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9
사실 청이 사람 얼굴을 막 외우고 다니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 봄의 시작이라 겨울 날씨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지금이었다·
훌러덩 웃통을 깐 채로 근육을 조이는 자세를 하고 바깥을 향해 거대한 맨몸을 자랑하듯이 드러낸 사내였다·
청의 뇌리에서도 곧장 아 그 녀석 하고 곧장 떠오르는 이가 있었던 것이다·
“저기 점소이· 혹시 저 위에 제갈···”
아· 근데 걔 이름이 뭐였드라·
제갈씨 밖에 기억이 안 나네·
“그 뭐였지 별호가 맹수남자?”
그에 점소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맹신현뇌 대협을 말씀하십니까요?”
“아! 맞다· 그거네· 맹신현뇌! 맹수의 몸과 현자의 두뇌! 와 딱 한 번 들은 것 같은데 내가 또 이걸 맞춰버렸네· 이거 맞죠?”
“알려드리긴 제가 다 알려드렸는데요·”
점소이가 양심 어디 있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면사 너머 안 보이는 눈깔쯤을 바라보았다·
“그럼 위에 가서 혹시 누님 왔는데 기억하느냐고 기억하면 그냥 자리 하나만 놔 줄 수 있냐고 물어봐 줄 수 있어요? 밥은 알아서 사 먹을 테니까·”
“그것이· 귀한 분이신데 제가 어찌·”
점소이가 난처해했다·
무한에서 제일 유명한 무림방파는 누가 뭐라 해도 무당파다·
무한의 자랑 무한의 자존심 정파의 수장이자 태산북두(원래 정파 수장 자리는 지역민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무당파!
그러나 누가 무한을 지배하느냐고 물어보면 다들 제갈세가라고 한다·
무당파랑 영역이 겹치는 바람에 아예 무한 앞 동호 옆 풍광 좋은 자리로 이사하여 새 본거지를 차린 것이 벌써 팔백 년 전의 일이다·
당시는 관의 명령이 절대적이었기에 느그네 둘이 붙어있으니 땅 주기가 애매하다 한 놈이 좀 양보해 봐라 하는 황상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갈세가가 아주 싱글벙글 활짝 만개한 표정으로 먼저 양보하겠다고 나섰다·
사실 같은 땅을 받더라도 동호 앞이 워낙에 좋은 자리여야지·
장강 끼고 호수 낀 것도 그렇지만 무한 일대의 후광 평야는 호북에서 가장 귀한 비옥한 옥토였다·
아무리 좋은 땅이 탐난다고 해서 무당파가 무당산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제갈세가가 그 비싼 대도시와 광역권의 땅을 전부 홀라당 집어삼켰다·
그때만 해도 무학 수준이 높지 않아 천하제일 고수가 초절정이고 하던 시절이라 제갈씨들이 여럿 관직에 자리를 잡고 본가에 유리하도록 마구 퍼다 준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 진짜 알기는 하는 사인데·”
점소이가 시종일관 공손했으므로 청도 그의 난처함을 읽고 강권하지는 못했다·
따지자면 저 아래 겨우 노란 딱지나 뗀 신병을 불러다가 너네 대대장 그 누구더라 이름은 모르겠는데 여튼 나 왔다고 말 좀 전해라 하는 수상쩍은 소리를 들은 셈이었으니까·
그때 당난아가 악녀의 주특기 삿대질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야 점소이· 겨우 점소이 주제에 우리 청아가 말하는데 미적거리기나 하고· 가서 제갈 동생에게 대 사천당가의 해어독화가 들렀다고 전해·”
“앗· 예 알겠습니다!”
거만하고 고압적인 어조 사천당가의 그리고 제갈 동생·
이것이야말로 점소이에게 ‘아아 아가씨께서 높으신 분이 확실하시구나’ 하는 신뢰를 주는 태도였다·
“뭐야 제갈이랑 아는 사이였어?”
