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3
이왕 하루 신세를 진다면야 그래도 아는 얼굴이 낫다·
그리고 지난 방문 때에 대정문주의 과자 선택이 심상치 않았더란다·
그래서 청의 간택이 막 이루어지려던 때였다·
“제가 강호 초행길이라 이왕이면 많은 경험을 해 보고 싶네요· 객점에서 묵어가는 것도 개중 하나구요·”
당난아가 에둘러 거절의 말을 전했다·
청이 듣기에는 그랬다·
참고로 이때의 ‘제가’는 ‘소녀가’보다 본인을 한 단계 높이는 데다 딱딱한 어휘의 선택이다·
에두른 거절이지만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뜻의 강경한 태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아· 그럼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식사라도 대접을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여비가 넉넉해 신세를 질 만큼은 아니네요·”
“그렇습니까···”
왕손석 외 다른 무관의 마중인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역시 무림오화다운 도도한 태도라 생각하며·
청이 생각하기에는 뭐 그럴 거 있나 싶지만 혼자 하는 여행 아니니 일행에게도 맞춰 줘야 하는 법이었다·
그렇게 끝까지 당난아를 바라보다가 이후엔 뚫어져라 쳐다보면 마차가 투명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내들 떠나 객잔을 잡았다·
“근데 왜? 하루 자고 가면 좋지 않아?”
“얘는· 세상에 공짜가 어딨니? 안 그래도 다들 무림대회에 갈 예정일 텐데 은근슬쩍 동행하고 싶다고 하면 짜증나잖아·”
“그런가?”
“당 누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누님들께서 세 분이나 되시는데 어찌 사내가 감히 동행을 청하겠습니까?”
여인들끼리 움직이는 여행에 동행을 청하는 것은 사실 비공식적인 결례가 된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가?
시대를 초월해서 저 여인에 미친 새끼라면서 욕 먹기 딱 좋은 수작질이었다·
“오잉?”
그에 청이 제갈이현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같이 가자고 했는데? 하는 눈빛으로·
“아차· 누님께서 중원의 일에 무심하셨지요· 저는 제갈이지 않습니까?”
무식하다고 하지 않는 단어 선정이 제갈이현의 인품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었다·
동시에 여러 뜻을 가진 대답이었다·
좋은 뜻으로야 제갈가의 미적 기준이야 잘 알려졌으니 동행하자 해도 수작질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고·
또 다른 의미로는 제갈세가쯤 되면 굳이 그런 방식으로 추파를 던질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게다가 도가의 어르신 끼고 어르신의 의자매 분에다가· 당가의 금지옥엽 당난아 낀 자리에 제갈세가가 함께하는 그림이 자연스럽기까지 했으니 바로 중원 최상위 계층들이 서로 교류하는 방식이었다·
“그럼 자고 가도 같이 가자고 말 꺼내기는 힘든 거 아냐? 굳이 경계할 필요가 있어?”
“이런 누님· 누님께선 그 미모의 위험함을 아셔야 합니다· 동행을 청하더라도 저희가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으니 수치를 감수하겠다 하면 그깟 말을 꺼내지 못하겠습니까?”
그러자 당난아가 한 마디 덧붙였다·
“맞아· 청아는 너 예쁜 것 좀 알아야 해·”
“흠· 그정도는 아닌데·”
어쨌거나 이른 저녁 시간쯤이었다·
중원인은 아침 점심을 간단히 먹는 대신 저녁을 아주 푸짐하게 먹는다·
다만 인구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농민이란 대충 사람과 가축 중간쯤의 존재라 중원인으로 안 쳤다·
물론 청은 삼시세끼 푸짐하게 먹지만 그래도 개중 저녁을 제일 각 잡고 먹었다·
왜냐하면 대량으로 만들어다 파는 탓에 저녁에만 주문이 가능한 요리가 많기 때문이었다·
자기 전에 침 맞으면 점심쯤 지나서 마비가 풀리기 때문에 저녁은 또 스스로 집어먹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아무래도 둘이 먹여주는 속도가 꼭 다 삼키고 나서 들이미니 좀 답답한 감이 있어서·
그렇게 저녁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남양호를 좀 거닐기도 하면서 놀다가 침 맞고 잤다·
일기가 아니라 어디 적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재미있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나선 목욕을 받고 누워서 침 맞고 또 제일 좋은 방에 누워 의매 호소인에게 기대 잠이 들면 평상시 같은 하루였다·
이전에 견포희가 같은 방 쓰자고 할 때 중원 문화를 몰라 계속 거절했던 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요즘엔 매일 같은 침상을 쓴다·
제갈세가에 있을 때 혹시 잘못알고 있지 않나 하고 제갈이현에게 물어봤더니 돌아온 대답이 확고했기도 했고·
과거 대충 일주일 전·
근육남 중 최고의 지성 제갈이현이 말하길·
“의자매라면 한 침상을 쓰고 한 이불 덮으며 서로 껴안고 자는 것이 미담이 되는 우애가 아닙니까?”
