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7
어느 문화권이건 지배층은 저들만의 작은 사회를 구성한다·
이 작은 사회가 하는 일이란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라 청의 고향 식으로 표현하다면 바로 이러했다·
사다리 차기·
손에 꽉 붙든 권력을 저들끼리 천년만년 누리기 위한 동맹이기 때문이다·
용봉지회 역시 그러한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잘난 집 젊은이들끼리 친목을 다져 너와 나 우리로 함께하는 최고의 인맥 양성소가 아니던가·
그러니 당연히 용봉지회에는 아무나 참석할 수 없다·
괜히 십대세가 구대문파 제자들을 알아서 모셔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아니니 공짜가 아니라 개중 용봉지회 참가비 역시 상당히 큰 지분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같이 대연회를 여는 날이 바로 그 빚을 갚는 날이었다·
칠 층 누각을 통째로 빌렸음에도 인파가 제법 몰렸다·
물론 중원 연회 문화에 사람이 자리에 서서 떠드는 경우는 없으므로 넉넉하게 좌석을 마련하기 위함이기는 하다·
중원은 입식 문화권이기 때문에 사람은 바닥에 앉지 말고 의자를 끌어다 탁상 앞에 앉아야 하는 것이다·
“와 사람 많다·”
“흥· 어중이 떠중이들이지· 어차피 일 층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뿐이니까·”
“난아야· 말 좀 이쁘게 하지 않으련?”
당난아는 해어독화 빼어난 미인임과 동시에 사천의 지배자 당가의 여식이다·
당연히 누각에 들자마자 시선 집중 모든 관심을 끄는 상태에서 하는 소리였다·
“됐구· 자자 청아야 올라가자·”
당난아가 팔짱을 낀 채 청을 잡아끌었다·
청이 그에 못 이기는 척 사뿐사뿐 우아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랐다·
이 층으로 올라가니 당난아에게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누가 정해주지는 않았지만 이 층 삼 층에 있는 청춘들은 그래도 지방에서는 이름 알려진 무림방파의 젊은이들이다·
그리고 사 층부터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 방파들의 청춘이 자리를 잡았다·
진짜 용봉지회는 여기서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층을 오르고 나니 이제야 아는 얼굴이 좀 비쳤다·
“오 검우! 검우가 아닌가!”
“남궁 공자님· 오랜만이지요? 물론 어제 뵈었지만 그래도 잠시 인사만 나누었을 뿐이니 제대로 뵈어 회포를 푸는 날이 오늘이라 해야겠지요·”
“음? 검우가 아닌가?”
“이런 여인다운 재주도 있어서 안 하면 까먹을 것 같아 가끔씩 꺼낸답니다· 어색하신가요?”
“사람 참· 얼굴 가리고 있으니 아주 다른 이라고 해도 믿겠네· 제대로 여인인 척을 할 줄도 알았을 줄이야· 음 맞나? 검우라면 다른 사람 보내서 제 흉내 내라고 할 법한 위인이기는 한데·”
“남궁 공자께선 혀를 놀리시면 전부 말씀이 되는 줄 알고 계시나요? 견공들에게도 혓바닥은 달려 있답니다?”
“믿겠다· 그대는 검우가 맞군·”
그에 청이 어깨를 떨며 검을 내밀었다·
남궁신재가 검집끼리 부딪치며 씨익 기분 좋은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응 그래 창빈이도 위에 있나?”
“아· 창빈 형은 오 층에· 여인들 피해서 올라간 모양인데·”
오 층은 청룡회가 그리고 보통 꼭대기는 봉황회가 쓰는 것이 보통이라고·
물론 딱 엄격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라서 천무대 인원들이라면 남녀 상관하지 않고 얼마든지 끼어들 수 있다고·
하지만 사내들 뿐인데 여인이 있는 것이 모양새가 영 좋지 않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라 특히 친분이 있거나 연인 사이거나 하지 않으면 끼어들기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물론 청에게는 쉽다·
청이 어쩐지 못마땅한 기색의 당난아를 끼고 계단을 오르니 면사를 쓴 머리만 빼꼼 튀어나와 오 층을 살폈다·
청이 저를 보는 사내들에게 검지 손가락 세워 입 앞에 가져다 대니 다들 순순히 못 본 척을 해 준다·
그리고 좌중에 떠드는 큰 목소리·
“하 그래서 자네가 여인이 없는 걸세· 여인은 말이야 그래 여심이란 말이야 모름지기 미꾸라지와 같은 것이니 살살 쥐어 들려고 하면 고대로 싹 빠져나가 버린단 말일세· 아주 꽉! 아주 꽉꽉 쥐어야 손아귀에 딱 잡혀있는 거란 말이네 알겠나?”
“오오 역시 창빈 형님· 그러면 양 소저께 제가 더 밀어붙여야 한다는 말이시죠?”
“그럼· 사내가 밀면 여인이란 어떻게든 마음의 문을 여는 법이라니까· 손목을 딱 쥐고 갑시다! 호반이건 정원이건 한적하니 분위기 아름다운 데에 가서!”