“얼굴만· 두 번 봤나? 그러는 너야말로·”
“나도 그냥 한 번 봤어· 애가 말이 좀 많아서 그렇지 착하긴 하던데·”
“그런가? 애가 붙임성이 좋기는 했어· 재수 없게 굴지도 않고·”
확실히 남다른 인성의 소유자인 것이 미리 약속도 없고 별달리 친하다고 할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기별을 전하자마자 본인이 직접 후다닥 뛰어 내려왔으니 그 심성을 짐작할 만 했다·
다만 웃도리는 걸치고 오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은 들었다·
“아니 당 누님! 무한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무림대회에 가시는 길이시겠군요! 그런데 어찌 제가 여기 있는 줄 아시고! 아! 부끄럽게도 이 동생이 일대를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발산하는 장면을 보신 것이로군요! 그런데 옆에 계신 일행분께서도 눈에 익은 것이· 아! 누님 누님 맞으시죠! 낙양에서 뵈었던!”
지가 묻고 지가 대답을 하더니 얼굴 가린 청의 정체까지 딱 맞춰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신기제갈 제갈가의 두뇌가 가진 무서움이라 할 것이다·
물론 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큰 키와 가슴 보고 금방 알아맞힐 수 있기는 했다·
중원에 드문 큰 키에 또 드문 가슴을 동시에 갖춘 여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히려 얼굴을 가렸기에 더욱 알아보기 쉬운 상태인 것이다·
“어 제갈이 안녕? 기억하고 있었네?”
“그야 어찌 잊겠습니까· 논쟁에 능한 여인은 드문 세상입니다· 자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드시지요·”
“어 그래두 되나? 다른 손님들 예약을 밀어버린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
청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며 하는 소리였다·
그에 제갈이현이 호쾌하게 웃었다·
“누님께선 참으로 상냥하십니다! 하지만 요리점은 오 층까지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육 층은 세가가 망루로 쓰는 곳이라 우제가 종종 들러 단련에 이용할 뿐이지요· 물론 귀한 손님분들을 모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지금처럼 말입니다·”
“오·”
몇 번이나 불탄 황학루를 계속해서 재건한 것이 제갈세가라고·
왜 건물이 주기적으로 불타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황학루는 본래 감시 용도로 지어진 망루이자 중요한 군사 시설이다·
군사 시설은 원래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으레 불타는 것이니 농담 삼아 혈교나 마교가 모습을 드러내면 제일 먼저 황학루가 불타오르며 봉화를 피운다고 할 정도였다·
매번 다시 짓는 김에 발전된 건축 기술만큼 층수도 높여 보고 겸사겸사 노는 공간 사업장으로 가게를 열었다·
가장 높은 층만 망루 겸 세가의 휴식 장소 겸 연회장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펜트 하우스인 셈이다·
“앗 이젠 서문 누님이신 겁니까! 대모 서문수린 도고를 사사하시다니! 오 그럼 누님께서 구파의 장문인급 배분이 아니십니까! 이럴 게 아니라 우제가 큰절을 올려야겠습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딱딱하게·”
“하하 그럼 우제가 오늘 장문인급 의전으로 모셔야겠군요! 본래 미식을 즐기시지 않으셨습니까? 호북이라 하면 강과 호수요 무한이 그 중심이니 오늘 아주 어류의 씨를 말려보아야겠습니다·”
“우리 제갈이는 어쩜 이리 이쁜 소리만 골라서 하지·”
그러자 당난아가 옆에서 팔짱을 끼며 말하는 것이다·
“나 나도 요리는 잔뜩 사줄 수 있거든? 천하제일숙수 불러다가 아주 그냥·”
“아니 멀쩡히 장사하시는 분을 왜·”
“의매 나 돈 열심히 벌게·”
반대편에서 견포희가 매달리며 한 소리였다·
“참으로 우애가 깊으십니다! 자 여기가 바로 황학루의 정상 초천극입니다· 이는 과거 손중모가 가슴에 그리던 그 초의 하늘 끝에서 따온 이름이지요· 초라고 하면 여러 초가 있겠으나 시대상 그리고 인물의 특징상 항적의 초나라라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인데····”
“오우· 멋진데·”
청의 기억속에서 대충 말이 엄청 많은 커다란 근육쟁이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주 정확했다·
청이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소리 한 귀로 듣지조차 않고 흘려버리며 높은 곳의 풍경을 만끽했다·
가는 데마다 명소에 들르기는 했지만 개중에 이렇게 탁 트여 개운한 장소가 없었던 탓이다·
강과 호수로 본래 지대가 낮고 주변은 온통 평야로 평평한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솟은 산 위에 높게 지어진 마천루였다·
그 정상에서 보는 광경이 각별할 수밖에는·
“에잇 방해되네·”
청이 면사를 훌렁 벗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견포희에게 넘겼다·
견포희가 아주 자연스럽게 면사를 챙겼다·
그에 제갈이현이 호들갑을 떨었다·
“앗 누님! 세상에 무림오화가 무림육화가 되어야겠군요! 다만 아시듯이 다섯은 완벽하고 길한 숫자이나 여섯은 좋지 못한 숫자라서 흠 흥미롭군요· 기존 오대미인 중 한 분은 아쉽게도 별호를 반납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호들갑 치고는 참으로 담백한 태도였다·
당난아가 곧장 치와와처럼 아르릉거렸다·
“뭐야 너· 지금 우리 청아한테 작업 거는 거야?”
