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3
한편 흑점주 말고도 분노로 타오르는 사람이 또 있었다·
“이 양민의 피나 빨아먹는 해충들이 얌전히 바위 밑에 숨어 눈에 띄지 않도록 숨어야 할 것들이· 감히 내 제자에게 현상금을 걸어? 내 진작에 박멸하여 씨를 말렸어야 하는데·”
서문수린의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치솟았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치솟는 내기의 분출이었으니 주양세심경 석양의 색이라서 불길처럼 일렁거렸다·
사정을 전해 들은 스승의 분노였다·
심지어 제자가 잘못한 일이 전혀 눈곱만치도 없기에 더욱 그러했다·
무고한 노인 하나를 돕기 위해 사파에 쳐들어가고 아상을 추적해 조진 제자였다·
행동거지에 조심이 없고 무모했다고 혼을 낼 수는 있을지언정 참으로 그 마음이 갸륵하니 여류 무인으로서 의협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협의였다·
백 번을 칭찬해도 모자랄 제자였다·
그런데 뭐? 황금이 일만 관?
물론 제자의 기지로 이름을 숨겼다고는 해도 결국 머지않아 드러난 일이었다·
서문수린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조현량이 얼굴이나 봐야겠구나·”
조현량은 십대세가 아니 진주언가가 망하고 유일한 후계가 변절하는 바람에 구대세가 중 흑룡조가의 태상가주다·
현 무림맹주의 이름으로 더 유명했다·
본래는 참가하지 않으려 했던 무림대회였다·
자리에 빛나야 할 이는 제자였지 서문수린 본인이 아니었기에 일부러 피해주려 했건만·
서문수린 출격·
—-
이번 무림 대회에는 중요한 의제가 있었다·
십대세가에서 진주언가가 빠져 공석이 나고 만 것이다·
진주언가가 망했고 정확히 말하자면 내부의 전향자로부터 불타올랐다고 할 것이다·
모용세가 가주 모용성익이 중얼거렸다·
“아녕이 그 아이가 그럴 아이는 아니었는데·”
언연영은 본래 언가와 모용가 사이의 태중약혼이 이루어져 꼬맹이일 적에는 여름마다 피서로 시원한 요녕 땅에 놀라왔더란다·
모용성익이 보았던 꼬마 언연영은 병약하고 마음도 약한 울보 꼬맹이였는데 진주언가에서 돌연 일방적으로 약혼을 깨어버린 이후는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무림맹 순찰자로 잘 지낸다는 소문이나 간혹 들을 뿐이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 그리 되었는지·
다만 혼담이 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꽤 아찔한 일이었다·
망한 가문이 진주언가가 아닐 뻔하였으니·
또 모르지 파혼 후에 무슨 일을 겪어 아이가 한을 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온갖 들짐승 날짐승만 보면 하다못해 담비나 다람쥐같이 보통의 여아가 귀여워할 짐승마저 두려워서 벌벌 떨던 심약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어찌해야 한을 품고 가문을 멸문시킬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튼 그 소식을 들은 이후로 자식의 혼사에 대해 좀 예민해질 수밖에는·
그러니 백 호위가 전해온 소식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주님 요즘 공자님께서 거지와 어울리십니다· 심지어 소문도 해괴하니 끔찍한 탕녀이니 이를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낮뿐입니까? 밤에 녹 호위가 아예 막질 않으니 밤마다 얼굴 보고 정분이 날 기세입니다· 당장 그년 아니 그 여인을 잡아다 매를 쳐 수작질에 준엄하게 혼을 내고 내쫓아야 합니다!’
