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9
“이야 오랜만에 동생이랑 산책도 하고· 평소에도 종종 이러면 안 되겠니? 키워준 정도 있는데 좀 먼저 팔짱도 착 걸고 그래야지·”
도시 밖에 나갔다가 준비시킨 마차 타고 돌아온 팽초려는 아주 만족한 표정이었다·
팽초려에게 팽대산이란 동생 이상 자식 미만 중에서도 아들 쪽으로 좀 많이 쏠린 업둥이 동생이었다·
“초려 괜찮아요?”
“그럼· 딱딱하기 그지없는 내 동생 처음으로 팔짱 끼고 거닐어 봤는데· 장성한 우리 대산이를 이제는 보내도 되겠어· 언제 이리 커서 무뚝뚝하니 귀엽지도 않게 되었는지· 음· 어릴 때도 딱히 귀엽진 않았긴 하지만·”
팽초려가 진심 섞인 농담으로 팽대산의 눈썹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부 사실이라 반박할 만한 염치는 없었으니 눈썹만 까닥거리고 말았다·
태도가 딱딱한가 처음으로 팔짱을 끼었는가 무뚝뚝하니 귀염성이 없는가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는가 모든 항목이 거짓 없는 참이었기에·
“산 너도 초려께 좀 잘 해드려· 세상에 이런 누나가 또 어디에 있어?”
“역시 우리 청아밖에 없구나· 이런 아가 아니 제매를 들여야 하는데· 차라리 청아가 내 동생 하지 않으련?”
제매란 중원에서 여인이 남동생의 부인을 부르는 격식 있는 호칭으로 친한 경우에는 그냥 동생이라 불렀다·
은근슬쩍 가족으로 끼워 붙이는 팽초려의 수작이었지만 어차피 청은 이런 여인들의 미묘한 관계 정립에는 영 무지했다·
여인들의 무서움이 바로 이런 것이다·
팽초려는 이제부터 슬쩍 동생이라 호칭을 바꿔 부르다가 끝내는 공식 석상에서까지 그러할 것이니 남들 다 보고 듣도록 동생과 엮어버리려는 수작질인 것이다·
불편해진 팽대산이 화제를 돌렸다·
“크흠 어쨌든 오늘 밤에 개봉으로 떠날 생각이다·”
“밤에? 언제?”
“축시쯤 나설 예정이다만·”
축시면 청에게는 새벽 두 시다·
십이시진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열두 간지에 시간을 붙인 것이니 첫 번째인 자시의 정중앙을 줄여 자정이라 하고 이후 두 시간씩 붙이니 그리 어렵지 않다·
참고로 정오 역시 오시의 정중앙이라는 뜻이지만 왜 앞뒤가 뒤바뀌었는지는 음양의 이치 어쩌구 결국 쓸데없이 통일만 해쳤으니 중화의 수준이 이러한 것이라고·
“오잉 축시? 무슨 오밤중에 출발을 해?”
“더는 저 거지들 꼴 보기가 싫어서· 어째 점점 정나미가 더 떨어지는군·”
“하긴· 항상 고생이 많네· 그러면 개봉에서나 보겠네· 제갈이랑 난아 알지? 멀쩡히 잘 지내고 있다고 안부나 좀 전해 주라·”
그에 팽대산이 눈썹을 까딱·
“무슨 소리지? 너는 안 갈 셈인가?”
“나? 나는 그냥 천천히 쉬다 가려구 했는데· 나도 가는 거였어? 그럼 또 누구랑 같이 가는데?”
“그야·”
말을 잇던 팽대산이 움찔했다·
그야 당연히 둘이 가지 누구랑 가겠느냐 말하려다 입으로 내려고 보니 영 이상한 소리가 되는 것이다·
“초려 초려도 같이 가요?”
“나? 같이 가면 좋겠지만 자식 하나는 남아서 손님들 모셔야 할 것 아니니· 자식 둘이 전부 홀랑 내빼버리면 모용에 조가가 어찌 생각하겠니· 자식들끼리 어울리는 꼴 보기 싫어서 보냈다고 흉이나 볼 텐데·”
“엥· 그럼 둘이 가? 산 그런 거야?”
팽대산은 심각한 불합리함을 느꼈다·
청은 무슨 동성의 가족을 대하듯이 아무 허물이 없으니 심지어 간밤에는 그저 뒤로 돌라 하고는 옷가지 훌훌 벗어 던지고 몸을 닦아내던 년이 아니었나·
그것도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해가면서·
그런데 정작 자신이 이야기를 꺼내니 뭐 그럼 둘이 가느냐 이딴 소리를 한다·
그냥 자기 형편 좋을 때만 여인 하기로 했단 말인가·
“왜 그러지? 뭐 문제라도 있나?”
