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3
어쨌거나 땅꼬마는 수련이나 하라면서 쫓아 보내고 당난아를 이끌고 장문전으로 향했다·
현 장문인 천둔검 왕주희는 유난히 존재감이 없는 여인이다·
태상장문인 서문수린이 워낙에 밝게 빛나는 통에 그에 가려진 탓도 있다·
하지만 사저들에게 듣기로(청은 장문인 배분 막내 사매다) 그냥 대사저는 원래부터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존재감이 특징이었다고·
오죽하면 별호가 천둔검이니 과거 무림공적 배가색귀를 토벌할 적에 아군조차 눈치채지 못한 사이 뒤를 잡아 심장을 꿰뚫었던 한 수에서 나왔다나 어쨌다나·
“그래· 젊은 나이에 의술을 배웠다니 참으로 대견하고 훌륭하구나· 모처럼 도관에 들렀으니 청정한 기운을 듬뿍 받아 가거라· 달리 정해진 규율은 없으니 마음 편히 푹 쉬도록 하고·”
“네 장문 어르신·”
“음· 그런데 여류 의원이라니 참으로 멋진 울림이 아니더냐? 물론 달리 뜻이 있어 말하는 바는 아니고 우리 막내 사매 부상의 예후를 살피러 왔다고? 마음 씀이 어여쁘기도 하지·”
“앗 아니어요· 말씀 거두셔요·”
“그래· 푹 쉬고· 푹· 아주 푸욱·”
유난히 푹 쉬라는 말을 강조하니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당난아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혹여 허락하신다면 소녀가 아직 미욱한 재주나마 머무르는 동안 진맥을 좀 봐도····”
“어머나· 기특하기도 하지· 그 빼어난 미모가 그 마음씨에서 나온 것이로구나·”
그렇게 장문인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그 후에는 객청에 방을 잡고 침구류를 챙겨주려는데 당난아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여기는 뭐야? 비어있네?”
“니 방인데?”
“···?”
“···?”
당난아가 알았다는 듯이 손뼉을 짝 쳤다·
“에이 내가 강호 경험 없다구 놀리지 말구· 너 배 탈 때도 신발 벗고 타야 한다고 하더니· 또 속을 줄 알아? 침상도 없는데 어떻게 이게 손님 방이야·”
“그럼 내가 들고 있는 건 뭐게?”
“이불이랑 두꺼운 이불?”
“이건 요라고 하는 것이다· 바닥에 깔고 자는 용도로 쓰지·”
“헉! 그게 그 소문으로만 듣던···!”
사천 제일 부잣집 딸내미는 아무래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충격에 빠진 모양이었다·
하긴 방의 크기가 당난아의 초호화 침상보다 조금 작거나 비슷한 정도였으니 무어·
“이러면 엄청 딱딱한 거 아냐?”
“딱딱하다니· 한 번 누워봐 그럼·”
청이 두꺼운 요를 괴력으로 한방에 파라락 펼쳐 척 깔았다·
당난아가 두근두근 설레는 기색으로 그 위에 척 누웠다·
그리곤 금방 표정이 굳었다·
“딱딱하잖아!”
“아니라고는 안 했는데? 당연히 딱딱하지·”
“아니 이런 데서 어떻게 자?”
당난아가 울상을 지었다·
청이 콧방귀를 뀌었다·
지난겨울 청은 아예 담요 한 장도 없이 오들오들 떨며 한기로 눕지도 못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잠에 들었더란다·
그나마도 벽이 차서 기대지도 못했다·
“특별히 두 장 더 갖다준다· 세 겹이면 그냥저냥 괜찮지 않을까?”
“힝· 불편한데·”
“밖에서 노숙하면 그냥 자갈만 골라내고 누워 자야 하거든? 배부른 소리 하고 있어·”
당난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청을 보았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편안한 침상에 퍼질러져 누워있던 년이 하는 소리라서 전혀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너는 너는 큰어르신이잖아· 너만 좋은 방 쓰고 그러는 거 아냐?”
“왜 내 집 보고 싶어?”
그리하여 청이 꿈에도 그리던 집 나의 달콤한 집을 공개했다·
오랜만에 내 집을 보는 청의 심정이 참으로 음 되게 초라하네·
···이렇게 작았나?
누가 야금야금 빼먹고 줄여놓은 거 아냐?
—-
서문수린은 고민이 많았다·
말년에 들인 제자년 때문이었다·
도대체 저 버르장머리를 어찌 교정해야 한단 말인가·
심지어 지난 겨울에는 우는 아이 종아리를 더 때리는 심정으로 거의 벗겨놓기까지 했더란다·
그렇게 거진 헐벗은 꼴로 수치스러움을 느껴 품행을 반성하기를 원했더니 외려 그냥 수치라는 감정 자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매를 들어도 딱 그때뿐이고 아픔이 가시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고는 다 큰 년이 심지어 도가의 큰 어르신을 해가지고는 체통 없이 애교나 부리고 앉았으니·
물론 쓸쓸해 보이는 스승 위하는 그 마음을 모르겠는가·
그저 고운 심성 덕분이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천살의 재액을 스스로 정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을 했을 터이니·
그래도 저 꿋꿋한 멍청함 덕분에 오히려 천살의 그 흉악한 운명 앞에서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기는 했다·
사실 서문수린이 스승이라면서 딱히 무공을 전수한 바는 없기는 했다·
주양세심경은 가르쳤더니 대번에 대성을 하고 나타나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외에 검술 같은 무공들이야 이미 가진 것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문수린이 올겨울에 준비한 수련법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쿵· 쿵· 쿵· 쿵·
높이 높이 엮어놓은 서책들이 연신 청의 앞에 육중한 소리를 내며 자리를 잡았다·
“어 사부님?”
