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2
“왜 꽃 같은 거지라 꽃거지다· 불만 있냐?”
“그치만 그치만 뚱뚱하잖아요···”
“야· 모란도 꽃이고 연꽃도 꽃이거든? 크다고 꽃이 아니냐?”
“그치만 그 둘은 이쁘잖아요····”
“아주 그래 소신 발언 할 말은 한다· 그래 너 잘났다· 됐어· 이제 가· 꽃거지 아니 거지 누나 잘 거야·”
“앗· 어 음· 그러면 그러며는 음 호박꽃 아니 호박꽃도 보면 이쁜데 그럼 그냥 호박은 안 돼요? 아니면 여주(고과)나 오이 악!”
모용준이 다시 땅바닥을 굴렀다·
비싼 비단옷이 흙투성이가 되는 것도 모르고·
청의 개인적인 지론으로는 어차피 꼬맹이들은 땅 속성이라서 원래 흙 파먹고 살기 때문에 좀 굴러다녀도 된다·
이전보다는 훨씬 위력이 약해 감히 전능하신 그 이름 ‘핵’을 붙일 정도까지는 아니라 그냥 꿀밤치기(삼류 급)이었다·
하지만 맞은 데 또 맞으면 더 살벌하게 아픈 법이었다·
한참 굴러다니던 모용준이 이번엔 억울했는지 눈물방울 그렁그렁 매단 눈으로 배신감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왜 왜요·”
“나쁜 말 안 된다고 했지·”
“하지만 거지 누나도 우리 아버지 말이 맞다면서요· 얼굴 가린 사람들은-”
“됐고· 너 내가 이불에 오줌 싼 놈이라고 부르면 기분 좋아? 그래서 이불에 오줌 안 쌌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
“아는 무슨 아· 됐어· 거지 누나 잔다·”
청이 그리고는 아예 드러누웠다·
그러자 모용준이 오도카니 서서 정수리만 슬슬 문질러댔다·
“그 거지 누나· 여기서 자면 안 불편해요? 우리 집 아니 우리 집은 아니라 소화문 가서 안 잘래요?”
이러나 저러나 애는 착하네·
청이 누운 채로 대답해 주었다·
“소화문 사람들 생각도 해줘야지· 거지 데려가면 좋아하지 않을걸?”
“아·”
“됐다· 밤 늦었는데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음? 뭐야? 지금 몇 시야?”
청이 바로 누워 하늘을 보았다·
맑은 달이 은은하게 비추는 위치가 보아하니 대충 축시 말에서 인시 초쯤 현대식으로 치환하면 사람의 감수성이 가장 충만해져서 저도 모르게 문자를 보내게 되는 새벽 세 시다·
“아니 무슨 오밤중에 귀한 도련님이 혼자 돌아다녀? 위험하게스리·”
“아· 혼자 아니에요· 호위해주시는 녹 무사님이랑 같이 왔어요· 녹 무사님?”
“끄륵·”
돌연 가래 끓는 소리가 나기에 바라보니 저 담벼락 음영 밑에 흑의인 한 명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세를 감춘 듯 경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정보는 알았으니 악업이 이백대 초반이었다·
뭐야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근데 뭐야 나쁜 놈인데?
청이 바짝 경계했다·
그러자 녹 호위가 안심하라는 듯 손을 흔드니 청이 긴가민가하다 문득 할아범을 떠올렸다·
그래 할아범 같은 사람 또 있을 수도 있지·
애가 소신이 있고 집요한 면이 있어서 그렇지 말도 잘 듣고 귀엽기도 하니까·
현대에 나왔으면 국민 남동생 최강 미모의 아역 배우로 떼돈을 벌었을 듯한 모용준이었다·
잠깐 그럼 내가 한 성평등 교육도 다 듣고 있었다는 거 아냐?
왜 가만히 놔뒀지?
아준이가 꼭 들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했나?
하긴 상식 있는 어른이라면 내 유익한 강의를 막을 수가 없기는 하지·
그런데 마음 찢어짐을 감수한 사랑의 매를 냅다 이르지는 않겠지?
“녹 무사님은 이전에 목을 다치셨대요·”
“음· 가족들 걱정하시겠다· 밤이 늦었으니 어여 들어가· 너야 밤잠 없어도 녹 무사님은 졸리실 거 아냐·”
“녹 무사님은 원래 밤에 항상 깨어 있으세요· 낮에는 백 무사님이 지켜주시고요·”
“너는 항상 퇴로가 다 있구나····”
청이 대자로 누워 중얼거렸다·
잠은 이미 다 깨서 정신이 맑다·
여기서 억지로 잠을 청해봐야 잠깐의 새우잠이고 일어나서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어차피 밤이라 할 일도 없고 무공 수련이나 좀 해야지·
“나는 이제 수련이나 할 거야· 그러니 볼 일 다 봤으면 들어가서 자라· 밤에 자야 키도 쑥쑥 크고 그러지·”
“거지 누나는 너무 많이 잔 거 아니에요?”
