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6
미안하지는 않지만 좀 안쓰럽기는 하다·
씁쓸한 술의 뒷맛을 느끼며 청이 공손요예 챙겨 숙소에나 돌아가야지 하고 등을 돌릴 때였다·
“가가 언니!”
“앗! 향이 아니니?”
쪼끄만 것이 우다다 튀어나와 청을 와락 끌어안는데 아이의 머리가 윗배쯤을 꼬옥 누르며 부비는 듯한 감촉이었다·
눈으로 보이진 않았으니 기분만 들었다·
청에게 보이지 않으니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가가 언니가 안 보여요····”
“향아· 너무 가까우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단다· 한발 물러나 보겠니?”
제갈향이 한발 물러서자 아이의 얼굴이 쓱 드러났다·
“우리 향이가 오늘은 더더욱 어여쁘다 싶더니 화장을 했구나? 그런데 화장하기 싫었으면 말을 해야지 도복에다가 닦아내면 쓰니·”
“헙·”
“이런 번져버렸네·”
중원의 화장이란 여기서 또 또 또 고금제일미녀 서시의 이름이 튀어나오고 만다·
서시의 찡그린 얼굴은 중원인의 성벽으로 굳어졌으니 바로 슬퍼하는 얼굴에 환장하는 기묘한 성벽이었다·
그리하여 창백한 얼굴에 눈가를 붉은색으로 은은하게 칠해 울고 난 여인의 달아오른 색을 연출했다·
그 외에 눈썹이나 입술은 화장하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눈썹의 시작 부분을 이마 쪽으로 살짝 그려 찡그린 듯한 모양을 만들거나 입술은 딱 앵두 모양으로 가운데 부분만 붉게 칠하거나 하는 식이었다·
제갈향의 눈가가 벌겋게 좌우로 쭈욱 번졌으니 도복의 윗배쯤에 선을 그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흰 분가루는 아마 덤일 테고·
청이 잘못하고 난 후에 안절부절하는 표정이 된 제갈향을 보며 맑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같이 웃음이 번진 아이가 양 팔을 벌려 번쩍 들었다·
“가가 언니 안아주세요·”
“아유 예쁘기도 하지·”
청이 아이를 안아들고 주변을 훑었다·
제갈향이 혼자 있지는 않았을 테니 아· 저기 오네·
“누님 죄송합니다· 향아가 유달리 누님을 잘 따르는군요· 안 그래도 보고 싶다고 난리를 치더니만 이렇습니다· 향아야 이런 자리에서 누님께 어리광을 부리면 안 돼·”
“아냐아냐· 괜찮아· 안 그래도 아까 향이가 보고 싶었는데 음? 어쩌다 보고 싶었더라? 뭐· 어쨌든· 보고 싶었는데 여기에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안 그러니?”
“맞아요!”
“그나저나 이 무슨 난리랍니까?”
“그러게· 이 무슨 난리인지·”
당사자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청이 기획한 것이 아니었으니 칠층에서 술 퍼먹다가 계략에 빠져 어울려 주었을 뿐이었다·
“언니언니 저 복숭아 먹고 싶어요·”
“이젠 아예 아랫것 부리듯이 하는구나? 이게 귀엽지만 않았으면 진짜· 어디 복숭아 찾으러 가 볼까?”
일 층은 식탁을 다 치워버렸기에 복숭아 찾으려면 위로 올라가야 했다·
청이 계단을 오르는데 아까 칠 층의 또 다른 미인 한 명이 또각또각 내려와 청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슥 스쳐 지나갔다·
아까와는 다른 점이라면 청에게는 지금 제갈씨가 둘이나 붙어있다는 것이었다·
“방금 지나간 미인분은 누구셔? 뭐랄까 예쁘시네? 음· 예뻐·”
“빙설화 설이리 소저를 말씀하십니까?”
“아· 네 글자 아니어도 되는구나?”
“붙여봐야 한빙이나 냉빙이 될 텐데 영 어감이 살지 않으니까요· 빙궁의 손님으로 오 년쯤 무림맹에 머무르고 계시는 중입니다·”
“으음· 친해질 방법이 없으려나·”
“아무리 인간의 친구인 개 같은 친화력을 지니신 누님이라도 설화와 친해지기는 어려우실 겁니다· 오 년 동안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으니 그저 홀로 있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음· 그런 사람도 있나· 그런데 제갈아· 개는 인간의 친구지· 그리고 개는 또 사람을 문단다· 내가 정녕 개 같이 굴어야겠니? 이게 점점 기어오르네?”
