트 한사발 야무지게 말아 먹어야갰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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