그러나 또 녹 호위가 수기로 작성한 이야기는 또 그와 상반된 것이었다·
「행동거지가 거지와 같은 모양을 하기는 하나· 말이 사리와 이치에 맞고 현명한 여인으로 보였습니다·
또한 도련님을 상대함에 누이와 같은 태도로 그저 친근할 뿐이고 또한 도련님 역시 누이로 따를 뿐이니 남녀의 일을 논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모함입니다·
또한 무공이 고강하여 최소 절정 후기 이상의 역량을 가졌으니 밤마다 도련님을 가르치기에 도련님께서 최근 큰 성취를 보였습니다·」
사실 매사 삐딱하니 트집을 못 잡아서 안달이 난 백 호위였다·
그보다는 과묵하니(벙어리라서) 진중한 데에다 고된 밤 호위를 자처하며 지켜준 녹 호위의 말이 훨씬 믿음이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증언 모두 결국 거지였다·
세가의 위신이 있지 어찌 직계의 적통이 거지 개방도도 아닌 여자 거지와 어울리겠나·
게다가 녹 호위는 독신이고 백 호위는 부인이 둘이다·
녹 호위는 남녀의 일을 모르니 누나가 낭자 되고 낭자가 내자 되는 이치도 몰랐다·
당장 멀리 안 가도 동생 놈에게 아들의 유모를 강탈당한 모용성익이었다·
어찌해야 고민을 해 본 모용성익이 일단 그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물론 거지 말고 아들 쪽·
“준아야 요즘 특이한 친구와 어울린다지?”
“아· 거지 누나요?”
“음·”
벌써 말문이 탁 막혔다·
거지면 거지고 누나면 누나지 거지 누나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대체 거지 뒤에 누나라는 말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심지어 대 모용세가의 직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그래· 어쩌다 알게 된 지인이니?”
“지인 아니라 친구에요!”
“음·”
벌써 친구까지 갔단 말인가·
모용성익의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그게 있잖아요 아버지· 전에 백 무사님이 그랬는데요 여자 거지는 전부 다 더러운 으음·”
“왜 그러니?”
“거지 누나가 나쁜 말 하면 안 된다고 했었는데 나쁜 말이라서요· 특히 부모님 앞에서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댔어요·”
“이번에만 특별히 허락해 주마· 그래서?”
“그 여자 거지는 전부 다 더러운 창녀년이라고···”
“백 호위 이 새끼가···!”
모용성익의 핏대가 불룩 튀어나왔다·
“역시 나쁜 말 맞죠···?”
“그래·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단다· 아비 앞에서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 대화하더라도 입에 올리면 준아 네 품위만 해칠 뿐이니 그런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단다·”
“아· 거지 누나가 그 말도 해줬어요· 나쁜 말 쓰면 나는 나쁜 사람이라고 외치는 거랑 같으니까 아예 안 쓰는 게 낫다고·”
“음·”
모용성익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녹 호위의 필담에는 말이 사리와 이치에 맞고 현명한 여인으로 보였다지·
역시 녹 호위가 믿음직하기는 해·
“음· 그리고? 또 배운 게 있니?”
“아· 그리구요···”
모용준이 아비 앞에서 신이 나 청의 성평등 교육을 재잘재잘 풀어놓았다·
모용성익이 듣기에 너무 여인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기는 해도 올바른 몸가짐 말가짐 마음가짐에 대한 타당한 교육이었다·
여인이 가르쳤으니 여인에게 유리한 것이고 그나마도 사내라고 하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덕목이었으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저 알고도 다들 안 지킬 뿐이지·
“어때요 아버지? 다 맞는 말이에요? 누나가 모르는 이야기를 들으면 혼자서 이해하지 말고 어른께 확인해 봐야 한다고 그랬는데요···”
“훌륭하구나· 네 말이 모두 맞다·”
모용성익이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렸다·
신이 난 모용준이 아비 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모용성익의 마음은 신나지 않았다·
오히려 묵직하니 바윗돌을 매단 것 같았다·
거지 여인에게 금자를 주고 가슴을 사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찔하니 천 길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모르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라니·
천무지체를 타고 난 막내아들에게 무공이나 가르친다고 다들 신이 났다·
이러한 당연히 지켜야 할 사람의 도리를 알려준 이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모용성익마저 마찬가지였으니 너무나 당연하니까 당연히 알겠거니 크면 다 알겠거니·
생각해보니 누가 가르치지 않으면 어찌 알아 깨우친단 말인가·
대개는 어미가 나서서 훈계해야 할 것이나 아 부인 어찌 그리 빨리 떠나셨소····
거지 여인이라 해서 경시했더니 알고 보니 자식의 은인이었구나!