“내 제자의 깨달음이 어째서 오지 않는 것인가 고민해보았으니 학식이 미천하다 못해 아예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인가 싶더구나·”
대놓고 이 무식한 년아 하는 소리였다·
“도가와 불가의 무공을 수련하는 년이 당장 도가의 신선이며 불가의 부처를 하나도 모르니 깨달음이 와도 붙들 수 있을 리가 없지·”
“어· 이 나이 먹고 공부는 좀···”
“공부는 평생 이어가는 것이다 제자야· 이 서책을 모두 두 권씩 필사하기 전에는 강호행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앗·”
청이 울상을 지었다·
물론 중원의 서책이 청의 고향과 같이 얄상한 종이에 빽빽하게 글씨가 들어찬 물건이 아니기는 하다·
종이는 두껍고 글자는 대문짝만하니 부지런히 베끼면야 아마 봄 중에는 결실을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야 청의 수면 시간에 달린 것이었으니·
청이 서책들을 내려다보았다·
제목만 봐도 도경과 불경들인 건 알겠다·
그말은즉슨 서책 중에서도 제일 재미가 없는 종교 서적이라는 뜻이었다·
심지어 이 시대의 경서란 같은 문장이라도 그 저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주석 형태의 철학서에 가까웠다·
즉 재미가 없다·
당장 내일모래 수능을 치더라도 이 책들만은 재미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청이 그에 비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사부님· 차라리 벗겠습니다악!”
따악!!
청이 바닥을 굴렀다·
“쯧쯧· 아무리 그래도 방년한 처자가 입에 담을 말이 따로 있지·”
“사부님 점점 강해지는 것 같은데요···· 이러다 제자 진짜 머리가 깨져버리고 말아요?”
“엄살은·”
“아니 진짜 아프단 말이에요···”
청이 눈물방울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말했다·
그야 아프라고 때렸으니 당연히 아픈 것이다·
“제자가 수치를 모르니 되지도 않는 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하거라· 무식하긴 해도 머리는 있는 년이니 쓰다 보면 자연히 외우겠지·”
“네···”
청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처연히 대답했다·
다만 예로부터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현명함으로 이름 높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입은 만악의 화근이니 항상 말조심하라 고·
사실 지난겨울의 무식한 호신기 수련은 사실 강호 모든 스승들이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할 무도한 패악질에 가까웠다·
다 큰 여제자를 헐벗은 차림으로 문도들 앞에 세웠으니 그 수치를 도대체 어찌 감당할까·
서문수린도 가슴앓이하며 내내 미안해했건만 그 결과가 결국 이 모양이었다·
서문수린도 사람이다·
그 속앓이만큼 괘씸함이 들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제자가 감히 탈의를 입에 담을 만큼 큰 의기를 품었으니 스승된 이가 어찌 말릴 수 있겠느냐· 겨우내 그 고난을 겪어내고도 그 수련을 잊지 못한 모양이지 내 그 또한 허락하도록 하마·”
청도 괜히 말을 꺼냈다 본전은커녕 밑천까지 싹 털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 깔끔하게 포기한 청이 간절한 어조로 단 한 가지의 희망사항을 입에 담았다·
“그럼 이번엔 이불 한 장만 허락해 주시면 안 될까요· 잠은 누워서 자고 싶어요···”
—-
“얘 청아야· 약 발라야·”
당난아가 어쩌다 한 번씩 너 말고 다른 호칭으로 부를 때는 뭐가 그리 어색하고 쑥스러운지 꼭 말하고서도 눈치를 살피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에도 눈치를 살피려던 당난아가 곧장 경악했다·
“꺄악 너 너 무슨 꼴을 하고!”
당난아가 두 눈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 사이로 눈동자가 다 보이기는 했지만 원래 여인이 부끄러움을 표시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자세라서 딱히 딴지를 걸 일은 아니었다·
청이 해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렇게 됐다·”
“집은 왜 이래? 도둑 들었어?”
“대충· 비슷해·”
“안 추워? 바람이 이리 쌩쌩 부는데···”
“춥지···”
괜찮은 것과 추운 것은 또 다르다·
핵꿀밤 맞는다고 어디 다치거나 찢어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듯이·
그래도 체감상 작년보다 나은 것도 같았다·
아· 붕대라도 감고 있어서 그런가····
추위와 더위를 버틸 수 있게 도와주는 소녀환희경의 공능에 더불어 빙공을 두 개나 익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저 북해의 겨울 정도가 아니고서야 중원의 추위 따위가 침범할 육체가 아닌 것이다·
“왜 왜 그런 남사스러운 꼴을 하고 있어?”
“수련···”
“무슨 수련이 이래? 혹시 너 미움받고 있는 거 아냐? 어떻게 그런 꼴로 남들 앞에···”
“어차피 식구들이니까···”
“식구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당난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근데 야해· 애가 무슨 이렇게 야하게·
천하의 색녀나 할 법한 복장을 하고서는 그 표정과 눈빛에 우울한 체념이 들어차 슬픈 기색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대비가 정말로 뭐랄까 야하다····
당난아가 그렇게 침만 꼴딱꼴딱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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