“미담씩이나?”
“그렇습니다· 과거 유현덕과 관운장 장익덕의 세 호걸들 역시 한 침대를 쓰며 서로 껴안으며 온기를 나누었으니 천하가 가장 우애로운 형제들이라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한 침대 쓰면서 널찍하게 떨어져 자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말로 어려울 때 코딱지만 한 싸구려 침상 위에서 이불도 싸구려라 보온이 안 되어 서로의 체온으로 추운 때를 버텨야 진정 우애로운 사이가 되는 것이다·
“어? 그 셋이?”
“그리하여 유현덕이 침상에 조자룡을 들였을 때 조자룡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으니 평생을 충심으로 섬겼으며 제갈량 조상님의 일기에도 유 장군께서 처음으로 동침을 권했을 때의 감동을 기록으로 남기셨습니다·”
유비가 정치적으로 동침을 이용한 사례다·
“어· 음· 그래·”
좀 많이 깨는데·
이게 삼국지의 실체인가?
아무래도 다른 세상이라 그런 거겠지?
원래 고향에서도 이러진 않았겠지?
“그에 반해 조적이라 하는 놈은 제 사촌과도 같은 침상을 쓰지 않았으니 유현덕이 이와 대비를 이루어 천하에 인의로 이름을 날리기 위해 유난히 침상에 수하들을 불러들인 면모가 있기는 합니다·”
“단어 선정이 좀 이상한데·”
물론 순수하게 일절 불미스러운 일 없이 그저 한 침상에서 가까이 붙어서 잤다는 딱 말 그대로만의 의미이기는 해도·
현대인 감성으로는 좀·
으엑 으에엑·
“만약 조적이 한 번이라도 사마의와 잠자리를 같이 썼더라면 천하의 주인 또한 바뀔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조조가 사마의랑 안 자서 망했다고?”
음? 조조가 망했던가?
화타한테 대가리 깨져서 죽은 게 아니었나?
만화로 대충 훑은 삼국지 수준이 딱 이랬다·
청은 대충 유명한 놈들 이름이나 알지 거의 역사를 새로 쓴 수준으로만 알았다·
“아비와 한 침상을 쓴 어른이라면 거의 의부에 준하는 것인데 감히 희롱하며 놀릴 수 있었겠습니까?”
조조도 조금 억울할 수 있는 것이 조조네는 기본적으로 부유해서 굳이 한 침상으로 이겨낼 만큼 어렵고 가난한 때가 없었던 것이다·
유비가 촉에 자리를 잡고 나서도 삼형제 모이면 같이 잔 것과는 대비되는 일이었다·
다만 유비가 유부남이며 자리 잡은 이후로 삼형제 모이기가 어려웠던 데에다 셋 모두 술에 살고 술에 죽는 주당이라서 방에서 퍼먹다 그대로 뻗어 침대로 직행했으니·
청 역시 대학에 다닐 적에 과 단위로 우르르 몰려가 술을 퍼마시고는 여관방에 차곡차곡 빈틈없이 수납되어 단체로 취침한 기억들이 꽤 많았더란다·
다만 한 이불 덮으며 서로 껴안고 자는 우애가 미담이라고만 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누구나 하는 일을 미담이라고 하진 않았으니·
제갈이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강조해서 설명했다·
청을 골탕먹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사소한 오해가 있었을 뿐·
오히려 의자매 기 세워주려는 그 고운 마음씨로 해석한 제갈이현이 감탄하고 말았다·
얘는 내 시비 아니고 의자매니까 네가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그러니 제갈이현이 이제부터 잘 알고 누님으로 모시겠으니 이제 그만하시라고 완곡하게 돌려 표현했던 것이다·
다만 청이 알아듣기에는 너무나 고차원적인 표현이었으니 그냥 말 그대로 이것이 문화의 차이인가 하고 말아버린 것이다·
유현덕의 실체를 안 충격도 있었고·
사실 천하에서 진심으로 친한 이는 의형제 둘 뿐이고 정치적인 혼신의 연기로 성인군자를 흉내낸 음습한 귀 큰 놈의 실체였다·
물론 유전적 질병으로 죄책감을 모른 채 태어난 사회성 발달 장애 조씨보다야 속은 시꺼멓더라도 좋은 사람인 척 노력한 유씨가 훨씬 낫다고 하겠지만·
심지어 조씨의 죄책감 및 공감 능력 결여는 유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 대를 끊어버린 사마의야말로 천하의 참된 협객이라 하겠다·
게다가 중화 민족을 오호십육국으로 잘게 찢어버린 업적까지!