“뭐임마? 나 어릴 때는 하루에 한 시진 반만 자는 게 아이의 미덕이었어· 그 이상 자면은 큰 사람이 못 된다고·”
삼당오락 시발 것·
어떤 새끼가 그딴 소리를 해가지고는·
참고로 삼당오락이란 세 시간 자면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한민족의 가혹한 입시 문화 속 악습이었다·
“아!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잠은 두 시진이면 충분하니 잠이 안 오면 억지로 잘 필요 없으니까 심심하면 수련이라도 하라고·”
“그래서 지금 돌아다니고 있는 거냐···”
도대체 엄한지 엄하지 않은지 알 수가 없는 아비였다·
하지만 아이가 아버지를 입에 담으면서 저어하는 기색이 없으니 내리사랑 듬뿍 주는 아비임에는 틀림없으리라·
“그럼 저랑 같이 수련해요· 세가의 무사들보다 제가 더 쎄요!”
“이 몸은 고작 일류와는 칼을 섞지 않는다만· 좀 더 정진하고 오는 건 어떻겠니?”
“같이 정진하면 좋잖아요···”
청이 웃음 섞인 콧김을 내뱉었다·
“그래 수련이나 하자· 수련이 남는 거지···”
—-
잠은 두 시진이면 충분하다는 모용준네 아버지의 말은 대충 사실이다·
일단 환골탈태를 이룬 고수들은 하루 두 시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정신적 피로 해소에 탁월한 신공들의 소유자들이 그랬다·
청은 둘 다에 해당했지만 그냥 잠을 자는 게 좋아서 고수치고는 잠을 많이 자는 편이고·
어쨌거나 청의 일과는 그대로였다·
낮에는 게으름을 피우다 저녁을 푸지게 먹고 곧장 누워 빵빵한 배를 감싸 쥐고 식후의 낮잠을 즐긴 후 정신이 들면 오밤중에 칼을 휘둘렀다·
높은 확률로 밤에 모용준이 나타나 겸사겸사 같이 대련하며 어울려준다·
그리고 모용준은 낮은 확률로 낮에도 나타나 잠을 방해하며 귀찮게 굴었다·
“뭐야 나 자야 해·”
“한 시진 반이면 충분하다면서요····”
“그때 못 자서 지금 채우는 거란다· 근데 저 사람은 아는 사람이니?”
청이 저쪽 한편 청을 무슨 원수라도 보듯이 노려보는 사내를 가리켰다·
“아· 저분이 백 무사님이세요·”
“근데 왜 쟤가 날 저렇게 노려보지?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그게 아니라요· 백 무사님이 거지 누나한테 더러운 창녀라고 했으니까 사과하셔야 한다고 했더니 저러세요· 우리 무사님이 나쁜 어른이라 죄송해요· 대신 사과할게요·”
“아유· 어쩜· 착하기도 하지· 그래 이렇게만 자라렴· 정파 무림의 미래가 밝다·”
청이 모용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에 백 무사가 허리에 찬 칼손잡이에 손을 척 올리는 것이 아닌가·
지가 뭐 어쩔 건데· 뽑을 거야?
청이 보란 듯이 피식 비웃음을 날려주자 놈의 표정이 벌레 씹은 사람처럼 변했다·
악업이 높은 녹 무사는 가끔 발견되어 눈이 마주치면 꾸벅 인사를 건네는데 정작 선업에 기운 저 자식은 아주 막돼먹은 놈팡이였다·
애한테 못 할 소리나 하는 놈 같으니·
그래서 가끔 꼬맹이가 낮에 출몰할 때도 백 무사 놀린다고 일부러 어울려 주었다·
그렇게 또 쏜살같이 시간이 흘렀다·
원래 특별한 일 없고 딱히 힘들지 않으면서 일상이 규칙적이면 시간은 빨리 흐른다·
다만 나이를 먹을수록 세파에 익숙해져 특별한 일이 점점 줄어드니 바로 어른의 시간이 빨리 흐르는 이유였다·
슬슬 봄이 흐드러지니 의복이 덥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서늘한 정도라서 혹독한 수련으로 추위에 강한 청이 솔기 뜯어다 솜을 다 빼버렸다·
어차피 버릴 옷이라서 막 다뤄도 된다·
“거지 누나? 살 빠졌어요? 갑자기?”
“옷이 두꺼워서 그랬던 거다· 음· 근데 어딜 보니? 색마 꿈나무 부활이니?”
“앗· 죄송해요· 신기해서···· 안 무거워요?”