청이 아예 검지를 세워 앞세우고 살금살금 사뿐사뿐 창빈에게 향했다·
그러자 다들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모른 척을 해줄 뿐이었다·
등뒤에서 다가오는 여인도 모르고 창빈이 제 말에 취해 떠들어댔다·
“딱 어깨를 붙들고 사내답게 말하란 말일세· 소저 부디 내 아-”
“어머 창빈 도장님이 아니세요? 세상에 여심에 통달하여 눈빛만으로 여인들이 반해 쓰러지곤 한다는 살아있는 전설이신 도사님이 아니시어요?”
“음·”
“자자· 이러지 마시고· 이렇게 만나뵈었으니 소녀가 한 잔 따라 올리겠어요·”
“그 예 감사···”
“자· 쭉 들이키셔요· 와 호방하기도 하셔라· 얘 난아야 뭐 하고 있니? 남중남 화산쾌남 여심살육자 창빈 도장님의 오른쪽과 잔이 비지 않았니· 둘 다 채워드려·”
“어? 내가?”
“어서·”
“어 응····”
당난아가 쪼르르 창빈의 오른쪽에 앉아 어설픈 모양새로 술을 따랐다·
천하의 당난아가 술을 얼마나 따라 보았겠는가·
좌청 우난아 양손의 꽃에 손바닥을 뚫린 불쌍한 창빈 도사가 양쪽에 담 걸린 사람처럼 똑바로 앞만 쳐다보았다·
“그래서 그 말씀 뒷부분이 어떤 것이였나요? 여심을 녹이는 그 도술 같은 고백을 소녀에게도 들려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부디 내 아· 다음은 어찌 되는지 궁금하기도 하여라·”
“그게··· 아이 아이를 아니 그러니까··· 어머니 어머니가·”
“어머님? 자당께서요? 자당께서 한번 보자고 하신다? 확실히 여심을 녹이는 두려운 말씀이시긴 한데·”
“그게 아니라···”
“그런데 도사님 소녀를 모르시겠어요? 아아· 섭섭하기도 하여라· 역시 여심살육자 창빈 도장께는 한 때에 스친 지나간 여인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청이 시무룩한 목소리를 내자 창빈이 아예 진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좌중에 킥킥 웃음소리도 번져나갔다·
“그 소저는 죄송···· 기억이···”
“언제까지고 늘 화산의 매화를 함께 보자고 하시고서는 어찌 그리 매정하게 잊으실 수가 있으시단 말이여요· 저희가 함께했던 그 시간들을 정녕 잊으셨단 말씀이셔요?”
“아니···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그 존함을 좀···”
“소녀 서문청이라 하옵니다· 창빈 도사님 이제 기억이 좀 나시나요?”
“어엇· 서문 소저? 아 목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다 싶더니만···· 그 잘 잘 지내셨소읍니까?”
“잘 지냈지 뭐· 아 참고로 오른편에 계신 소저께서는 사천당가의 해어독화 당난아 소저야· 난아야 이분이 바로 중원 제일의 여심 전문가 창빈 도장이시란다·”
“이 사람이? 여심? 뭐 당난아에요·”
당난아가 이름을 밝히자 청이 속으로 박자를 셌다·
하나 둘 “해어독화!” “해어독화!” “해어독화!”
그렇지! 이제 좀 돌아가는 꼴을 알겠어·
사실 이 의미없어 보이는 별호 복창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스며있는 것이다·
“그 창빈입니다···”
창빈이 겨우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한 성량으로 말하여 목각인형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숙였다 폈다·
그간 억지로 웃음 참으며 지켜보던 맞은편 도사 하나가 결국 하하 웃음을 터뜨리곤 청을 보며 물었다·
“아니 창빈 형· 진정 여인이 있으셨단 말이오? 지금까지 어찌 소개 한 번을 해 주지 않으시고· 소저 무당의 환육이라 합니다· 창빈 형이 부끄러워 말을 잇지 못하는데 실례가 아니라면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아· 신녀문 외문제자 서문청이라 한답니다· 그리고 제 스승님은 서문수린 도고님이 되신답니다· 음 그래요· 배분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러자 우당탕탕 끼익끼익 의자 넘어지고 끄는 소리가 일시에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무당의 환육이 어르신을 뵙습니다·”
“청성의 전승이 어르신을 뵙습니다·”
“종남의 필무가 어르신을 뵙습니다·”
“종남의 필령이 어르신을 뵈어요·”
“공동의 면악이 어르신을 뵙습니다·”
······
···
···
아무래도 여인 대하기 껄끄러운 도가의 제자들이 오 층에 몰려있었던 모양·
청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에이 다소 배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소녀가 올해 방년을 이룬 어린 계집에 불과하니 너무 예의를 차리실 필요는 없답니다· 과례는 비례라고 하였으니 오히려 제가 과분하여 불편할 정도에요·”
“그 예 어르신·”
“내가 그리 나이 들어 보여요? 어르신이라니?”