그야말로 천국의 가장 높은 권좌 옆에서 영원토록 복 받으며 행복하게 살게 된 성인이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
신양에서 하룻밤 푹 쉰 청 일행이 다시 북쪽 개봉을 향해 여정을 시작했다·
작은 소도시와 마을들을 지나다 마침내 결국 터질 일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앗·”
나름 요령이 생겼다고 요리조리 각도 바꾸며 시침을 하던 당난아였다·
다만 이는 침술의 금기 중 하나였으니·
“자꾸 침 놓다가 불길한 감탄사 남발할래?”
“내 장침···”
바로 이렇게 침 부러뜨려 먹기 딱 좋은 행위라서 그렇다·
침은 꼭 환부와 수직으로 힘을 주지 않고 살살 톡톡 두드려 꽂아야 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우악스럽게 주먹으로 침을 움켜쥐고 요리조리 흔들며 박아댔으니 얇고 긴 바늘에 불과한 침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있나·
당난아가 울상을 지었다·
오래 써온 정든 도구가 부러지기도 했고 또 당난아가 쓰는 침이 보통 침이 아니기도 했다·
이름난 침 장인이 평생의 자신작이라고 자부하던 걸작 중의 걸작 명품 중의 명품이었으니·
온몸의 힘으로 박아넣는 당난아의 무식한 침술을 여태까지 버텨온 것만으로도 천하의 명품임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그렇게 당난아가 부러진 장침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청이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이런 말 꺼낼 때가 아님을 알면서도 끝내 해야 할 질문이 있었기에·
“그··· 남은 부분은 어디 있어?”
“어? 어··· 어?”
한 글자만으로 사람을 쫄리게 하는 재주였다·
“뺄 수 있는 거지?”
“그 팔을 이렇게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팔이 안 움직이는데?”
“그· 개봉에 아빠도 올 테니까 아빠한테···”
“뭣이야?”
“그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래? 아예 팔에 힘을 안 줄 테니까 앞으로 일주일이면 부상도 다 나을 테니까···”
“····”
그렇게 팔이 아예 마비되어버린 한의학 권위자 당난아의 의학적 소견으로는 아주 사소한 사건 끝에 일행이 큰 도시에 이르렀다·
그 이름하여 주마점 되시겠다·
“주마점은 과거 여남이라고 불리던 땅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여남은 동쪽의 여남현으로 따로 분리되었는데 이는 당 태종 때에···”
안 물어본 해설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물론 일행 중에 제대로 듣는 사람이 없어 공허하게 흩어지기만 하는 소리지만·
그래도 청이 보기에 항상 저리 말문이 터지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는 했다·
무슨 저런 정보만 모아놓은 서책이 있나?
어쩜 저리 줄줄 꿰고 다니지?
물론 개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는 또 귀신같이 골라들었다·
예를 들면 주마점이라는 이름이 중원사대미인이자 천하의 악녀로 이름 높은 양귀비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던지·
양귀비는 과일 중에 여지를 가장 좋아했는데 그게 하필 저기 동남아에서 나는 과일이었다·
그걸 신속하게 옮기다 한번 쉬어가는 도시가 바로 여기 그래서 주마점이 되었다나·
사실 웃으며 넘길만한 일은 아니다·
당나라의 몰락 원인 중 하나가 양귀비를 위한 과일을 신선하게 가져오는 여지 수송 작전에 어마어마한 비용을 썼기 때문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
참고로 여지는 중화 말로는 라이찌 그리고 청의 고향 역사에선 라이찌를 양놈들이 가져가 발음상의 한계로 리치라 이름을 붙였다·
싸구려 무제한 음식 제공의 후식으로 항상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그 리치였다·
다만 원산지는 동남아라서 원래 이름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그 누구도 과거와 미래 통틀어 단 한 명조차 동남아 과일의 원어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재미있는 설명을 들은 청이 생각했다·
아· 리치· 리치도 맛있는데· 리치 먹고 싶다·
그러나 청은 양귀비가 아니었으므로 먹고 싶다고 해서 누가 구해다주진 않았다·
대신 다른 일로 귀찮게 구는 계집이 한 명·
“청아야 우리 침 보러 가자·”
“아직 짐도 안 풀었는데···”
“해 떨어지기 전에 가야 한단 말야· 침장들은 어두우면 철방 접고 집에 가버리니까····”
아직 객점도 안 잡아 짐도 못 풀었는데 대뜸 당난아가 새 장침을 보러 가자고 보채는 것이었다·
재수가 좋으면 침 장인이 쓰는 무쇠 집게로 어깨에 박힌 침을 빼낼 수도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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