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8
온갖 약재와 야채를 부어 넣고 밤새도록 푹 우렸으니 그 육수가 보통 육수일까·
벌써 향기롭기가 쌉싸름한 약 향과 온갖 야채의 싱싱함이 어우러져서 쌀 넣고 팔팔 끓여내는 동안 스승과 제자가 그저 군침을 꿀꺽꿀꺽 삼켰더란다·
그리고 마침내 팔팔 끓는 죽을 그릇에다 담아 날달걀 탁 까다가 휘저으니 약선 야채 계란죽이 딱 완성되었다·
스승과 제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이내 어디서인가 나타난 숟가락을 쥐고 후후 오래 불어 마침내 한 입 입에 넣으니-
“음·”
“으음·”
스승과 제자의 표정이 미묘했다·
“···이거 드셔보신 거 아니었어요?”
“내 스승님은 그냥 영약이나 처먹으랬지 영약탕은 안 해줬다· 크흠·”
다만 영약탕은 몸을 담그라고 우려낸 목욕물이지 처먹으라고 낸 육수가 아니었다·
당연히 심심하고 맹맹하니 맛은 씁쓰름한데 온갖 풀과 채소의 비린내가 모였다·
“일단 간을 좀 해 봐요· 혹시 소금 가진 거 있으세요?”
“그야 당연하지 않냐·”
소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르면 알면 되는 법이다·
청이 아주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암염이랑 말린 향초 좀 항상 가지고 다녀야겠다· 그리고 말린 고기도 좀· 이거 고기 건더기가 하나도 없네···
소금을 치니 좀 나았다·
원래 뜨거운 미음에 계란 휘휘 저어 풀고 소금간만 해도 맛있는 것이 계란죽이다·
오히려 육수가 비리고 써서 맛을 버리니 그래도 어찌어찌 오만상을 쓰며 먹을 만한 약선 죽이 탄생하고 말았다·
“음· 몸에 좋은 맛이네요·”
“영약을 밥 먹듯이 한다는 말이 좋은 말이 아니었네· 영약은 영약으로 처먹어야지 식사로 하면 안 되겠다·”
사실 청은 아무거나 잘 먹는다·
이 ‘아무거나’ 라는 말에는 평범한 사람은 먹고 탈이 날 만한 썩은 쓰레기나 벌레 따위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그저 맛이 없을 뿐인 계란죽도 꿀떡꿀떡 잘 삼켰다·
다만 귀한 집 도련님이 나이를 먹은 아저씨인 천유학은 영 고역인 듯 잘 넘기지 못했다·
그래도 영약이라 어쩔 수 없이 한 그릇은 삼켰지만 출신답게 쓸데없이 손만 커 넉넉하게 끓여낸 죽이 아직도 잔뜩이었다·
결국 한 그릇에 입맛이 뚝 떨어진 천유학이 숟가락을 챙겨넣었다·
그러고는 청이 아무거나 처먹듯이 다 먹어 치우는 꼴을 아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성인 넷이 두 그릇씩은 가득 채워 먹을 분량이었으니 단순한 연산으로 청이 혼자 일곱 그릇을 처먹었다·
청의 고향 아주 놀거리가 널린 세상에서도 보라 미인이 게걸스럽게 처먹으며 음식을 맛도 모르고 하염없이 밀어 넣는 추태가 인기 있는 구경거리였다·
훌륭하다 못해 너도나도 돈을 갖다 바치며 더 처먹으라고 부추기기까지 했으니·
그러니 놀거리 없는 원시 고대 미개 중원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신세계 넋을 놓고 볼 수밖에 없는 구경거리였다·
“거지 출신이라더니 이야 어떻게 그게 다 들어가냐····”
“오 확실히 이거 영양죽이라 기운이 막 솟아나면서 퍼지는 것 같은데요?”
“영양죽이 아니라 영약죽이고 기운이 퍼지는 것 같은 게 아니라 퍼지고 있는 거다· 바로 운기해서 흡수나 해라·”
“아·”
그에 청이 가부좌를 틀다가 배가 너무 튀어나온 탓에 힘들어서 그냥 두 다리 쭉 뻗고 등 뒤로 손을 받친 채로 앉았다·
청의 위장은 편리한 무한의 주머니 같은 것이 아니라서 그냥 처먹는 족족 쭉쭉 늘어날 뿐이기 때문이다·
영 퍼질러진 꼴이기는 했지만 청이 눈을 감고 제 기혈을 관조했다·
영약이 이 괴물 같은 신체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 좋은 기회였다·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일은 너무나 불쾌한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야 적어도 같은 인간인 척 같은 종류의 생물체인 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음 생물체 정도는 괜찮겠지?