“우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 누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뭘?”
“이런· 듣지 못하셨습니까? 우제는 사람의 외향이 가진 아름다움보다 그 내면을 중히 여기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흥· 사내놈들 다 그런 소리를 하지· 얼굴보단 마음씨가 고와야 하니 어쩌니·”
“음? 마음씨 말씀이십니까? 사람이 본디 제 마음조차 정확히 알기 힘든데 하물며 타인의 마음씨를 어찌 헤아려 곱다 밉다 판단을 내린단 말씀입니까· 그리고 본래 사람 마음이 아는 이에게 관대해지는 것이라 개중에 가장 친애하여 서로 연모하는 이에게 구는 마음씨라면 천하의 어떤 연인이라 해도 아름답다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난아가 조금 질린 표정을 했다·
딱 봐도 무슨 말이 이렇게 많담 하고·
“그 뭐야 내면이라며?”
“맞습니다! 사람의 내면! 사람의 아름다움은 단연코 그 내면! 골격과 근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강건한 육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것!”
그와 동시에 제갈이현이 팔을 낫 모양으로 접어 두 팔꿈치를 수평으로 번쩍 치들고 허리는 비틀어 울끈불끈한 등 근육을 드러냈다·
청이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솔직히 멋있는걸·
고향에서 그 배우 출신의 주지사를 지낸 분의 전성기에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제갈이는 팽 소저 같은 여인이 취향인가·”
“앗! 부끄럽지만 우제가 한때 그분을 열렬히 사모하였지 뭡니까· 다만 연치의 차이도 차이이며 팽 누님께서는 이미 도와 혼인하셨다며 사내를 받을 마음의 공간이 없다고 하셨으니 그저 철없던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지요·”
제갈이현이 지나간 사랑을 담담히 추억했다·
얘는 확실히 애가 멋이 있어·
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갈가의 이 육체 사랑은 유명하다·
당장 세 번째 가모이시자 제갈이현의 어머니 되시는 황보란 여협의 숨은 별호가 대웅대녀 큰 곰과 같은 큰 여인이었으니 오죽할까·
여아의 기골이 장대하면 일단 외공을 익히게 한 후에 제갈세가 정문 앞을 서성거리게 하라는 농담마저 있는 판이었다·
다만 피의 저주인지 어쩐지 제갈가의 직계 사내 중 빼어난 육체와 빼어난 지성을 동시에 타고 나는 이가 없었다·
천 년이 넘는 가문의 역사 속에서도 제갈이현 딱 한 명뿐·
위로 쟁쟁한 형님들 다 제치고 그 형들마저 세가의 미래가 네게 달렸다며 소가주의 자리를 흔쾌히 양보할 정도였으니·
물론 청은 모르고 살면서 성도 땅을 떠나본 적이 없는 당난아 역시 모르던 사실이었다·
“아 맞다· 그 쪼그만 분은?”
“운척 형님 말씀이십니까? 형님이시야 당연히 제남 본가에 아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올 가을 길일을 잡아 성혼하신답니다· 이번 무림대회에 예비 형수님과 함께 참여하실 겁니다·”
“오· 사탕 뿌린다고?”
“하하 누님께서는 도가의 큰 어르신이시니 참여해 자리를 빛내 주시면 형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마침 잘됐네·”
무림대회 마치면 장명이 데리고 다녀오면 되겠는걸·
근데 식장은 어디야? 멀진 않겠지?
참고로 청은 모르지만(도대체 아는 게 없다) 황보세가의 위치는 제남 산동성의 성도다·
장강 타고 가는 편도로는 가깝고 돌아오는 길은 멀어 신녀문 문주 왕주희가 진장명의 외출을 허락해 줄 확률은 딱 반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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