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8
장원시에 처음 방문한 청이 놀랐다·
옥기린 떴으니 남여 성비가 무너지는 것이야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숫자가 다소 줄기는 했지만-
어제 그 지랄을 떨고도 다소 줄은 정도니 대체 저 집착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게다가 뭐야 다들 왜 저래·
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난히 눈에 띄는 기이한 꼴이었다·
어째 여인 세 명 중 두 명은 꼬질꼬질 때 타서 더러운 의복을 입고 머리는 풀어 헤쳐 거지꼴을 했다·
의복은 거지인데 얼굴에만 분을 칠하고 입술을 발라 화장이 진했다·
드디어 중원에도 세기말 기이한 유행이 도래했나 싶을 정도였다·
어제 옥기린이 선언하기를 더러운 거지년이 취향이라 밝히는 바람에 생긴 거지풍이었다·
중원에서는 유행을 일러 ~풍風이라 한다·
흔히 말하는 돌풍이 분다는 표현이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사지 멀쩡한 인간들이 거지 행세를 해? 사내한테 좀 잘 보이겠다고? 거 참·”
청(거지)의 냉혹한 평가였다·
이 거지 아닌 거지떼를 보고 나니 팽대산이 여인 혐오로 치를 떠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사실 시대가 시대라서 여인이 이리 행동하더라도 연심에 의한 순정이니 뭐니 형편 좋게 포장되기에 더욱 극성이었다·
청은 하북팽가가 장원도문에 짐을 풀었다고만 전해들었지 장원도문이 어디라고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길안내가 필요 없었다·
눈에 여자 거지 호소인이 많이 보이는 쪽으로 사뿐사뿐 걸음을 떼니 점점 사방이 온통 여자 거지 호소인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길목이 여자 거지들로 가득하고 소용돌이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크게 원을 그려 돌고 있었다·
그 거지 판이 난 가운데 대문이 우뚝 솟아 장원도문이라는 거치나 묵직한 필치의 현액이 붙었다·
청이 대문으로 향하니 여인들의 적대적인 시선이 파바박 와서 꽂혔다·
그러나 청도 이미 옥기린 숙련자다·
이 무시무시한 적대감에는 익숙하다·
오히려 안 그래도 달리기 부정 출발 수준으로 나가 있는 가슴을 더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펴니 뭐야 왜 왜 기분이 좋지?
자부심 뭔데 저리 치워·
청이 잠시 혼란에 빠졌다·
장원도문의 정문 위사도 혼란에 빠진 듯 대문 앞에 선 청을 보고도 입만 벌린 채로 파리라도 한 마리 들어오길 기대하는 바보 행세를 했다·
“····”
“무사님?”
“핫 소저께서 장원도문에 용무가 있으십니까? 방문이시라면 여기 방명록에 부디 존함을 적어 주신다면 안에 올리겠습니다·”
“신녀문 외문제자 서문청이라 해요· 미리 기별이 들지 않았던가요?”
“아 서문 소저님이시군요! 오늘 방문하신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이 그리 장원도문에 들어서 가다 보니 저만치에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중원에서 저만큼 키가 큰 사람을 달리 본 적이 없었으니 무조건 팽초려일 수밖에는·
“아니 청아 아니냐! 이야 저만치서 아주 갑자기 환하니 눈부셔서 보니 청아로구나· 아주 이로운 미모야· 오늘 온다고 소식은 미리 들었다·”
“팽 소저도 안녕하셨나요?”
“어머 완전 천상 여인이 다 되었네?”
그러자 청이 미인행을 깨고 개구진 미소를 피웠다·
“헤헤· 안 어울리죠?”
“아냐· 같은 여인끼리인데도 넋을 놓을 뻔했다· 나처럼 털털한 부류인가 했더니 또 그게 아니었구나?”