일단 인간은 아니고 괴물이나 뭐 그 비슷한 사람은 아닌 무언가라도 적어도 나는 살아는 있으니까 무생물은 아니잖아·
아닌가? 게임 캐릭터는 무생물인가?
문득 청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영약 기운이 많이 독해서 그런지 눈가가 시큰한 것도 같고·
괜히 더러운 생각 말고 진기나 보자···
영약의 기운들이 단전으로 파고들어 각각 진기들에게 더해진다· 이미 대성을 이루어 최대치를 찍은 진기를 빼고는 공평하게 골고루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때에 청이 각성신공을 운용하자 남은 영약의 기운들이 돌연 방향을 바꾸어 각체진기에 집중해서 흡수되었다·
그냥 먹고 놔두면 대성 아닌 진기들에게 골고루 가는 거고 먹고 운기를 하면 그 때 돌리는 내공심법에 추가되는구나 하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사부님? 이거 영약이 원래 이래요?”
“헹· 이렇다는 게 뭔지부터 말해줘야 내가 듣고 맞다 틀리다 할 것이 아니냐·”
“어 설명을 잘 못하겠는데· 정상이라면 어떻게 돼야 하는데요?”
“영약의 깃든 자연의 기가 신체 말단을 향해 퍼져나가다가 대충 열 중 하나 정도 혈도에 남고 나머지는 피부를 통해 빠져나가고 마는 거지·”
그러니 영약 기운이 다 빠져나가기 전에 운기조식을 통해 붙잡아 단전에 모아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흡수의 난이도는 개인이 진기를 다루는 기량에 의해서도 차이가 나고 또 어떤 내공심법을 익혔느냐에 따라 다르며 심지어 영약에 따라서도 천차만별이라고·
“그러니 무림인들이 신공 신공 노래를 부르며 앙망하는 게다· 같은 영약을 처먹고 나서도 결과가 다른데· 그리고 좋은 영약일수록 흡수가 쉽고 혈도에 부담을 안 주지· 괜히 대환단이 천하제일의 영약이겠냐·”
영약을 먹어 열 중 하나 정도 혈도에 남는 기운이 꼭 득이 되는 것은 아니라서 그 성질이 거칠거나 하면 오히려 혈도를 파괴하고 몸을 해친다·
자연 그대로의 영약들이 이런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기운의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환단으로 다시 정제해서 먹는 이유라고·
“자 떠드는 거 보니 다 흡수했나 보다? 뭐 그거 한 그릇에 자연기가 얼마 들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저기 밖에서 못 잔 잠을 좀 잘 테니까 몸 담그고 쭉쭉 빨아먹어라·”
“따로 주의할 사항은 없구요?”
“처방에 따르면 좀 따갑다더라· 그래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라고·”
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엔 확실한 거죠? 아픈 거 아니라 따가운 거 맞죠?”
“그냥 써진 대로 말해주는 거지 나도 안 해봤다니까 어떻게 아냐? 무학 이론으로 보면 좀 따갑기는 하겠지?”
본래 영약의 자연기란 입으로 먹어 위장 즉 몸의 중심에서부터 바깥으로 퍼져나가 피부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각성신공은 호흡이 아니라 피부 전체로도 기를 빨아들일 수도 있는 특이한 심법이다·
물론 특이하기만 하고 효율은 호흡식 토납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채 안 되어 아주 엉망이었지만·
피부 흡기 효율이 똥망이라 아예 영약에 담가버린다는 그런 발상이라고·
이러한 각성신공을 통해 영약의 기운을 피부로 빨아먹는 수련이 영약탕이었다·
피부로 기가 파고드는 통에 당연히 따가울 수밖에는·
“기록에 따르면 익숙해지면 오히려 시원한 기분이 든다나 어쩐다나· 네가 한번 해보고 감상이나 들어보자· 음· 아구구 아주 피곤해 돌아가시겠네· 게다가 분근착골도 계속해야 하는데 무서울 건 또 뭐냐·”
“아예 분근착골이라고 하시네요?”
“내가 언제 분근착골이라고 했냐? 유류연련이라고 했지· 새파란 계집이 벌써 귀가 어두워?”