“아니 내일이나 모래 쯤이면 모르겠는데 갑자기 오늘이라니까 그렇지· 내일 가면 안 돼? 아 축시도 자정 지났으니 내일이라던지 그딴 소리는 하지 말고·”
물론 청은 별생각이 없다·
굳이 넉넉한 일정 앞두고 서두르고 싶지 않았을 뿐·
그에 팽대산도 맥이 탁 풀렸다·
그냥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뿐인가·
그런데 또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이글이글·
“어차피 뒹구는 것 말고 하는 일도 없지 않나·”
“아니 아준이네 한 번 놀러갈까 했지·”
“아준? 그건 또 누구지?”
“아· 모용준이라구 요만한 꼬맹이 있어· 놀려줄 거리 있을 때 놀려야지”
청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팽대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더 지체했다간 누군가 더 귀찮게 굴지 모르겠어서 안 되겠군· 당장 검화 그 여자에 조 형에 그 동생도 있고· 나는 갈 테니 따라오든지 아니면 친구 버리고 그 모용가 꼬맹이한테 놀러 갈 건지 결정하도록·”
“엥· 뭐야 그 양자택일은· 그렇게 안 봤는데 산이 너 은근히 유치한 구석이 음? 아냐 원래부터 완전 유치했어· 맞네·”
생각해보니 그냥 말이 짧고 무게나 잡을 뿐이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주 대놓고 유치한 놈이 아니었나·
때려봐 때려봐 때릴 수 있나 하고 아주 맞으려고 용을 쓰길래 한 방 먹여주었으니·
“뭐 유치? 뚫린 입이라고 그딴 망발을·”
“원래 찔리는 사람이 버럭하는 법이거든? 하아· 어쩌겠니· 나 말고 친구 없는 우리 산이 내가 같이 가줘야지· 아준이는 친구 많을 것 같으니까 나 아니라도 뭐·”
“하 친구가 없다니· 내가 말인가?”
“그럼· 친구 누구 있는데? 이름 대봐봐·”
“흥 대라면 못 댈 것 같은가· 일단·”
팽대산이 멈칫했다·
일단 뭐?
검치 놈? 싫다· 제갈가 떠버리는 붙임성이 좋아서 누구라도 형님 누님 달라붙을 뿐 딱히 개인적인 교분은 없다·
조 형은 끔찍하고· 창빈 형님이나 황보 형님은 친구라고 하기엔 형님이시고·
그 외에 잠룡지회 후기지수들과도 그저 만나서 밥이나 먹는 사이지 격의 없이 친구라고 부를 놈이 없는 것이다·
내가 친구가 없었나?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팽대산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봐· 서문청 님 한 분뿐이시지·”
“큭 그럼 너야말로 친구가-”
“뭐 이름 대 볼까? 감당할 수 있겠어?”
청이 한쪽 입술만 삐뚜름하게 끌어올려 얄밉기 그지없는 삐뚠 미소를 지었다·
“됐다· 나 혼자 갈 테니 그 좋은 친구들이나 실컷 만나고 오도록”
“뭐야 삐짐?”
“하· 말을 말지·”
청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요 짜식 진짜 삐졌네·
“에이 뭐야· 산· 사나이 서문청 의리를 그리 저버리지 않거든? 친구가 외로운 길 떠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냐구·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서운해가지구는·”
“서운한 적 없다·”
“요거요거 정말로? 정말 안 서운했어? 이 친구가 같이 안 가준다고 서운했던 거 아냐?”
청이 팽대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러내며 물었다·
그러고 나면 또 팽대산이 버럭·
“아니 좀! 여인이 어찌 이리 허물없이 대체 상식을 좀 갖추지 못하겠나?”
“에이 친구끼리 뭐 어때?”
둘이 투닥대는 모습에 팽초려가 웃음을 머금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떠났다·
—-
중원의 무림세가는 그 성씨만큼이나 다양하니 본래 지방에서 방귀깨나 뀌는 호족들이 더 멋진 이름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개중 가장 유명한 다섯이 바로 오대세가 그리고 구파일방과 숫자 맞춘다고 다섯을 더 꼽아 십대세가가 존재했다·
개중에 진주언가가 있었으나 더는 없다·
(언연영의 의견도 들어봐야겠지만)
공석이 하나 생겼으니 채워야 하고 우리가 오대세가만큼은 아니어도 추가 다섯 개 정도면 우리도 비빌만 하다 자부하던 지방 유력 가문에게는 이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개중에 아주 특이한 성씨를 가진 가문이 하나 있었다·
공손공가·
공손씨는 인류 최초의 황제 겸 중화의 가장 위대한 현인신께서 가진 성이며 이 가문은 그 위대하신 태초조 공손헌원 황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기에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는 역모와 관련될 수 있는 주장이기도 하니 결국 저 먼 옛날에 크게 한 번 조져지고 난 이후 강제로 성을 갈아야 했으니 공손에서 손 떼고 공씨만 남았다·
그래도 가문의 정체성 공손을 포기하지 못했으니 모든 가문 구성원의 이름자 첫 자 돌림자를 손으로 그리고 이름은 세 글자로 짓는 독특한 편법을 사용했다·
그렇게 어쨌거나 공손을 유지했으니 공손공가라 칭하는 이름에는 그러한 아픔과 또 가문의 버릴 수 없는 정체성에 대한 절개가 녹아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 가주 공손대월 공씨 가문의 손대월이 말했다·
“드디어 가문의 숙원이 눈앞에 다가왔다· 관이 허수아비이니 십대세가에 이름을 올려 하나로 엮이고 나면 위대하신 초대의 성씨로 원복해도 그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이냐·”
중원 십대세가는 그저 위로부터 줄 세워 열 개의 가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 나 우리 하나로 똘똘 뭉친 인맥 그야말로 지상 천하 최대의 창대한 꽌시였다·
그 울타리에 힘입어 공씨를 다시 공손씨로 바꾸겠다는 숙원이자 야망이었다·
“그를 위해서 너희 역할이 중요하다· 잠룡비무회에서 압도적인 면모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또 십대세가 아니 십대가 이를 말이더냐· 오대세가 혹은 구파일방의 유력한 여인과 맺어 가문의 편을 확보해야 해·”
“예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그래 너희를 믿겠다·”
—-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냥 마차 타고 나가면 안 되나?”
