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6
한편 한 놈 보내고 돌아온 청이 당황했다·
뭐야 이 여인의 벽은·
무슨 옥기린이라도 뜬 것처럼·
···이 아니라 진짜로 떴네?
청이 잠시 고민했다·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론은 금방 나왔다·
지금 아는 척을 해도 손해뿐이다·
그 배분 하고서는 거지 행세나 한다고 뚱한 얼굴로 혀나 쯧 한번 크게 차고 말 테니·
무림대회에서 사람 형태를 하고 봐야겠다고·
그렇게 청이 도주 각을 재는 와중이었다·
돌연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다급하게 다가온 팽대산이 팔목을 덥석 잡아끌었다·
“아앗 왜 이러세요?”
“닥치고 따라 와·”
사실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다·
뿌리치다 뿐인가 잡고 무기처럼 붕붕 휘두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옥기린 수호대 저 여인의 성벽을 뚫고 도주하기보다는 일단 골목길을 취하는 편이 유리하여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
다만 그 조동이는 순순하지 않았으니·
“어머 왜 이러세요· 아무리 급하셔도 이러면 안 되셔요· 일단 그윽하게 분위기부터 잡아 주시면· 음· 그리 힘줘도 안 부서지는데·”
돌연 손목을 쥐어짜는 압박감에 청이 말했다·
천하십대마공 중 제일을 다투는 소수마공의 아름다운 팔목은 아귀 힘 아니라 망치로 내려쳐도 멀쩡한 금강난괴 경지가 모자라서 불괴까진 아니고 부수기 매우 어려운 정도다·
“너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지? 이 꼴은 다 뭐고?”
청이 움찔했다·
나름 팽대산 전문가로서 친구가 제 기분에 따른 음역대 분류 중 시작부터 최고 위험 단계 초저음 초저주파 음성이 터져 나온 것이다·
청이 일단 너스레를 떨었다·
“아· 들켰나? 용케 알아보네· 이야 역시 친구 좋다는 게 이런 건가 봐? 오랜만이야 산·”
팽대산의 눈빛이 마구 떨렸다·
여인인 친구를 마주치는 모든 경우의 수 중에 가장 끔찍한 형태였다·
서문청과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대체 너 무슨 짓을 방금 나간 사내는·”
팽대산의 목소리가 떨렸다·
팽초려가 들었다면 제대로 분노 폭발 직전의 징조임을 알았겠지만 팽초려는 팽대산을 업어 키운 최고의 권위자였으니 청이 알리가 있나·
“아· 그놈? 요즘 들어 저런 놈들이 왜 그리 많은지 몰라· 멀쩡한 놈이 대낮부터 오입질을 시도하길래 쥐어패고 돈 뜯어서 쫓아냈지·”
“뭐?”
팽대산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눈물 자국 역력했던 오입쟁이 사내의 그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으니 극락에서 조부 뵙고 돌아왔다는 말이 처맞고 잠깐 황천강에 빠졌다가 살아나왔다는 뜻이었다·
깊은 안도도 잠시 이후 활화산처럼 창대하게 분출하는 분노가 있었다·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뭐? 쥐어패고 돈을 뜯어? 그깟 금전 좀 벌자고 체면 아니 체면이라 할 텐가? 중원에서 얼굴 들고 살 생각이 있느냔 말이다!”
“산아 친구야 일단 좀 진정하고···”
“내가 진정하게 생겼나? 하 지금 아주 온 도시의 사내들이 널더러 뭐라 하는 줄 아나?”
“어···· 건드리면 처맞는 성질 더러운 여자 거지가 있다?”
“하· 도시 명물로 하루에 사내 일백 명과 붙어먹는 거지 창녀가 있다고· 심지어 나는 오늘 점심쯤 도착했는데도 벌써 전해 들었단 말이다·”
“뭐?”
청의 표정도 팍 썩었다·
“이런 육시랄 놈의 새끼들 어떤 새끼가 그딴 소문을 내? 누구야 누가 그딴 소리를 해?”
“장원 사내 모두 다·”
“이런 썅·”
청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뭐가 어쩌고 저째?
그래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잘못했어·
꿀밤이 아니라 그냥 흑살마장 찰진 손맛으로 대가리를 터뜨렸어야 하는데·
“안 되겠다· 어떤 새끼들이야? 아주 사지를 별 모양으로 잘라버릴 거야·”
청의 눈에서 광택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청이 오히려 노발대발 분노를 감추지 못하자 외려 지켜보던 팽대산의 맥이 빠졌다·
“하아· 그래 너도 몰랐다는 건 알겠군· 대체 거지 행세를 하면서도 그런 이야기 하나 주워듣지 않고 뭘 했나?”