“그쪽 맞아요· 근데 사부님이 엄하셔서·”
“아 대모께서! 그런데 청아야? 팽 소저라니· 듣는 팽 소저 섭섭하게 딱딱하게 굴 셈이니? 언니라는 단어가 있단다·”
“어· 그게 영 어색해서요· 입에 안 붙네·”
언니는 진짜로 무리였다·
의매가 너무 섭섭해하길래 딱 한 번 언니라 불러준 적이 있었는데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도도 피어오르니 보다 근본적인 어떤 생리적 공포가 있었다·
청의 표정은 백 마디 말보다 효과가 있는 것이라서 그 꺼리는 기색을 읽은(읽었다기보단 그냥 보이는) 팽초려가 말을 바꿨다·
“입에 안 붙으면 그냥 초려라고 이름을 부르려무나· 우리 사이에 팽 소저는 너무 딱딱해· 자 해봐 초려·”
“네 초려· 알겠어요·”
“그런데 내가 준 대도는 어디다 놓고 그 얄팍하고 길쭉한 날붙이를 들었니?”
“그게 너무 무겁고 커서 두고 왔어요· 이번에 시중들기로 한 의매가 허약해서 맡겨놓기 좀 미안하기두 해서요·”
“대도가 다 좋은데 그런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하지·”
정작 팽초려도 허리춤에 얄팍한 협도를 차고 있었으니 대도의 휴대성이라는 아주 사소한 문제가 너무 사소해서 그렇다·
“아 청아야 이야기 들었어· 아휴 우리 착한 청아가 고생이 많았구나·”
“뭐야 산이가 다 불었어요?”
“그게 나한테 좀 도와달라니 어쩌겠니·”
팽초려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소문 때문에 마음이 쓰였는지 오늘 팽초려가 꽃거지 흉내를 하고서 동생 끼고 다닐 테니 청도 함께 거닐자고·
“아버지께서는 모르시니까 달리 모르는 척 해 주렴· 동생놈한테 화가 좀 나셨는데 뭐 며칠 두면 언제 그랬냐고 하시니까· 아 근데 그럼 어제 둘이 있었던 거 아냐?”
팽초려가 눈을 빛냈다·
초려가 산하고 내 사이를 오해하고 있던 모양이네·
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초려 산하고는 그냥 친구에요· 애초에 내가 무슨 마음이라도 있었으면 산이 그걸 두고 봤겠어요? 목소리 착 깔고 ‘끄즈르’ 이러면서 내쫓았지· 순수한 친구라서 제가 산의 유일한 여인 벗으로 남아있잖아요·”
“음·”
“그래서 생각해봤는데요 산한테 탈동정 기념 잔치 열어주는 건 어때요? 표정 완전 썩을 것 같지 않아요?”
순수하게 놀려먹겠다는 열망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팽초려가 중얼거렸다·
“하 이 자식· 고생길이 훤하네····”
“그 고생이라 할 만큼 놀려먹진 않는데요····”
“아니야· 이렇게 예쁜데· 멍청한 새끼· 그 잔치는 세가였다면 모를까 남의 집에서는 좀 그렇구나· 내년에 팽가에 놀러오렴· 일 주년 기념식으로 성대하게 놀려먹자꾸나· 어떻니?”
“음· 어차피 이미 하루 지나버렸으니까 내년을 기약하는 것도 괜찮네요·”
“그렇지? 약속이다? 꼭 와야 해? 사월 스무하루니까 일주일 전 그래 사월 보름까지는 넉넉하게 와·”
“네 초려· 사월 보름·”
팽초려가 아주 노련하게 약속을 잡았다·
청이 계략에 빠진 줄도 모르고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팽가주 팽헌께 인사를 드리러 음? 맞나? 장원도문주가 먼저 아냐?
청이 헷갈리자 팽초려가 정리해주기를 팽가의 손님으로 온 것이니 팽가주께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것이 순리라고·
도군자 팽헌은 아주 호탕한 분이셨다·
“아가!! 그래 어서 오너라! 내 우리 뱁새한테 이야기를 많이 들었단다· 이리 얼굴 보니 참으로 좋구나!”