“무겁지· 그렇다고 대놓고 보진 말고 남들이 흉본다· 흘끗 봐· 흘끗· 안 보는 척 흘끗·”
당난아 덕분에 음흉한 시선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게 된 청이었다·
당난아의 음습하고 욕망에 번들거리는 그런 눈빛이 아니라 진짜 아이의 호기심으로 반짝일 뿐이었다·
어차피 신기함이란 오래 가지 못하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그래서 며칠 만에 모용준도 금방 흥미를 잃고 흘끗 보기를 그만두었다·
다만 다른 새끼들이 좀 문제였는데·
“얼굴을 가렸어도 몸매는 괜찮구나· 그래 못 볼 꼴이면 가리면 그만이지· 정붕은 어디 차렸느냐?”
“아· 이쪽으로 좀 오시겠어요?”
정붕이란 못 창고를 말한다·
못 박듯이 후딱 박아버린 후에 빼내는 장소라는 뜻으로 중원 사람들이 말장난 하나는 아주 기깔나게 하는 것이다·
여자 거지는 다 더러운 창녀라는 백 무사의 말이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그게 사실이냐 거짓이냐를 따지면 참에 해당하기는 했으니·
길바닥에 누워 흘끗 보니 얼굴은 어차피 가려서 안 보인다·
그런데 몸이 그리는 선이 와! 세상에! 이럴 수가! 어떻게 저럴 수가! 하니 사내놈의 음심과 더불어 다른 것도 솟구칠 수밖에는·
뒷골목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 청이 벌써부터 바지춤의 끈을 풀던 사내의 정수리를 핵으로 폭격했다·
빠악!
충돌의 순간 거의 머리가 요凹 자 형태로 짓눌리는 환상이 보일 정도였다·
훈계가 아닌 응징의 의미를 담은 서문수린류 완전 파괴 꿀밤식式 최종 오의 천신지장(신의 지팡이)이었다·
“멀쩡한 새끼가 어딜 대낮부터·”
“아악! 나 죽는다!”
“안 죽게 쳤으니까 정신 차리고· 함부로 껄떡대면 이렇게 되는 거야· 알간?”
“이 미친 거지년이 죽고 싶어서 헙· 무공이 고강하시군요· 미리 말씀을 좀 해주시지····”
돌맹이였던 것이 청의 손아귀에서 곱게 갈린 가루가 되어 부스스 흩날렸다·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사내가 얌전해졌다·
“자· 아무데서나 좆을 놀리려다가는 진짜 좆 되는 수가 있다고 인생의 큰 교훈을 얻었지? 수업료 놓고 가라·”
“예 선생님·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오냐·”
그렇게 솜 빼고 난 당일에만 세 자루 지팡이를 떨군 청이 생각했다·
이 정도면 포악한 여자 거지가 있다고 소문이 쫙 퍼지겠지? 귀찮게 안 굴겠지?
청의 생각이 짧았다·
그런 소문이 날 리가 없다·
사내가 어떻게 거지한테 그것도 여자 거지한테 처맞고 수업료까지 낭낭하게 내고 튀었다는 소리를 하겠는가·
오히려 소문이 반대로 났다·
‘뭐야 오늘 한몫 챙겼다며? 왜 돈이 없어? 한 턱 쏜다더니 말 바꾸냐?’
‘아니 그게 저기 여자 거지한테 적선을 좀·’
‘여자 거지? 새끼가 지랄하네· 이십 문이면 되는 거 아냐? 은자 한 개를 털었다고? 처맞고 털리기라도 했냐?’
‘아니 그게 아니라 어 그래 너무 잘해서 감동을 받아서 좀 쐈다·’
‘음? 그 정도라고? 나도 가 봐야 하나?’
‘어 그건 음? 그래· 너도 꼭 가봐라· 진짜 살면서 한 번은 그걸 맞아 아니 경험해 봐야 한다· 진짜로 극락에 갈 뻔 아니 잠깐 다녀왔다니깐·’
갑자기 수중에 금전이 사라진 사내들이 대충 비슷한 흐름으로 추궁을 회피했던 탓이다·
나만 당할 수 없다는 유치한 심리도 함께·
그리하여 그로부터 열흘 후 사월 중순 꽃이 흐드러지며 봄이 찬란한 때 청이 수업료로만 번 돈이 행낭 가득한 은자와 동전들이었다·
“뭔 놈의 동네가 무슨 발정이 났나· 소문도 안 돌아? 아니면 처맞고 싶어서 오나? 흑점도 조용한데 거지 행세 때려치워야 하나·”
청이 또 한 놈 머리에 커다란 동산을 만들어준 후에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봄이라서 그런지·
다들 밖에 나와 햇볕도 쬐고·
사람이 아주 바글바글하네·
청이 팔자 좋게 누워 사람 구경이나 했다·
그러다 문득 위화감을 느낀 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이 도시에 여인이 이리 많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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