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4
큰 도시라면 당연히 철방 거리 하나쯤은 끼고 있기 마련이었다·
일단 객잔에 마차를 맡겨 두고 철방으로 가는 길을 물어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러고 나니 뭔가 허전한 것이·
“그러고 보니 아무도 마중하러 안 나왔네?”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으레 받던 환영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모를 때는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만이고 마침 일행에 안 물어봐도 대답을 하는 근육형 괴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마점에는 딱히 정파 무관이라 할 세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누님·”
“오잉? 왜?”
“일단은 관부의 주요 거점으로 쓰인 도시가 아니겠습니까 관의 입김이 강한 도시에서는 본래 정파 무관이 드뭅니다·”
관이 통제하는 도시에는 세가(지방 호족)가 뿌리내릴 수가 없다·
오히려 본래 자리를 잡고 있던 세가들 역시 등쌀에 떠밀려 이사를 가고 만다·
게다가 정파 무관이란 기본적으로 관의 말을 안 듣는 협객들이다·
무천대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관이 무림의 힘을 빌리는 때가 보통 저들이 하기에 추잡하거나 불의하여 떳떳지 못한 일들이니 정파 무관이 그에 응할 리가 없다·
다만 사파 무관들이 관인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대는 자존심도 없는(제갈이현의 설명이다) 놈들이었다·
게다가 본래 하는 짓거리가 추잡하고 불의해 관부의 심부름도 곧잘 떠맡았다·
그러니 관부가 강하게 쥔 도시에서는 정파의 씨가 마르고 사파만 득실거리는 것이다·
“그럼 위험한 거 아냐? 사파 놈들만 잔뜩 우글거리면·”
“확실히 사도련의 입김이 강한 중원 남동부는 그러한 측면이 있습니다만 적어도 하남 땅에 감히 정파의 무인을 건드릴 사파는 없습니다·”
제갈이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도시의 위치가 영 좋지 못했다·
북쪽에 소림과 개방 남쪽의 제갈세가 동쪽에는 남궁세가가 서쪽에는 무당파가 있었다·
관부 믿고 사파가 설치다가는 동서남북 정파의 힘이 모여 멸문을 피하지 못할 터다·
“그러니 기껏 수작이라 해봐야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는 것이 고작 아니겠습니까 누님·”
“흠·”
그렇게 철방 거리에 도착하고 나선 당난아가 앞장 서서 일행을 이끌었다·
청이야 철방 거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침에 대해서는 떠들기 좋아하는 제갈이현도 전문 분야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당난아가 미더운 길잡이는 아니었는데·
“이봐 거기 도제· 이 도시에서 제일가는 침 장인이 누구지?”
초면에 대뜸 반말부터 날리는 것이 해어독화 명성 높은 악녀의 소양이라고 하겠다·
청과 함께 있을 때나 치와와급 멍청이 취급을 받지· 본래가 지체 높으신 안하무인의 귀하신 아가씨였다·
불쌍한 도제는 대뜸 날아온 반말보다 빛나는 미모에 정신이 팔렸다·
“야· 뭐야· 내 말 무시해?”
“아니 아닙니다· 그런데 침 장인이라니요? 세상에 어떤 장인이 침만 만들어서 먹고산단 말입니까요?”
“···?”
침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은 세상에 몇 없다·
의가이자 철방을 겸한 당가에서나 가문 내에 침 장인을 두어 만들게 하지 도제의 말 그대로 침이 얼마나 팔린다고 전문으로 만든단 말인가·
아예 침으로 유명한 장인이야 천하의 의원들이 알아서 찾아와 사 가겠지만·
동네 철방에서 침 장인을 찾으면 그런 장인도 있느냐 하는 소리가 돌아올 수밖에는·
“그럼 이 동네 의원들은 침을 어찌 지어?”
“그냥 얇고 길게 펴면 침인 것이”
당난아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얇고 길게 펴면 침이라니 의원으로서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폭언이기는 했다·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야? 됐고· 그럼 도시에서 제일가는 장인이 누구야?”
“그야 반 어르신이신데 지금 그분은”
도제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당난아가 곧장 윽박질렀다·
“말이 많아· 어디로 가면 돼?”
“쭉 가시다가 두 번째 골목에서···”
도제가 길을 설명했다·
의외로 철방 거리가 크게 발달한 듯 길 안내가 제법 복잡하게 이어졌다·
의외로 당난아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완전히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갈 동생? 기억했지?”
