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8
간만에 본 할아범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무쪼록 몸 조심하고· 약소하게나마 여비를 챙겼으니 절대로 굶는 일을 없도록 해라·”
그러면서 전낭을 내미는데 청이 열어 확인해 보니 온통 싯누런 금빛이었다·
“와· 이게 약소하면 약소하지 않은 건 대체 얼마나 되는 거야? 잘 쓸게요· 고마워요·”
“네게 이 정도면 약소하지· 무조건 제일 좋은 방 잡아다 제일 비싼 요리를 사다먹어라· 사치를 팍팍 부려야 남들이 우습게 보지 않는 법이다· 여행이라고 괜히 부지런 떨 것 없으니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보통 그 반대로 말하지 않나 싶지만·
금자를 한무더기 쥐여주면서 하는 말이라서 설득력이 있었다·
게다가 거기에 설득력 더하기까지!
“혹시 몰라 준비해 놓은 전표들이다· 한 장에 금자가 한 관씩 들었으니 금전 아낄 생각이라곤 하지를 말고·”
“아니 할아범 웬 돈을 이렇게 벌었어요?”
“상회 운영비다·”
당당한 횡령 선언이었다·
“오잉· 그걸 나 줘도 돼요?”
“본래 사업이란 게 제대로 달리기 시작하면 어디선가 눈먼 금전이 솟는 것이란다· 망해도 사업이 망하는 것이지 내가 망하는 것이더냐·”
“오우· 완전 사장님이 다 되셨네·”
사천에 있을 적에는 최리옹 역시 신교의 대응을 모르는 상태였더란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으니 신교의 재산이 곧 청의 재산이었다·
최리옹이 그러고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괜한 시비에 걸리거든 어지간해서는 자리에 남겨두지 말고 깔끔하게 처리해 화근의 싹을 없애거라· 또 괜히 친절하게 구는 사내놈들도 조심하고· 여차하면 색마로 몰아 처리하면 뒤탈이 없을게다·”
“에이 할아범 내가 무슨 애야? 그 정도는 나도 다 알아요·”
“마음 같아서야 같이 갔으면 좋겠다만 선배님 말씀이 맞으니 늙은이가 따라간다 해 봐야 네게 누가 될 것이니·”
“사실 난 별로 신경 안 써요· 할아범 원한만 할아범이 알아서 처리하면 그만이지· 할아범이 같이 가고 싶으면 같이 가면 되구·”
최리옹이 그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영영 참을 것도 아니고 시간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인데 늙은 놈이 몸이 달은 아이처럼 굴 필요가 있나· 늙은이 걱정은 필요 없고 맘 편히 놀다 와라·”
“할아범 걱정을 누가 해· 고수 걱정해봐야 니 앞가림이나 잘하세요 하지·”
그러고 나서야 견포희가 돌아왔다·
개봉 갈 여장은 다 꾸려놨다고 오자마자 불쑥 짐을 매고 나오니 더 지체할 이유도 없고·
“아· 그런데 숨어 살거라고 안 했어요? 설가 상회는 좀 너무 눈에 띄는 거 아닌가? 설씨가 흔해요?”
“생각해보니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굳이 숨어 살 필요가 있나 싶더군·”
참고로 설가놈은 본래 북해빙궁의 지파 문파 소속으로 스승 선배 동기 후배 가리지 않고 피바다로 만든 후에 건물 불태우고 비급도 훔쳐 떠난 사람이다·
다만 설가놈의 입장에서는 손속이 좀 과했다 뿐이지 정당한 복수에 불과했다·
빙궁의 추적자가 무서워 숨었을 뿐이니 이젠 든든한 뒷배도 생겼겠다 누릴 것 다 누리고 살 생각이었다·
청이야 대강 설가놈이 저 괴롭히던 이들이나 몇 명 죽이고 튀었나보다 했지 아예 기둥뿌리까지 태워버렸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잘 생각했어요· 동네 최고의 지성이 구석에 처박히면 무림 전체의 손해나 마찬가지지·”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동네 최고는 좀 미묘하지 않나?”