“아버지는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뱁새 타령이에요? 그것도 손님 앞에서·”
“하핫 애비 눈엔 언제나 뱁새같이 아담하니 귀여우니 아니 뱁새보다 귀엽구나· 좋지 않으냐!”
청이 혼란에 빠졌다·
뱁새가 그 뱁새 아닌가?
중원의 뱁새는 독수리만한 맹금류인가?
팽초려의 손바닥만 했던 어린 아이 시절을 모르는 청이야 혹시 그 뱁새가 다른 뱁새인가 할 수밖에는·
“에휴 자식놈이 사고를 쳐서 아가에게 면목이 없게 되었다· 평소에도 말 안 듣는 놈이지만 정말로 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사내새끼가 맨날 뚱해가지고는·”
“아· 그건 알 것 같답니다· 아 하오시면 산에게도 달리 부르는 애칭이 있으신가요?”
청이 놀려먹을 거리 챙길 수 있지 않을까 눈을 빛냈다·
하지만 불발이었다·
“산이라! 좋구나! 그런데 놈이 뭐 귀여운 데가 있어야 애칭을 붙이든가 하지· 뭐라 하면 눈썹이나 꿈틀거릴 줄 알지· 에잉·”
“후훗·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답니다·”
“아가가 참으로 기품이 넘치는구나· 우리 가풍이 자유로워 흔치 않은데 이리 보니 그래 좋구나! 좋아!”
대체 뭐가 그리 계속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흔쾌히 반겨주신다는 건 알겠다·
그 후엔 장원도문주와 잠시 환담을 나눈 후에 곧장 산책 준비를 했다·
팽초려가 가슴에 광목천 넣어 동여매 큰 모양을 잡고서 면사를 뒤집어썼다·
청이야 내가 저렇게 우람하였나 싶을 뿐인데 팽대산이 아주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뭐야 산· 내가 저런··· 자태였어?”
“누님이 한 치 정도 더 크시긴 하다만· 어차피 서서 돌아다니니 가슴이 크면 태가 아래로 통이지 않나· 누님 어깨를 조금만 움츠려 주시겠습니까? 음 감쪽같군요·”
아닌 게 아니라 우람한 어깨를 움츠리고 나니 거의 꽃거지와 비슷한 꼴이었다·
애초에 특징이랄 것이 면사와 키와 가슴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두어 바퀴 돈 후에 헤어져 누님이 도시를 떠나버리실 거다 그러면 몹쓸 소문도 끝일 테지· 구경꾼이 많이 따라붙어야 할 텐데·”
“어? 산· 밖에 안 나가봤구나? 온 도시가 아주 온통 거지 천지야· 여인들이 산 눈에 들겠다고 거지꼴을 하고 진을 쳤던데·”
“···? 어제 그 꼴을 보고서도 안 떠나고 남았다고? 도대체 얼마나 더 큰 추태를 보여야 정을 떨어뜨릴 수가 있지?”
팽대산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달리 할 말이 없는 청이 그저 위로했다·
“힘내· 그렇게 독할 줄은 몰랐네·”
“빌어먹을· 돌아버리겠군·”
청이 그러다 딱 중지를 튕겼다·
“그럼 아예 어디까지 따라오나 개새끼나 한 번 해 봐·”
—-
셋이 장원도문을 나서자마자 안타까운 탄성들이 일시에 터져나왔다·
옥기린이 좌우로 여인을 끼고 나왔다·
한쪽은 한 시진 전쯤 들어간 절세의 미인이나 오히려 거리를 벌려 걷고 정작 찰싹 달라붙어 다정히 팔짱 끼고 연인의 분위기를 내는 쪽은 어제의 그 여자 거지였다·
절세 미인이 퇴짜를 맞은 것 같아 안도가 되면서도 저놈의 거지년은 대체 무어라고·
아드득 바드득 이를 가는 소리 줄여서 아득바득 듣기만 해도 치아가 시려오는 소음들이 탄식의 뒤를 이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딱 붙어서 도시를 어정어정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눈이 도끼날 모양이 된 여인들이 한 맺혀 성난 군중들처럼 그 뒤를 우르르 따랐다·
그렇게 대충 한 바퀴 쯤 돌았을 때였다·
“팽 공자님! 어떻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어떻게····”
한 여인이 길을 가로막아 눈물 그렁그렁 매단 눈으로 원망을 토했다·
그런데 그 미모가 심상치 않다·
주먹만 한 얼굴에 알차게 든 눈코입으로 용케 미인이구나 신기할 지경이었다·
늘씬한 키에 얇은 몸을 하고서 눈물 가득한 눈빛으로 씩씩거리는 모습이 가녀리기 그지없는 슬픈 미인의 모습이었다·
“모용 소저· 제가 무언가 폐라도 끼쳐드린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연인끼리 그저 거닐고 있을 뿐이니 비켜 주시겠습니까?”