“그야 물론입니다 당 누님·”
“그럼 가자·”
청이 그 광경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사람은 원래 자기가 못하는 일은 남에게 맡겨야 하는 법이긴 하지·
돌팔이 같기는 해도 의원은 의원이라고 아예 머리를 못 쓰진 않는 모양이지·
제갈이현은 근육남 최고 지성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며 단 한 번 들은 복잡한 길 안내를 그대로 외워 일행을 이끄는 신기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 제일이라는 반가철방 앞에 도착하여 청이 물었다·
“음· 제갈아 여기 맞아?”
오래 쓰지 않은 것 같은 건물이었다·
일단 지붕만 쳐 놓은 철방 특유의 공터에 싱그러운 잡초들이 벌써 발목까지 솟았다·
아직 벚꽃도 피지 않은 초봄임을 생각하면 아예 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누님 맞게 찾아오긴 했습니다· 저기 보시면 있지 않습니까· 반가철방·”
제갈이현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현판을 가리켰다·
철방답게 철판에 새겨 만든 현판에는 확실히 유려하게 반가철방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현판만 보아도 대단한 수준의 장인이로군요· 다만 어째···”
침에는 문외한이라도 제갈세가의 제갈철방 역시 정교한 기관 제작으로 천하에 이름 떨친 명문 중 하나다·
장인 수준이야 현판에 새긴 글귀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뭐 들어가 보면 알겠지· 저기요 계세요?”
청이 그리 말하며 폐가 비슷한 철방 안으로 쏙 들이쳤다·
“뭐야 가게 망했나?”
그리고 안쪽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그늘 속에서 조용히 노려보는 노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끄악! 아씨 깜짝이야····”
청이 여인답지 못한 억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두려운 건 귀신 혹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스승님의 핵꿀밤 정도지 그저 노려보기만 하는 늙은이가 아니었으니까·
“저기요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왜 그러고 계세요? 깜짝 놀랐잖아요·”
“이젠 계집까지 동원할 셈이냐! 썩 꺼져라! 내 차라리 죽을지언정 네놈들을 위해 병기를 두드릴 생각은 없다!”
노인이 비장하게 호통을 쳤다·
“오잉? 무기 말고 침 지으러 왔는데요·”
“하! 암기는 병기가 아니더냐?”
“아니 그 침 말고 장침이요· 그 침 놓을 때 의원이 쓰는 거요· 침 몰라요? 침? 할아버지가 벌써 노망이 들리셨나?”
그러자 노인의 표정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침 지으러 왔다고? 칼을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니라?”
“칼은 저도 이미 있거든요? 스승님이 주신 검 놔두고 뭐하러 다른 칼을 써요?”
청이 칼집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제야 노인이 민망한 기색을 띠었다·
“크흠· 그래 침 지으러 왔다고···· 오랜만에 손님이시구먼···· 침은 단가가 좀 되는데·”
“아· 잠시만요· 살 사람이 제가 아니라서·”
그에 당난아가 부러진 침을 척 내밀었다·
대장장이 반씨는 부러진 침을 보자마자 깊은 탄식을 토했다·
“허어 이 귀한 침을 어쩌다 부러뜨렸을꼬· 딱 보아도 한 시대에 있을까 말까 한 신물임에 틀림없는 것을·”
“그 혹시 다시 붙일 수도 있을까?”
그에 노인장이 부러진 단면을 유심히 살폈다·
“쯧쯧· 얼마나 힘을 줬으면 이 훌륭한 침이 다 부러졌을꼬· 개 발의 편자라더니 도구는 아주 천하의 신물이나 주인의 실력이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지·”
“뭐야? 이 늙은이가 지금 뭐라고·”
“그래도 다행히 단면이 깔끔하니 붙이기는 어렵지 않겠구먼·”
당난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노인네가 뭘 알아? 무슨 근육이 내공 두른 침을 막아내는데 차라리 바위에 침을 놓는 게 더 쉽지·”
“아· 아가씨께서 시침하셨나· 늙은이가 주책을 떨고 말았구먼·”
“흥·”
당난아가 콧방귀를 흥 내뿜었다·
“그래서 반대쪽은 어디에 있나?”