“뭐야 동네 무시해요? 그리고 지금 자기 입으로 자기 얼굴에 금칠해달라는 거? 설가 상회도 아직 동네 급이니까 그럼 잘 키워 봐요·”
그리고는 청이 손을 흔들며 요란하게 떠났다·
마주 배웅한 최리옹이 설가놈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자· 가세나· 자네도 더 큰 책사로 인정받으려면은 상회를 키우라지 않는가· 이왕 이리 된 김에 중원 최고의 지성이 되어봐야지·”
“예 어르신·”
그러다 설가놈이 문득 떠올리기를·
그런데 도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또 어째서 내가 두뇌로 평가를 받게 되었던가 하고·
설가놈은 스스로 똑똑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
일단 배를 타고 무한으로 가는 순서였다·
항구로 향하는 길에 견포희가 맹하게 말했다·
“나 생각해보니 배를 타본 적이 없네· 헤헤· 기대된다· 큰 배 탈 거야? 전에 이렇게 큰 배를 본 적도 있는데·”
견포희가 팔을 위아래로 높게 벌리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당난아가 눈을 빛냈다·
“뭐야 너 배도 안 타봤어? 그럼 배 탈 때 신발 벗고 타는 것도 모르겠네?”
“에이 신발을 왜 벗어? 그럼 발이 다 젖어버리고 말잖아? 내가 무식한 년이기는 해도 그런 멍청한 소리에는 안 속아· 얘는 그런 농담은 일곱 살 어린애도 안 속겠다·”
“어? 그 그 정도인가?”
“그럼· 그냥 주변에 신발 벗는 사람 있나만 봐도 알 거 아니야· 의매 친구는 그런 사람 본 적 있니?”
“어···· 그렇지····”
당난아가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우리 의매 친구는 뭘 그렇게 흘끔흘끔 훔쳐보고 뭐 재미있는 와 쟤는 가슴팍에 뭘 저렇게 넣어놓았대·”
“아 아니거든!? 가슴 훔쳐본 게 아니라· 어? 근데 뭘 넣어놓았다구?”
“모양이 딱 그렇잖아?”
“잘 모르겠는데····”
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두 멍청이가 있으면 개중에서도 우열이 있어 더욱 멍청이가 있는 법인데·
벌써부터 의매 호소인이 이 승을 거두고 말았으니 음 한의사가 저래도 되나?
중원 의학계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그렇게 티격태격 항구에 도착해서는 두 촌년 모두 입을 헤 벌리고 구경하느라 난리가 났다·
그러다가 당난아가 모처럼 부잣집 따님다운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야 우리 저거 타자· 저게 제일 크고 화려해 보이잖아· 배삯은 내가 낼 테니까·”
“오잉? 배를 왜 돈을 주고 타?”
“너 또 나 놀리는 거지? 돈을 안 내면 그냥 태워주기라도 해?”
“사람마다 다른 법이지·”
청이 씩 웃으며 양발 곧게 땅에 붙이고 손을 번쩍 들었다·
“여러분! 여기 용왕패가 있습니다! 무한까지 합법적으로 탈세하실 선주분 딱 한 분만 모십니다!”
합법 탈세!
중원 모든 상인들의 꿈과도 같은 소리였다·
중화 민족은 세금을 혐오하면서도 또 의외로 불법적인 탈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기풍은 청의 고향 현대에까지 이어져 중화 민족은 절대 불법적인 탈세를 하지 않았다·
일단 걸리면 진짜로 사형(숙청)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합법적인 절세가 가능했다·
어차피 나라에 세금을 내 봐야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겠으니 대신 당의 높은 분들에게 바쳐 막대한 면세 혜택에 더불어 꽌시로 인한 적립까지 쏟아지는 것이다·
세금을 많이 낼수록 천하의 병신 머저리 저능아 취급이라서 부자가 법으로 정해진 세금을 제대로 내기만 해도 거의 신화 속 거룩한 미담처럼 온 국민에게 알려 칭찬을 아끼지 않는 한민족과는 다른 문화라 하겠다·
어쨌거나 귀한 손님 서로 모시겠다고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칠 층 짜리 용궁 같은 배를 가진 선주가 공손히 허리를 접어 귀빈을 접대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청은 정말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가장 좋은 객실의 예약을 파해 위약금을 열 배나 물어 돌려주고 귀한 술에 값비싼 요리를 팍팍 아낌없이 넣어주니 여기가 배 속에 들었는지 극락에 들었는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다·
실상 청을 접대하는 데에 쓴 금전이 낼 세금보다도 서너배는 넘고 말았다·
그러나 칠 층 거선을 소유한 부유한 선주가 그깟 세금을 피하자고 난리를 쳤겠는가·
하는 일도 없이 작살 들고 물길 막아 돈이나 떼어먹는 얄미운 수로채 놈들에게 한 방 먹이고 싶어서였다·
“멈춰라!”