“아니 난 못 들었는데·”
청이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그야 사내들끼리 떠도는 이야기인데 여인에다 장본인인 청에게 들릴 리가 있겠는가·
“···일단 왜 그 거지꼴을 하고 있는지부터 설명을 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아· 이거?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청이 주마점에서 있던 일을 설명했다·
노인네 흑흑· 사파 꽝· 뻔데기 냠냠·
인신매매범이 금자받기 대 고자되기에서 후자를 원한 기이한 선택 ·
그리고 현상금 일만 관·
“···그래서 아무한테도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눈도 피할 겸 거지로 위장하고 있었지 뭐야·”
“도대체 하아· 너답다고 해야 하나·”
듣자 하니 청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흑점은 본래 온갖 독액이며 마약 장물 노비 심지어 인육까지 취급하는 말종들의 집합들이다·
“뭐 괜찮아· 어차피 내 정체 아는 사람은 두 사람 아니 우리 산이까지 셋밖에 없거든? 두 명한테는 이미 약속받았고· 비밀 지켜줄 거지 산?”
어차피 장원의 꽃거지는 그게 아니어도 곧 사라질 사람이었다·
정체를 아는 사람이래봐야 아준이랑 아저씨 뿐인데 아저씨는 못 본 척을 해주기로 하셨고 아준이에게도 잘 말해두었으니 또 기똥차게 말은 잘 듣는 꼬맹이라서 문제도 없다·
개방은 누곡 할아버지 이름 대서 아예 서로 안 보이는 사람처럼 지냈으니 어차피 모르고·
그러니 훌쩍 떠나면 끝·
꽃거지는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하 그 몸뚱이를 하고서 잘도 사라지겠군”
“내 몸뚱이가 뭐 어때서?”
“몰라서 묻나? 강호의 여인 중에 그만한 키에 그 천박 아니 큰· 으음· ···넓은 품을 가진 여인이 세상에 또 있나?”
팽대산이 어쩐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리 말을 골라? 삼 점 감점짜리 천박한 젖탱이라고 왜 말을 못해?”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그리고 젖탱 젠장 그런 천박한 소리까진 안 했다·”
“아 그건 설가놈이었나?”
“대체 어떤 놈이 크흠 감점은 철회할 테니 그만 좀 잊지·”
“안 돼· 평생 못 잊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의외로 옷차림 보고 판단한다? 거지 옷 입고 있으면 키 큰 거지고 신녀문 도복 입고 있으면 강호의 여류 무인으로 보는 거지· 그리고 뭐 내가 아니라고 하면 어쩔 건데?”
팽대산이 잠시 멍해졌다·
생각해보니 가끔 아아주 가끔 이렇게 현기가 넘치는 소리를 했던 것도 같다·
그때였다·
“와 근데 어쩜 그렇게 딱 한 눈에 알아봐? 심지어 나 환골탈태해서 팔다리 길이도 바뀌지 않았나?”
“음·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소문이란 것이 악의적이고자 하면 얼마든지 갖다 붙이는 것이다· 세상에 그리 끔찍한 추문이라도 달리면 도대체 어떻게 하려 하나?”
팽대산이 말을 돌렸다·
“산! 걱정해주는 거야!? 와 서문청 감동· 감동의 눈물 바다· 걱정 마· 그럴 땐 얼굴 까면 그만이지 뭐· 자 봐라· 짠!”
“얼굴 깐다고 뭐가 달라지·”
팽대산의 말이 뚝 끊겼다·
청의 해로운 얼굴을 마음의 준비도 없이 바로 앞에서 마주한 자의 숙명이었다·
그저 해맑은 아이처럼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 두 눈에 가득한 찬란한 정감이 진한 반가움으로 빚어진 미소가 시리도록 눈이 부셔서·
그리고 장난스럽게 호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
어째서인지 돌연 회색으로 바래버린 천하에 홀로 붉은 그 색채에 눈을 뗄 수가 없어서·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청이 방심할 틈을 안 줬다·
“봐라· 예뻐졌지? 이게 바로 환골탈태의 힘이다 이거야· 아· 환골탈태 이거 진짜 좋은 건데·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 안 겪어 보면 알 수가 없는데에· 누구는 아직 모르겠지? 절정 중기가 어찌 환골탈태를 알겠어? 아 안타까워라·”
저놈의 주둥이가·
팽대산의 눈썹이 까닥거렸다·
“중기라니· 이젠 절정 후기다·”
“그래그래 이제 정신이 좀 들지? 봐봐 내 얼굴 보니까 다른 데 눈에 안 들어오지?”
