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7
청이 지친 채로 무천각 숙소의 객실 문을 열자 당난아가 짠 나타나 제 얼굴 밑에 양손을 턱 받혔다·
“짠 청아를 위한 꽃송이!”
청이 그저 지친 표정으로 멀거니 그 주접을 바라보았다·
당난아가 살짝 민망하기도 하고 안 받아줘서 서운하기도 하여 하소연을 하려다가 청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선 곧장 언성을 높였다·
“청아야!? 얼굴이 왜 그래!? 울었어!?”
고문을 당할 때는 몸이 불었지만 끝나고 나니 얼굴이 퉁퉁 부었다·
울다 지칠 정도로 울어서 그렇다·
청이 지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런 거 아냐···”
“목소리는 또 왜 그래!?”
목소리도 완전히 쉬어버렸으니 쌔액쌔액 거의 바람 새는 소리와 비슷했다·
“아니야· 그런데 사부님께선···?”
“오늘은 친우네서 회포를 푸셔야겠다고 하셨는데?”
하긴 사부님도 친구분들 계실 테니 무림 대회라고 모처럼 모이는 때에나 한 번씩 얼굴 보고 그러시겠지·
어쩐지 당난아가 와 있다 했더니·
스승님이 자리 비우자 그 틈새를 노려서 찾아온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난아가 오늘 있던 일을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아 맞다· 오늘 대모님이 반검쌍도회를 지도해 주셨거든?”
“반검쌍도회는 또 무슨····”
“아 청아는 모르겠구나· 대모님이 열정 넘치는 것이 보기 좋으시다면서 그렇다면 작은 모임이라도 결성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시는 바람에 말야· 같이 정한 이름인데·”
남궁신재가 구검회를 밀자 공손요예가 수줍게 손을 들어 동조했다·
구검회 검을 갈고 닦는 모임이라고·
그러자 팽초려가 차라리 길 도를 써서 구도회로 하자면서 팽대산과 함께 주장했다·
말이 길 도를 쓰는 것이지 도객이 도를 밀면 그 속셈이 뻔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서로 언성을 높이다가 반검 주제에 쌍도 주제에 하고 한 사람이 박쥐처럼 하고 다닌 소리가 들통이 났다고·
그래서 결국 반검쌍도회로 결정이 나고 말았다·
쌍도반검회냐 반검쌍도회냐를 두고도 격렬한 논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흔히 칼을 말할 때 도검이라 하니 반검이 한 번 양보하라 주장한 것을 팽초려가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 역시 앞선 도가 한 번은 양보해야겠어’ 하고 받아들여 반검쌍도회로 결정이 되었다고·
“그게 뭔···· 자자···”
그러거나 말거나 청은 너무 지쳤다·
한걸음에 저고리가 두 걸음에 치마가 세 걸음 네 걸음에 아래위 속옷을 허물처럼 남겨놓고는 침상 위에 철퍼덕 엎어져 버리는 것이다·
“청아야? 똑바로 누워야지· 아무리 날이 따뜻해도 이불도 덮고·”
“해줘···”
당난아도 무인이라서 청 한 명 들어다 똑바로 눕혀놓는 일이 막 어렵고 품이 드는 일까지는 아니다·
다만 본래 사람이 누군가에게 부축받을 때는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돕기 마련이지만 청의 의식은 이미 아스라이 가라앉아 수면과 실신 어디쯤을 헤매는 중이었다·
완전히 퍼진 청이 축 늘어져 버린 통에 당난아가 밤중에 낑낑거리며 애를 쓰고 말았더란다·
—-
청이 문득 팔이 저려와 눈을 뜨니 아직 사위는 깜깜하여 한밤중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니 당난아가 청의 팔을 짓누른 채로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고 새근새근 아이 같은 숨소리를 불어넣고 있었다·
정체를 모를 때는 답답했는데 알고 나니 쌕쌕 귓가에 감기는 숨소리가 평온하니 참 듣기가 좋다·
어차피 인류 최강의 몸통에 당난아 하나 올려놓았다고 힘든 것도 아니다·
따뜻하게 감기는 온기는 너무 따뜻하고 두근 두근 천천히 뛰는 심장 박동이 전해져오니 어쩐지 너무 안심이 되어서·
적어도 이렇게 맞닿아 있는 때라면 갑자기 꿈이었습니다 따위의 결말이 나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얘는 분을 뭘 쓰는데 이렇게 고소한 향내가 나지? 아 우유 한 잔 따끈하게 데워서 후후 불어 마시고 싶다·
청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니 아주 상쾌하니 마치 어제의 일이 꿈이었던 것처럼 꿈이었던 것처럼··· 어제는 아으흐흐····
청이 몸서리를 치며 몸을 떨었다·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리고 뒷골이 당기는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걸 또 해야 해? 열 아홉 번?