“어· 그게·”
당난아가 청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노인네 혹시 침 만들 때 쓰는 그 얄팍한 집게 있지 않아? 몸에 박힌 걸 좀 빼야 하는데···”
부러진 침이 청의 어깨에 박힌 채로 끄트머리만 살짝 내어놓고 있었으니 제대로 힘을 주어 잡을 도구가 없이는 꺼낼 수 없는 상태였다·
손으로 잡기에는 튀어나온 부분이 좁쌀만 하니 너무 짧고 손톱으로는 금속이라 미끄러워 잡히지도 않을뿐더러 뽑아낼 만한 힘을 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집게로는 그 얇은 장침을 꽉 죄지조차 못한다·
다행히 평생 철방을 운영했다는 노인이 오래 모아온 도구 중에 철침을 쥐는 집게가 있었다·
“그럼 뽑는다?”
“만약 뽑았는데 반토막이고 그러면 진짜 가만히 안 둔다· 당모 가문 모 나나라 하는 의원이 환자 잡는 돌팔이라고 잠룡비무회 우승 소감으로 외쳐버릴 거야·”
“윽·”
갑자기 당난아의 움직임이 뻣뻣해졌다·
청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설마 진짜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니지?”
“다 청아 너 때문이거든? 근육이 무슨 만년한철도 아니고 돌덩이처럼 압축이 되어있으니까 침이 버티지 못하고 뒤틀리면···”
“그래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다·”
“뭐· 어쨌든· 앗 저쪽!”
“어? 뭐가? 뭐가 있·”
쑤욱 뭔가 빠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안도의 한숨 소리도 그 뒤를 따랐다·
“휴우 무사히 잘 빠졌네·”
“방심을 유도하다니 비열한 수작을···”
“얘는· 말을 해도 어쩜 그렇게 해·”
당난아가 웃으며 청의 등짝을 찰싹 두드렸다·
그리고 나선 반씨 영감이 다시 불을 때야 한다고 난리였다·
어차피 철방 일 모르는 청이 구경해봐야 딱히 재미있는 광경도 아니다·
“그러고 보니 반씨 할아버지네· 반치의 후손쯤 되시는 건가?”
“앗 누님! 반치를 아시는군요! 그야말로 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대장장이가 아닙니까!”
“어 응····”
청이 으레 주워 삼키던 주접이었다·
남의 입으로 듣고 나니 또 기분이 묘했다·
얘는 찐으로 중원 출신 아닌가?
이게 바로 시대를 초월한 아는 척의 정신?
“사실 철방 일은 고되고 힘들면서도 딱히 큰 수입이 나지도 않으니 대개는 자식들이 물려받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사실 장인으로 실력 깨나 있어서 재산이라도 모으지 않으면 혼인도 쉽지 않은 일이라서···”
그래서 대개는 고아를 주워다 키우며 기술을 물려주는 일이 많다고·
물론 기술 전수 비용으로 월봉을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대개는 그저 숙식만 제공하며 부리는 하인 겸 조수나 다름없었다·
좀 인성에 문제가 있는 장인들은 몸 상할 때까지 노예처럼 부려 먹다 내쫓는 경우도 많다고 하고·
“그래서 대장장이들 성씨란 반씨가 많습니다· 장인 중 최고의 장인을 본받겠다는 뜻이지요·”
“흠·”
“아· 반치하니 또 그 아름다운 사랑과 복신적에 대해서도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복신적이라 하면 이제는 영영 사라져버린 반치의 보물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피리를 말하는데···”
청이 옆으로 손을 착 내밀었다·
그러자 견포희가 어디에선가 피리를 꺼내 그 손에 탁 쥐어주었다·
최리옹이 인수인계를 마쳐놓은 덕분이었다·
“제갈아· 이게 바로 그 영영 사라져버렸다는 복신적이란다·”
“···진짜 만년한철이잖습니까· 진품입니까?”
제갈가의 철방은 유명하다·
그리고 가문이 벌이는 모든 일에 대한 지식을 갖춘 제갈이현이었다·
만년한철 특유의 광택 없는 검푸른 자태 정도야 한 눈에 알아보는 것이다·
“그럼 가품이게?”
“세상에 이런 보물이···”
청은 제갈이현의 손에 복신적을 쥐어주는 것으로 절대 쉬지 않는 공포의 조동아리를 잠시 봉인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아온 귀의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니·
“뭐야 늙은이 누구 마음대로 불을 피워?”
“분명 장사 접으라고 했을 텐데?”
“누가 있는데? 어떤 겁대가리 없는 새끼들이 감히 나면파의 율법을 어기고···”
껄렁껄렁 칼 차고 등장한 한 무리의 깡패들 덕분이었다·
그 악업을 확인한 청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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