“너네나 멈춰라! 용왕패의 손님께서 머물고 계시는데 감히 행패를 부릴 셈이냐!”
“살펴 가십쇼!”
수로채의 인원들이 바로 깨갱 꼬리를 말고 물러났다·
선주의 삼십 년 경력 중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선주 좋고 청도 좋고 파약당한 손님도 예약금 열 배로 받아 돈을 벌었으니 모두가 행복한 결론이었다·
수로채야 원래 이러라고 내어준 용왕패라서 이러한 상황이 다 은인 대접의 일환이다·
그리하여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다보니 어느 새 배가 흘러흘러 무한에 도착했다·
무한은 도시 이름이 아니라 무한삼진 무한의 세 개 나루터라는 뜻의 세 개 도시를 합하여 부르는 말이다·
유명한 것으로는 손권(그 손권)이 직접 지었다고 하는 황학루라 하는 요리점이 있었다·
본래는 망루로 쓰이던 것이 몇 번 불타 다시 지어지며 조금씩 높아지다가 당대에 와선 천하제일누각을 논할 때에 꼭 이름이 빠지지 않는 마천루가 되었다고·
꼭대기에는 거대한 편액을 달아 초천극목이라 새겨 놓았는데 이 역시 불타 사라진 원본을 다시 만들 때마다 조금씩 커진 것이다·
원본은 손권이 직접 쓴 글귀였다·
초나라의 하늘을 끝내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초패왕 항우장사에 비유한 호연지기로 높이 평가받는 문장이다·
민물고기 날로 처먹다가 간 때문이야 외치며 단명하는 것이 특기인 원시 부족의 부족장이 입에 담기는 좀 거창한 것 같기는 해도·
그 외에 특산품이라고 할 것은 딱히 없으나 먼 미래에는 전 세계를 강타할 위험한 질병의 고향으로 유명해질 운명이기도 했다·
무한이란 어떤 미개한 언어상으로는 우한이라 읽기도 한다·
천살고성이 이를 알았다면 영 모자란 계집애 고작 인간 하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 도시를 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전낭도 두둑하고 여차하면 돈지랄 가능한 당난아도 옆에 끼었으니 청은 더이상 두려운 것이 없다·
저 멀리 배 타고 오면서부터 줄곧 눈에 띄던 우뚝 솟은 금색 지붕이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요리점 중 하나라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방향 잡아 찾아가니 예약제로 운영되면 어쩔 수 없고 아니면 웃돈 내서라도 한 끼 먹겠다는 각오였다·
그러나 황학루는 천하에 유명한 명소였다·
“예약을 하시려거든 사 개월 이후에나···”
“사 개월이요?”
“아니면 십 개월쯤입죠· 봄과 가을에는 이미 하루도 빠짐없이 예약이 되어있습니다요·”
“아···”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청은 의외로 상식에는 상식으로 대우하는 상식인이었다·
청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아쉬운 마음에 쩝 입맛을 다시며 황학루의 높은 정경을 다시 눈에 담았다·
그러다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저 가장 높은 육 층 난간에 기대어 바깥을 바라보는 사내가 한 명·
청이 뒤집어 쓴 면사 안쪽으로 싱글벙글 미소가 번졌다·
오· 아는 사람 있으면 합석은 괜찮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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