차라리 이십 년 수련하는 게 낫지 않나?
청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당난아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청이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난아야· 잘 잤어?”
“어? 어?”
당난아가 멍청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불쌍한 당난아는 아침부터 눈을 뜨자마자 사근하니 반가움으로 환하게 밝은 미소를 지근거리에서 영접하고 만 것이다·
심장에 매우 해로운 장면이었다·
당난아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로 베개에 대가리를 처박았다·
“음? 왜 그래?”
“아니 아니야· 아니거든· 아니여야 해· 나는 아니니까·”
“얘는 아침부터 왜 이래?”
청의 인간 초월 청력에 당가는 데릴사위 가문을 위해 평생 일할 잘난 종놈이 필요하니 어쩌니 중얼거리는 단어들을 주워들다-
그러다가 사위? 하고 문득 깨닫기를 사위가 참 밝았다·
“아· 몇 시지? 난아야 나 간다! 스승님 기다리시겠다·”
청이 급히 옷을 꿰어 입고는 후다닥 방에서 뛰쳐나갔다·
천리비행 절세의 경공으로 욕탕에 문을 열어젖히니 이번에는 온갖 향긋한 향초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
목탕 아래 지핀 불에 부채질을 하던 천유학이 뚱하니 말을 던졌다·
“뭐야 점심 먹고 느즈막히 오라니까· 왜 벌써 왔어?”
“어· 그러셨어요? 어젠 거의 기절이라·”
“음· 안 했을 수도 있다· 나도 기절이라·”
그러고 나서 보니 천유학의 안색이 침침하니 완전히 피곤에 절은 낯이었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고작 탕약 한 사발 달이는 데에도 종일 지켜보며 불씨를 살펴야 하는데 욕탕 하나를 전부 달이려면 그게 보통 정성이겠냐?”
“음· 그건 감사하지만 그래도 보통은 별일 아니라고 하시지 않아요?”
“헹· 고생했으면 생색을 내야 알아주는 법이 아니냐· 내가 제자년 위한답시고 밤새 난리를 쳤는데 당연히 네가 알아야지·”
“헤헤· 감사합니다·”
어제 그리 힘들어 뻗어놓고는 또 밤중에 일어나서 내내 새로운 약탕을 조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청의 가슴속에서 어제의 앙금이 스르륵 씻겨 내려갔다·
전부 천유학의 계획대로였다·
어제 느즈막히 오라는 소리? 안 했다·
그래야 아침에 와서 약탕 준비하며 초췌한 꼴을 청이 볼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천유학은 제 스승 알기를 개떡처럼 알았다· 고된 수련과 스승 놈의 약올림이 원망으로 변한 까닭이었다·
원한의 대물림이란 말이 딱 들어맞아서 신투의 사제관계란 애증에 가까운 우정으로 화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천유학이 정작 제자를 들여 제가 받은 것들을 그대로 복수하려니 그래서 잠깐 즐거운 시간을 갖기보다는 존경을 받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렇다고 즐거운 시간을 갖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니 실상 괴롭힐 만큼은 다 괴롭히고 앞으로도 괴롭힐 생각이면서도 좋은 스승인 척 수작을 부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속마음이 시커멓건 하얗건 정성을 쏟은 것이 사실이니 청에게는 그저 참으로 고마운 스승이라 하겠다·
“음· 냄새가 참 좋네요· 음· 냄새를 맡으니까 어쩐지 배가 고프다····”
동시에 꼬르륵 때에 맞춰 배가 울었다·
천유학이 킬킬 웃으며 무언가를 휙 던져주었다·
“음? 뭐에요?”
“참마다·”
청이 손에 들린 깨끗히 껍질 까인 참마를 내려다보았다· 미끈하니 손에 감기는 감촉이 영 달갑지 않았지만 뭔가 식물 특유의 향이라고 해야 하나 맛있는 냄새가 나기는 했다·
한 입 베어보니 생고구마처럼 딱딱하니 서걱한데 한편으로는 끈적하니 입안에 달라붙는 찰기가 가득했다·
“음· 의외로 먹을만하네요?”