청이 반사적으로 모용 소저의 가슴팍을 살폈다·
뭐야 제법 존재감은 있지 않나?
아준이가 누나는 한 명뿐이라고 했는데·
저 미모쯤이면 무림오화 맞는 것 같은데·
“아 안 돼요! 못 해요! 어떻게 절 놔두고 좌우로 여인을 끼고 가실 수가 있으셔요! 너무하세요! 대체 제가 어디가 모자라서!”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까 걱정이로군요· 모용 소저와 제가 달리 인연이 있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 어찌 그런 말씀을···! 차라리 옆에 계신 미인분이 낫지 어떻게 저 더러운 거지년한테 심지어 추한 계집년이잖아요!”
“아니 쟤가· 아무리 그래도 사람 면전에 삿대질하며 막말하고· 내 그리 안 봤는데·”
팽초려가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모두의 언니 팽초려에게 평판이 아주 팍팍 까여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모용주희가 땡깡을 부렸다·
그때 청이 엣헴엣헴 헛기침하니 점차 목소리의 음역대가 내려가고 있던 팽대산이 눈을 번뜩였다·
“흠· 생각해 보니 모용 소저의 말이 맞는 것도 같군요· 더러운 점은 마음에 든다만 키도 멀대같이 크기만 하고· 밤일 말고는 영 마음에 차는 구석이 없으니· 하!”
그러며 팽대산이 팔을 뿌리치니 팽초려가 혼신의 열연으로 나동그라져 바닥에 철푸덕 가련하게 쏟아졌다·
“고 공자님? 어찌 평생 아껴주시겠다 약조하시지 않으셨나요·”
“주제를 알아야지· 천한 계집년이 감히 대 하북팽가에 발을 들일 줄 알았나·”
”어찌 저를 흐윽· 볼일 다 보았으니 이제 필요 없으시다는 겁니까· 간밤에 제 몸을 그리 짐승같이 가지고 노시고는 어찌·”
“본래 사내가 그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거지꼴이 취향이면 예쁜 계집에게 입히면 그만인 것을 굳이 진짜 거지년과 어울릴 이유가 없지 않나· 게다가 그 추한 면상을 하고서는 덕분에 아침도 걸렀으니 그 역겨운 얼굴 가린 채로 썩 꺼져라·”
“그! 역시! 알겠습니다! 이까짓 소매 자! 다 뜯었습니다!”
팽초려가 돌면 제 어깨죽지를 잡아 북 찢어내니 붙은 근육이 부위별로 선명하기 이를 데 없는 팽초려의 우람한 팔근육이 드러났다·
“소매 없는 옷이 어여쁘다 하셨는데 소녀가 부끄러워 차마 따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하 세상 사람 절반이 여인인데 네까짓 것이 차려입는다고 뭐라고 되겠나· 됐으니 썩 꺼져라· 빨리·”
그러자 팽초려가 우는 연기 열연을 펼치며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경로에 있던 여인들이 근육 단단히 들어찬 어깨빵에 맞아 거의 부웅 날아 나가떨어졌다·
꽃거지의 기병 돌격 같은 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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