“크흠·”
그 위력을 충분히 이해한 팽대산이 대답하긴 또 자존심이 상해 헛기침이나 했다·
그 모습에 청이 의기양양해졌다·
“내가 다 생각이 있으니까 제대로 거지 행세를 한 거지· 어설프게 거지 같으면 다들 의심을 할 거 아냐?”
순간 청의 선업이 일 점 까였다·
사실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상태창을 켜 놓지 않는 청은 몰랐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었다·
“그럼 이젠 어쩔 셈이지?”
“꽃거지 퇴장이지 뭐· 무림대회 전까지 쭈욱 퍼질러 있으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이대로 튄 다음에 밤중에 목욕 좀 하고· 아· 지저분한 거 딱 질색이지? 이해 좀 해줘· 거지가 깨끗하면 이상하잖아·”
“괜찮다·”
워낙에 깔끔을 떠는 팽대산이라 기겁을 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담백한 긍정이 돌아왔다·
뭐지? 친구 특전인가?
팽대산 이놈도 드디어 우정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인가?
“아· 맞다· 내가 이대로 사라지면 산이 곤란해지는 거 아니야? 하루에 일백 명 손님 받는 거지랑 붙어먹은 놈 되는 거잖아·”
“농담으로라도 그 말은 꺼내지 마라· 영원히 감춰야 할 일이니·”
“또 목소리가 깔고· 음 이런 건 어때? 사실 꽃거지가 정체를 감춘 대마두라서 그걸 알아본 정파의 대협 산이 치열한 혈투 끝에 쫓아내고 만 거지·”
청이 생각해도 즉석에서 짜낸 치고는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다·
동시에 꽃거지의 실종을 설명할 수도 있고 겸사겸사 팽대산의 이름도 높아지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묘책이었다·
“그럼 무림 대회서 봐·”
“이대로 또 가겠다고?”
“그럼?”
“거지랑 붙어 먹은 놈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 아니 오히려 좋아· 따라다니는 저 지긋한 여인들이 떨어져 나갈 테니 오히려 좋은 기회가 아닌가· 게다가·”
“게다가?”
“음· 아니다·”
팽대산이 말을 삼켰다·
혹여 나중에 탄로나면 둘이서 말을 맞춘 일이 더욱 수상하게 여겨질 수 있으니 혹여 몰라서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하지만 사나이는 생색을 내지 않는 법이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사람을 열 받게 하는 행동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청이 보란 듯이 팽대산을 보았다·
팽대산이 얌전히 뒷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 눈싸움을 하고 나서야 팽대산이 당했음을 깨달았다·
“됐고· 이대로 같이 붙어서 객잔 하나 잡아 들어가지· 너는 아예 깨끗이 한 이후에 빠져나가면 될 것이 아닌가· 여인이 무슨 밤중에 몰래 목욕을 하나 누가 훔쳐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오· 산이· 나 또 감동받으려 그래·”
“됐고· 빠져나갔다가 이후 장원도문으로 와라· 목적지가 같은데 굳이 따로 가야 할 이유가 있나·”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뭐? 왜지?”
팽대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청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 명의 검객으로서 반검문에 머무는 치욕을 감내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 암·”
“큭·”
돌연 팽대산이 빵 터졌다·
참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움찔움찔 역류하는 바람을 막아내느라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그냥 웃기면 웃지 않을래? 웃으면 지는 기분이라도 드나?”
“안···· 웃었다····”
“은···· 읏읐뜨····”
“크흑·”
팽대산이 돌연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폐에서 바람 새는 소리를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참으로 독한 놈이라고 해야 할까·
“좋아· 장원반검문이라 이거지? 아· 거기 팽 소저도 계시나?”
“그놈의 반검문 소리는· 누님이라면 안타깝게도 그렇다·”
웃음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는지 팽대산의 목소리에 음이 반음 정도 위로 이탈했다·
그러자 청이 냉큼 말을 바꾸었다·
“그럼 다시 장원도문이로군· 팽 소저와 도를 나눈 친우 도려로서 도를 모욕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것과 같다· 대저 검이라 하면 그저 도병을 두 개 맞대어놓았을 뿐이 아닌가? 이제부터는 검을 쌍도라고 부르겠다· 월광쌍도가 두 자루니 이제 월광쌍쌍도가 울부짖을 날이 머지 않았구나·”
그에 팽대산이 청을 바라보는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세상에 대체 뭐 이딴 년이 다 있지 하는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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