세상에 마주치는 모든 이를 스승으로 여기라 배웠건만 내가 머리가 굵었다고 이러했구나!
당장 그 여인을 불러다가 크게 감사를···
“···또또 그리고· 맞다! 거지 누나가 저랑 혼인하자고 했는데요·”
“뭐라? 감히 그래서 어찌 대답하였느냐?”
“얼굴 가린 여인은 싫다고 했어요· 아버지께서 그러셨잖아요· 얼굴 가린 여인은 남들 보기 끔찍해서 가렸다고···”
“그래· 그랬지· 후우· 잘했다· 잘했구나·”
모용성익이 기억도 안나는 제 가르침에 크게 감사했다·
인제 보니 아이의 은인이 아니라 시커먼 속을 가진 모사꾼이었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꼬셔서 팔자 한 번 펴보려는 수작질이었어!
“준아야 아비가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혼인은 가문의 중대사이니 절대 절대 혼자 결정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다· 그리고 그 거지 여인은 더더욱 안 되고· 절대 안 돼· 이 애비 눈에 흙이 들어가는 수가 있어도 안 돼·”
“저도 싫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거지 누나가 이제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저랑은 혼인하지 않겠다고도 했구요·”
“뭐야! 거지 주제에 무슨 망발이란 말이냐!”
듣고 나니 그건 또 그것대로 화가 났다·
“앗 아버지?”
“크흠· 아니다· 잊어버리거라· 혼인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자세히 좀 말해주겠니?”
사정 듣고 보니 좀 애매했다·
이게 요오망한 수작질인지 누이가 아는 동생 놀리는 말인지·
사람의 눈빛 손짓 말투를 전부 알아야 판단이 되는 일이니 전해 들어서는 알 수가 없겠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면 알 일이라고·
—-
팽대산은 정말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세가를 떠나봐야 여인들 몰려들어 귀찮기만 할 뿐이니 그저 틀어박혀 수련만 하던 나날이었다·
심지어 성취도 있어서 절정 후기에 들었다·
그러나 팽대산은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전에-
“야 동생놈! 너는 무슨 계집 보기를 돌처럼 하는 줄 알았더니 이거이거 참· 요래요래 참·”
“뭡니까 누님·”
“나 봤거든? 이거이거· 요 앙큼한 놈·”
팽초려가 팽대산의 옆구리를 콱콱 찔렀다·
참고로 팽초려는 평생 힘 조절이라는 개념이 없어 굉장히 아프다·
옆구리의 통증과 더불어 은근 아니 대놓고 짜증나는 느물거리는 태도에 팽대산의 목소리가 한 단계 낮아졌다·
“뭘 보셨단 말입니까?”
“걔· 청아· 예쁘던데?”
팽초려가 그리 말하며 쌜쭉 웃었다·
팽대산이 벙쪘다·
왜 갑자기 그 이름이?
“서문청 소저를 말하십니까?”
“그래· 그 서문청· 친구라니? 친구라지? 친구우우라지? 그 옥기린의 친구· 여자 친구· 여인 친구· 여류 친구·”
팽대산에게 팽초려는 누나 이상 어머니 미만쯤 된다·
팽초려가 업어 키운 동생이 팽대산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담백한 사실이었다·
팽대산이 그 정으로 짜증을 꾹 눌러 담았다·
“누님· 진짜로 짜증이 나는데 좀 그만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흠 근데 너 좀 힘내야 쓰겠던데? 걔 이제 곧 초절정 가겠어· 환골탈태를 했으니까 이미 한 번 갔다가 왔다고 해야 하나? 야! 어디가?”
“···면벽수련하러 갑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그 여자가 초절정 이뤘다고 이죽거리면 진짜로 짜증이 날 것 같아서 그러하니·”
“그·래·알·았·어·힘·내·라·내·동·생·”
그리고 보았던 팽초려의 표정은 키워준 은혜조차 뻥 차버릴 정도로 얄미웠더란다·
그러다가 아뿔싸·
일단 하북팽가로 ‘피할 수 없는 동행’이 찾아오면 말 그대로 절대 피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 전에 탈출해야 했는데 수련에 과몰입한 나머지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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