“이상하다· 분명 그러셨는데····”
“하· 누가 들을까 무서운 소리를 하고· 제자에게 분근착골을 하겠다는 스승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
“음· 잘못 들었나봐요· 죄송해요·”
천유학이 워낙에 당당하니 청은 그저 내가 잘못 들었던가 하고·
“그거 한 통이 이백 관이다· 한 방울에 동전이 몇십 문씩이다· 조심조심 한 방울도 허투루 하지 말고·”
천유학이 밖으로 향하며 당부했다·
한 방울에 동전이 몇십 문 씩이나 된다고 듣고 나니 새삼 와 이거 진짜 보통 돈지랄이 아니구나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려 청이 아주 조심조심 탕에 몸을 담갔다·
약탕은 딱 턱까지 차오르고 어쩐지 근질근질하니 일시에 가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각성신공의 운기를 시작하고 나니 탄산음료를 들이부은 목구멍처럼 전신 피부가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자극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딱 그 정도였다·
못 버틸 정도는 아닌데 또 입을 다물기는 뭐하고 탄산음료를 큰 잔을 단숨에 들이킨 때처럼 아프고 쓰린데 또 묘하게 시원하여 청량한 듯한 기분도 드는·
—-
더 이상 기운이 빨리지 않을 때까지 쪽 빨아먹고 나니 이미 시간이 훌쩍 흘러가 깜깜한 밤중이었다·
무공창으로 성취를 확인해 보니 단숨에 팔 성 경지였다·
와 뭐야· 영약 좋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청의 내공심법 성취는 그저 해당 심법으로 모은 내공의 총량으로 결정이 되는 것이라서 유난히 더 높은 성취를 이룬 것이기도 했다·
그 사정을 모르는 천유학만 경악했다·
“팔 성이라고? 아니 무슨·”
이래서 자질 좋은 제자를 들여야 한다고 아주 대대로 강조를 해 온 것이었던가·
천유학이 대충 그렇게 이해했다·
어차피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그래· 좀 어떠냐· 신체가 깨인 기분은·”
“아직 따가운데요···”
때를 아주 박박 밀어 살갗을 한 꺼풀 벗겨낸 기분이었다·
그냥 전신이 얼얼하고 화끈거리고 따끔거리는데 그와 동시에 시원하기 그지없으니·
“피부 쪽 세맥이 자극에 둔감해져서 그럴 거다· 이제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각성신공이 왜 신체를 깨우는 공부라고 하는지 체감하게 될 거다·”
“오잉· 각성신神공이 아니었어요?”
“각성신身공인데? 비급 줬잖아?”
“제목은 야간 운동 이십 일 수였잖아요· 분명 구결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천지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라는 내용 어디에 신체를 깨운다는 구절이 있어요?”
“원래 구결이란 게 대충 거창한 소리나 써 놓은 거 아니냐· 그래야 익히는 사람마다 조금씩 제 심상으로 완성할 수도 있고·”
무공 구결이 괜히 뜬구름을 잡는 이유에는 각 개인이 완성하는 형태를 딱 찝어 강제하지 않으려는 의도 역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신공인 줄 알았더니···”
각성 신공인줄 알았더니 각성신 공이다·
어쩐지 금색이더라니·
청이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어쩐지 크게 속은 기분이었다·
“신공은 신공이지· 꼭 신공이라 써 있어야 신공이냐? 이제 푹 자고 일어나 봐라·”
“그게 무슨 뜻이에요?”
“신투에게 신투를 떠나 모든 무인이 꿈에 그리는 것이 예리한 감각이 아니겠냐· 각성신공이 내공 쌓기는 삼류 수준이어도 예리한 감각의 각성이라는 효능만 따지면 아주 천하에 다시없는 절세의 신공이라고 할 거다· 미세한 바람 한 점마저 생생하게 느껴지거든· 천지의 흐름을 느끼는 기분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게 될 거다·”
“오오·”
청이 눈을 빛냈다·
금색 무공인데도 이러한 공능이?
그에 천유학이 피식 웃어주고는 뒤이어 흐음 하고 말을 꺼냈다·
“내일부터는 무림대회 시작이던가· 너도 뭐 바빠질 테니 나도 그동안 보약이나 팔고 다녀야겠다· 일단은 팔 일 후에 보자· 유류연련 이 회차 가야지· 어떻게 한 시진으로 할래 세 시진으로 할래?”
그러자 떠오르는 끔찍한 고통···
청의 눈빛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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