“곱게 자란 계집이 잘도 먹는다? 맹맹하니 아주 배고프지 않으면 생으로 먹기는 좀 그러한데·”
참마는 식감도 나쁘고 맛도 없다·
심술로 던져준 것뿐이지 진짜로 먹으라고 내어주지 않았으니까·
사실 곱게 자란 천유학은 못 먹는다·
껄렁해 보여도 아주 명문자의 영식이자 한림원의 교수 대장인 천유학이었다·
“곱게 자라요? 누가요? 저 거지 출신인 거 못 들으셨어요?”
“오 그러냐? 나는 계집이 참으로 기품이 넘쳐서 부귀한 권세가의 귀한 아가씨쯤 되는 줄 알았지·”
천유학이 말실수에 가까운 소리를 아주 부드럽게 칭찬으로 전환했다·
그를 눈치채지 못한 청이 키득거렸다·
“제가 좀 그런 존귀함이 있긴 하죠·”
“존귀함은 개뿔· 나야말로 대대로 오 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명가의 자식인데· 그런데 그런 것 같디?”
“솔직히 말씀드려요?”
“이미 다 말했잖냐···”
어차피 기왕 온 김에 청이 잡담이나 하며 욕탕의 제조를 도왔다·
마와 산마와 참마를 갈아넣고 양파와 파 연근을 또 곱게 갈아넣고 그리고 나선 또 토란을···
“스승님? 약탕 끓이는 거 맞아요? 점점 야채죽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의학에 조예가 없다고 했잖냐· 내려오는 대로 조제하는 것뿐이지 나도 왜 넣는지는 몰라·”
“여기 삼도 들어간 거죠? 삼 냄새도 나는데·”
“삼? 에라이 거기 들어간 게 백년설삼 몇 뿌리인 줄 알아? 소환단도 꽤 들어갔고 태청단도 두 알 넣었다· 이건 영약탕이다· 입이 아니라 몸으로 흡수하는 영약이지·”
“오 영약· 그러고 보니 영약 먹어본 적이 없네· 어라·”
갑자기 돌연 떠오르는 것이 마교에 있을 때 지존 호소인 그 새끼가 선녀공이랑 같이 영약들 죄다 갖다주라고 안 했었나?
왜 무공만 오고 영약은 안 왔지?
누가 빼돌렸나?
그야 당연히 지존 호소인의 말을 듣는 척만 하는 수하들이 귀한 영약을 청에게 내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무공은 익혀봐야 정파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나 되니 주어도 상관없다고 막 뿌린 것이고·
그러는 사이에 약탕이 완성되었다·
“영약탕은 각성신공을 익힌 제자에게만 해 주면 된다· 각성신공을 연공하기 위해서 굳이 피부로 흡수하는 것이지 아니면 그냥 생으로 먹이는 게 더 나으니까· 이거 한 방이면 바로 오 성 성취로 직행하거든·”
“와· 오 성이요? 그렇게 빨리요?”
“여기 들어간 영약들이 다 합치면 황금 이백 관쯤 될까 싶은데· 사실 이건 제자에게 굳이 안 해 줘도 된다· 이백 관은 아무리 신투라도 좀 부담스럽지 않냐·”
너니까 특별히 해 준다는 소리였다·
청이 감격하여 큰절을 올렸다·
“아· 감사 또 감사합니다· 이 제자가 스승의 은혜를 뼈에 새기겠나이다·
“흥· 말로 새기지 말고 행동으로 잘해· 그리고 너라면 오 성보다 더 높은 성취를 이룰 수도 있겠지· 어제도 약성을 쪽 빨아먹었잖냐· 원래는 다 흡수를 못해서 버리는 영약이 태반이라 그게 아까워서 안 해주는 건데·”
어제 청이 시약궁창의 약성을 모조리 빨아먹는 것을 보고는 영약탕도 남기지 않고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는 것이다·
사실 영약탕 하나 만드느니 그 재료를 한 이 년 잡고 천천히 먹이는 편이 훨씬 낫기도 하고·
후계자의 나이가 많거나 몸이 아픈 등등 전신세맥 다 굳어서 극약처방이 필요한 때나 쓰는 비장의 수법이었다·
“자 그럼 욕탕에 들어가기 전에 점심을 들어야지·”
“오· 그럼 점심은 뭘 먹을까요? 음 오늘따라 우유죽이 왜 이렇게 끌리지? 어떠세요?”
“굳이 보신탕 잘 끓여놓고 어딜 가서 사먹어? 좋은 재료 다 넣고 끓였는데 맛 좀 봐야지· 좀 덜어다 쌀 넣고 끓일 건데·”
청의 목욕물 겸 점심거리라는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참으로 찝찝한 소리라고 하겠지만 청이 그저 해맑은 웃음을 머금었다·
와· 맛있겠다· 하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참 준비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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