“하하· 누님· 양팔이 봉인된 상태가 아니십니까· 이럴 때 까불지 않으면 언제 컥·”
정확히 꼬리뼈를 콱 찍힌 제갈이현이 제 궁둥짝 위를 문지르며 쿠웅쿠웅 뛰었다·
청보다 한 뼘은 커다란 거인이 풀쩍거리니 계단이 진동하며 흔들리는 수준이었다·
그 꼴에 제갈향이 좋다고 깔깔 웃었다·
청이 쭉 뻗은 다리의 무릎을 척 접고 다시 계단을 두 발로 서며 말했다·
“날 봉인하려거든 향이를 두 명 더 데려오도록· 양쪽 다리에 한 명씩 매달아 두면 그때는 진정 봉인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끄응· 향이만큼 귀여운 아이는 세상에 더 없단 말입니다·”
“그럼· 봉인도 글러 먹은 거지 뭐·”
“어찌 걷어차도 정확히 미추를 걷어차신단 말입니까· 아무리 저라 해도 뼈를 때리시면 아픕니다·”
“어차피 엉덩이도 근육으로 꽉 차 있는 거 아닌가? 걷어차 봐야 나만 손해지·”
“그야 음· 근육이라· 맞다· 그때 방문하셨던 말에 말입니다· 혹시 국사무쌍 수련장에···”
그때였다·
계단을 다 오르자마자 아는 척을 하는 이가 있어서 제갈이현의 말이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오! 이게 누구신가! 술 대결의 명예로운 승자분이시군! 하핫 잘 보았습니다·”
“어 조 형·”
“오오· 소저께서 이미 저를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제가 바로 조 형 조학체라고 합니다·”
무림맹주의 증손자이자 흑룡조가의 후계자 그리고 천무단 단원들이 애정을 담아 부르기를 여자에 미친 새끼 조학체였다·
청이 순간 뜨끔했다·
생각해보니 얘 봤을 때 이 면사 그대로 쓰고 있지 않았나? 입을 막아야 하나?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
조학체가 본 꽃거지의 면사는 때가 잔뜩으로 더러워 밖에 보일까 싶은 하품 중의 하품으로 완전 지저분한 색의 누더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깨끗한 상태였다·
팽대산도 원래 그런 색이냐고 할 정도였으니 본래는 공주에게 진상해야 할 국보급 면사를 보고 어찌 둘을 잇겠는가·
“공자께서 잘못 아신 것 같네요· 술 대결은 제가 패배했답니다·”
“그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외려 보여주신 아량에 깊이 탄복하고 말았지요· 역시 여인은 누가 뭐라 해도 비단결 같은 마음씨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청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 자식 어째?
“제가 듣기로는 조 공자님이 여색을 제법 밝히신다 들었는데· 실례지만 혹시 연인으로 사귄 여인은 없지 않으신가요?”
“그렇습니다· 이 조학체 아직 연애하지 않은 사내이니 천생연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요· 그런데 그걸 물으신다 함은···”
“별 뜻은 없답니다· 그래 보여서요·”
그에 킥킥 웃음소리가 터졌다·
조학체의 바로 등 뒤에서였다·
“오빠 그따구로 말을 싸니까 욕을 들어처먹지· 여인한테 마음을 칭찬하는 병신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
“어· 그럼 안 되나?”
“왜· 못생겼다고 아예 지랄발광을 하지· 앗 죄송해요· 서문 소저 마음 상하시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어요···”
“아니 괜찮아요· 그런 쪽은 신경 안 쓰는지라·”
못생긴 사람에게 못생겼다고 해야 마음이 긁히는 법이었다·
청은 거울 보면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본인이 미인임을 알기 때문에 못생겼다는 말은 그냥 키득거리며 넘어갈 수 있었다·
“조영영이에요· 그 제가 칠층에 어제오늘 계속 있었는데요 말로 패시는 걸 보고 존경하기로 해서요· 그 괜찮겠죠?”
“그야 그건 소저의 뜻이겠지요?”
그에 조영영의 표정이 피었다·
사실 여인들의 말로 존경하기로 했다고 하면 너네 계파에 들어가고 싶다는 뜻이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너무 예뻐서 언니 하고 싶다 혹은 화장해주고 싶다 등등 뭔가 추켜세우며 곁에 있고 싶다는 뜻을 우회해 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이 알 리가 있나·
“존경이요? 물론 제가 존경스러운 면모가 한둘이 아니라서 말하자면 입이 아플 지경이지는 하지만 어제오늘 칠 층이면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진 않았을 터인데요·”
“아니요! 제가 본래 입이 좀 걸레를 물었다는 소리를 들어서요· 그게 흑룡강 사내들은 욕을 좀 처먹어야 말귀를 알아듣는 시늉이라도 좀 하는 병신들이라 어쩔 수 없는 그 변명이 아니라 진짜루요· 우리 쪽 여인들이 좀 이래요·”
“사실입니다· 누님· 흑룡강 여인들이 중원에서 가장 대가 쎈 것으로 유명한-”
“제갈이는 주석 끄고· 흑룡강 사내들이 조 형 같다면야 이해가 간답니다· 그래서요?”