하인처럼 차려입은 청이 말했다·
마찬가지로 하인 복장을 한 팽대산이 대답했다·
“저 지독한 작자들을 너무 무시하는군·”
그렇게 야심한 밤 축시가 좀 넘은 시간 야음을 틈타 장원도문의 쪽문으로 한 남녀가 슬쩍 빠져나왔다·
얼굴 푹 숙여 땅만 쳐다보며 종종걸음을 하는 것이 누가 봐도 하인들이다·
그렇게 슥 스치며 슬그머니 거기를 살핀 청이 팽대산의 말을 이해했다·
와 진짜· 독한 년들·
이를테면 이러했다·
야심한 달밤·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아 밤거리를 거닐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
밤은 요물이니 밝던 태양 아래와 다르게 어둠 아래에 숨겨왔던 내밀한 욕망이 고개를 내민다·(새벽 세 시의 문자라던가)
그리하여 달빛에 취한 남녀가 어둠 속에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눈 맞추고 입 맞추고 그러면 남은 신체 부위는 배뿐이니 배도 좀 맞춰 보고···
사실 보다 영리한 여인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대낮에 우르르 몰려다녀봐야 갑을병정 무수한 꽃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밤중에 마주하면 한 명의 여인으로 오롯이 남을 수 있었으니·
그러한 순정하다 못해 뇌까지 순정한 상상력으로 야심한 밤 내내 정문 앞을 서성거리니 밤낮으로 옥기린에게 자유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방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 청이 고급지고 푹신한 의자 위로 폭 쓰러져 등을 파묻었다·
“차라리 귀찮으면 나처럼 면사를 쓰는 게 어때? 우리 할아범이 온갖 놈팽이들 다 달라붙는다며 구해준 건데·”
“사내가 무슨 면사를 쓰나·”
“그 삿갓이라도 좀 푹 눌러쓰고· 하관만 보여도 알아보나?”
“하·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굳이 피할 이유가 무엇이라고· 네가 보기에 내가 언제 저 작자들을 꺼려 피한 적이 있던가?”
낙양길 상단에 붙어 갈 때도 검우와 셋이 여행할 때도 딱히 옥기린이 추적자들 피해 숨은 적은 없었다·
밥 먹을 때 굳이 독실을 잡지 않고 어디 갈 적에 핑계로 가지 않은 적은 없었으니·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응? 그럼 지금은? 피한 거 아냐?”
“음?”
팽대산이 또 눈썹을 까닥거렸다·
그러나 이번 눈썹의 움직임은 나 심기 불편함의 뜻이 아니라 어라 하는 의미였다·
“그건·”
팽대산이 변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피한 것이 맞았다·
그래서 혼란에 빠졌다·
내가 왜 이 오밤중에 떳떳하지 않은 사람처럼 몰래 빠져나왔단 말인가·
어차피 저 작자들이 하루이틀 저러는 꼴이 아닌데 유난히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어 이러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으니 답답한 속만 간질간질할 수밖에는·
그러다가 고로롱· 쌔액·
어쩐지 익숙한 코골이 소리 세가에서 기르는 흑구가 잘 때면 내고는 하는 귀여운 소리에 팽대산이 궁리에서 깨어났다·
마차 의자에 누운 채로 그대로 잠에 빠진 청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이 무슨·”
팽대산이 잠든 미인의 자태에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한 손은 팔뚝으로 눈가에 척 올리고 다른 손은 의자 밖으로 빠져 늘어졌다·
그런가 하면 다리 한 짝 높이 접어 무릎 옆을 등받이에 척 올려 기대고 다른 다리는 의자 밖으로 빠져 바닥에 발바닥을 붙인 상태였다·
서문수린이 보면 극대노 응징의 핵폭격을 가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추태였던 것·
기가 막히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더니 꼭 청의 앞에서는 그러한 일이 잦았다·
“하아·”
말문 막힌 팽대산이 그냥 한숨이나 푸욱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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