“예 선배님·”
캬 이 맛에 선배 짓하는구나·
도대체 왜 상륙 전문 부대 출신들이 그렇게 티를 못 내서 안달인가 했더니·
“서문 소저? 그 올해 방년이었셨니까?”
“검우? 방년이라고?”
남궁신재가 깜짝 놀라 끼어들었다·
하지만 청이 윤허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냥 무시하고 창빈이나 계속 놀렸다·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여전히 존대를 헷갈리시네? 에이 편하게 해 배분 떠나서 친구잖아 친구?”
“이런 자리에서 제가 어떻게 편하게···”
“아이 참· 창빈아 자꾸 이럴래?”
“음· 알겠습 아니 그렇게 하겠다·”
“그래· 잘 지냈니? 아까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여전한가 보네· 그래서 뭐였어? 그 여심을 한방에 녹이는 위대한 고백은·”
“내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달라고···”
“으음· 난아야 이 고백 어떤 것 같아? 네가 들으면?”
청이 진짜 여인인 당난아에게 감상을 구했다·
당난아의 평가는 신랄했다·
“완전 바보 같아· 애 딸린 사내가 후처라도 구하는 것 같잖아·”
꽤 괜찮지 않나 싶었는데 현지인의 반응으로는 영 아니었던 모양이다·
“창빈아 그렇다잖니?”
“그럼 내 아이를 낳아주시오는····”
그래도 같이 여행한 사이라고 작은 목소리기는 하지만 말문은 텄다·
아주 놀라운 광경이라 어르신 앞에 두고 불편한 도가 식구들조차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창빈을 바라보았다·
“음· 아이는 좀 애매한 걸· 아직도 정실인지 후처인지 애매하니까·”
“그쪽에 유난히 신경을 쓰는구나?”
“그야 어차피 내가 혼약을 맺으면 데릴사위로 들어올 테니까· 그게 아니라 만약 시댁으로 간다 치면은 본부인 아니면 절대 안 되지·”
그러자 남궁신재가 다시 끼어들었다·
“당 소저 기왕 여인의 평가를 듣는 기회라면 나 역시 흉중에 품은 것이 있다오· 이런 고백은 어떻소? 내 그대와 죽을 때까지 검을 나누고 싶소· 크으 명문이로군·”
그러자 당난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아니 죽을 때까지 검을 나누면 그냥 생사결 아냐? 무슨 원수 구해요?”
“이런이런 이래서 검객 아닌 이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니까·”
“뭐에욧? 그럼 왜 물어봤어요?”
“그렇군· 내 잘못이오· 미안하오· 내 여류 검객에게 물어봤어야 하는데· 검우는 어떻게 생각하는 아 그래 그것보다 검우가 올해 방년이라고?”
이 자식 은근 나이에 민감한 유형이었나?
청이 생긋 웃으며 상냥한 어투로 대답해주었다·
“말씀을 잘 고르시는 것이 어떨까요? 혹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이라도 할 거면·”
“아니 그렇게 경우없는 놈은 아니오· 흠· 하긴 검정에 년치가 무슨 상관인가· 검우는 이 고백이 어찌 들리오? 죽을 때까지 검을-”
“처음엔 괜찮지 않나 싶었는데 난아의 말을 듣고 나니 이제는 생사결이라고밖에는 생각이 안 돼· 둘 중 하나 죽을 때까지 싸우면 생사결 맞잖아?”
“확실히 듣고 나니 아차 싶기는 했다오· 그러면 음 그래 평생 평생 검을 나누고 싶다· 오· 이 또한 명문이로군· 당 소저 이번엔 어떻소? 회심의 고백이오·”
“생사결보단 나아지긴 했네· 그런데 그거 꼭 검을 나눠야 해요? 검이 무슨 정표라도 되나? 검을 나누게?”
정표란 한때 유행했던 것으로 한 장식을 조각으로 나누어 서로 간직하는 것이었다·
연인끼리도 쓰고 몰래 첩을 들여 두 집 살림 차린 사내들이 사생아에게 선물하는 용도로도 많이 사용했다·
그러자 검우가 한술 더 떴다·
“오· 그것도 좋은 생각이오· 검을 나눠서 언약의 정표로 삼으면··· 음 안 되겠군 검을 나누면 반검이 되고 말지 않나·”
“확실히 반검은 중대 사항이니· 게다가 검을 쪼개면 절대 승리할 수 없으니까·”
청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층 왔고 육 층은 쉬는 장소라고 한다·
칠 층에는 사내들 껄덕질에 지친 여인들 봉황회 회원들이 모이는 장소라고·
기왕 왔으니 쭉 한 번 훑어보자 싶기도 했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해어백합이 무슨 옷을 입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다·
어제 잠깐 보았을 때에 그 의상이 너무나 바람직하여 보기에 좋았더란다·
어제는 공손요예에게 볼일이 있었기에 자세히 못 봤다·
음 오늘도 냅다 파인 옷 입었겠지?
청이 두근두근 기대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척척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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