“어제오늘 말로 조근조근 조져놓으시는 걸 봐서 상스런 말 안 써도 저렇게 되는구나 사실 말투가 이지랄이라 어디서 입을 못 열어요· 진짜 얼굴 팔려서 뒈져버릴 것 같아· 입에 걸레 문 년이라고 맨날 하석에 앉아서 말도 못 꺼내고·”
“음· 저도 사실 본래는 말씨가 곱지 못하답니다· 지금이야 사람들 계시니 이러하지 아니면 저도 한 가닥 한답니다?”
사실은 한 가닥이 아니다·
청은 중원 제일의 욕설 전문가였다·
당가의 태상장로마저 탄복시킨 무형지독 죽음의 혓바닥이 아니었던가·
“맞습니다! 누님의 요설은 이 우제마저 늘 새롭고 짜릿하여 모든 순간이 놀라움으로 절로 존경을 불러일으키니 과연 천하일절이라 하겠습니다·”
제갈이현이 호들갑을 떨며 동의했다·
청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 주셨지요· 음· 그래요· 신녀문에 한 계절만 머무르시면 이렇게 되실 수 있답니다· 만약 정말로 간절하시다면 스승님께 말씀을-”
“아! 제발요!”
“정 뜻이 그러하시다면요·”
청이 흡족하게 웃으며 미리 애도했다·
사부님 교육은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 좋은 걸 나만 당할 수 없지·
그러고 있으니 또 또 누가 다가와서는·
“서문 소저! 괜찮으십니까? 과음을 하신 것 같았는데요· 여기 석청을 좀 드시지요·”
“이런 지금 손이 없어서요·”
이번엔 공손천일 부담스러운 공손요예네 동생이었다·
그러자 서글하니 사람 좋던 조학체의 눈빛이 순간 사나운 야수처럼 돌아갔다·
음· 저게 그거구나·
일행에 여인만 있으면 모든 사내를 원수처럼 본다는 게·
공손 놈은 입만 열면 느끼한 소리를 하고 조학체가 그 때마다 이를 갈다가 순간순간 끼어들어 뻔한 소리나 하다가 조영영에게 욕을 얻어먹는 연속이었다·
여인 꼬시는 말에는 공손천일의 경지가 워낙에 높았으니 아예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가가 언니· 저 복숭아···”
“아· 그래· 누구들 때문에 깜빡했네· 그래 복숭아 찾으러 가자· 자아 복숭아가 어디에 있나아·”
“복숭아가 어디에 있나아·”
제갈향이 복숭아 찾는 청의 흥얼거림을 따라 불렀다·
얘는 왜 이렇게 귀엽지· 장난 아니네·
그렇게 제갈향과 놀아주고 있으니 뒤에는 사내 셋이 졸졸 쫓아다니고·
아씨 이 그림 대체 뭔데?
목소리가 정말로 아름답다느니 손이 참 아름답다느니 아이와 놀아주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느니 아니 조 형 이 자식은 뭐만 하면 다 아름답다고 난린데?
얼굴만 빼고 다 아름다워진 청이 조 형은 눈에 보이면 그냥 피해야겠다 다짐했다·
그에 비하면 속을 미리 보해야 숙취로 고생이 덜한다느니 복숭아 찾으니 꼬지에 딱 꽂아 제갈향에게 쥐여주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는 해도 이것저것 잘 챙겨주기 바쁜 공손네 동생이 낫기는 했다·
결국 버티다 못한 청이 제갈향에게 무천각 꼭대기에 놀러 오라며 다음을 기약하고 자리를 피했다·
세상 모르고 자는 공손요예를 그 동생이 업어서 마차까지 척 잡아 태웠다·
“누나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벽창호에 꽉 막혀 답답하고 또 고집은 세서 꺾이지도 않는 누나입니다만· 하아·”
미련한 병신년 하고 한숨 뒤에 숨은 웅얼거림이 청의 청력으로 붙잡혔다·
하지만 말은 그리 해도 눈빛으로 안타까움이 줄줄 새어 나오니 이러니 저러니 해도 누나 챙기는 남동생이었다·
그에 청이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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