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8
계단 위에는 지상으로 통하는 큼지막한 문이 보란 듯이 놓였다·
비밀 통로의 비밀문 따위를 생각한 청의 예상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밖에서 빗장이 걸려 단단히 잠긴 문이었지만 청이 아주 자연스럽게 열고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지상으로 올라온 환영으로 문을 열자마자 유월의 뜨뜻미지근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그 장엄한 탈출의 순간 청은 생각했다·
음· 지하가 시원하긴 하구나·
청이야 어차피 야심한 새벽에 잡혀 쪽잠 자다 아침 점심 먹고 느지막한 오후에 나온 셈이라서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오래 햇빛을 보지 못한 심지어 다시 그 밝은 풍경을 볼 수 없으리라 절망 속에 마음이 꺾여가던 모용주희의 감흥은 아주 남다른 것이었다·
그러니 유월초 뜨끈한 대기가 휘감자마자 모용주희가 끅끅 숨죽여 울음소리를 냈다·
청이 쓴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 뒤편과 담벼락 사이 어깨가 셋 정도 들어갈 만한 뒤뜰 음 뒤뜰은 아닌데· 이런 데를 뭐라고 한담·
청이 뒤를 돌아보니 생각보다 더 절묘한 위장이다 싶었다·
건물 뒤편과 담벼락 사이를 굳이 들어갈 외부인은 없고 또 들어선다고 해도 보란 듯이 아래로 낸 계단과 나무로 대충 짜인 문짝을 보면 그냥 창고로 쓰는 지하실인가 보다 하고 넘어갈 터였다·
혈교 무사가 증언한 이선혈고대의 생태에 따르면 근무 중이 아니면 대개는 지상에 머문다고 했다·
그러면 이 장원 역시 혈교가 쓰는 거점이라고 봐야겠지 하고·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눈으로 면상을 한 번 훑어주는 것이다·
청이 배에 묶은 포대기를 풀고 모용주희를 조심히 내려놓으며 물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을래요? 장원부터 좀 정리하고 올 테니까요·”
“나 버리려고-”
“안 버려요·”
“같이 같이 가요· 혼자 두지 말고·”
모용주희가 청의 팔을 붙들며 애원했다·
“제가 모용 소저를 버리는 일은 없어요· 약속할게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줄래요?”
“시 싫어요! 같이 가요· 나 놓고 놓고 가지 말아요·”
“모용 소저· 오래 기다리지 않아요· 그래 백 딱 백만 세면 돌아올 테니까요·”
“싫어! 싫다고! 놓고 가지 마요· 응? 네? 서문 소저가 너가 너가 나한테 그러면 안 돼· 너 때문이잖아· 책임 그래 맞아· 책임을 져야지·”
청이 그에 모용주희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시선을 마주했다·
“모용 소저· 제 눈을 봐요· 저는 절대로 소저를 버리고 가지 않아요· 알겠어요?”
“그럼 그럼 같이 가면 되잖아·”
“잠깐 장원 내부를 정리하려 할 뿐이니까 안에 혈교 새끼들이 있으면 모용 소저가 또 아플 것 아니에요·”
“괜찮아· 그냥 아프면 아프면 되니까·”
그저 아이마냥 떼를 쓰고 있으니 청 역시 난감해졌다·
음· 보통 이러면 말을 듣는 거 아니었나·
영화는 역시 영화였을 뿐일까·
청이 한숨을 내쉬려다 필사적으로 청의 눈을 바라보며 호소하는 모용주희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꾹 참았다·
그래 세 번까지는 달래 봐야지·
“모용 소저·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아주 잠깐 일 각 정도면 기다리면 될 텐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까 무서운가요?”
“하지만 혼자는 나 혼자 있다가 마구 소리쳤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모용주희가 두서없이 이야기를 쏟았다·
듣자 하니 겁도 없이 혼자서 집에 가다가 도시 밖에 매복한 지탄광마에게 당한 모양·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톱을 뽑히고 목에 올가미를 걸고 매달렸다· 딱 발끝에 힘을 주어 설 수 있는 높이에 매달아두었으니 발을 디디면 극심한 통증에 몸부림을 치고 그러면 목이 죄어 숨을 쉴 수가 없어 바둥거리다 다시 발끝으로 서고 그러면 다시 통증이 밀려와서····
“고독을 삼키면 내려주겠다고 나 삼키겠다고 그렇게 말을 하려고 했는데 숨이 아파서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왜 웃고 나는 죽을 것 같은데·”
그렇게 고통과 호흡 부족으로 몸부림치는 꼴을 혈교 놈들이 재밌다고 깔깔거리며 동이 틀 때까지 구경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혼자 있으면 안 돼· 혼자 있다가 잡히면 또 그렇게· 안 돼· 안 돼·”
모용주희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 한심하지? 멍청한 년이 혼자 다니다 잡혀서 더러운 꼴이나 당하고· 멍청한 년이 감시당한다고 호위도 내쳐버리고 나도 아는데 아는데 너무 무서워서 그래· 나는 난 글러 먹은 년이야· 여인으로도 글러 먹었고 무인으로도 글러 먹었어·”
“아니에요· 모용 소저는 한심하지도 않고 멍청하지도 않아요· 모용 소저가 잘못한 게 없잖아요· 집에 가는 게 잘못인가요? 전부 저 혈교 놈들 잘못이지 모용 소저가 아무 죄도 없어요·”
“정말? 정말이지?”
“네· 정말이에요· 내 말 믿을 수 있죠?”
“네· 믿어 믿을게요·”
“게다가 소저는 무림오화잖아요· 이렇게 예쁜 얼굴을 하곤 어엿한 여인인 걸요· 또 무인으로서 복수 역시 훌륭히 해냈으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요·”
“네·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모용 소저· 조금만 용기를 내서 기다려 줄 수 있겠어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딱 백만 세면 돌아올게요· 알겠죠·”
“조금만· 백 세면 돌아오는 거죠?”
“그럼요·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씨이· 듣자 하니 내가 다 화가 나네· 내가 그 개 같은 새끼들 잡아놓을 테니 같이 복수를 해 주자구요·”
“네 네 알겠어요·”
그에 청이 모용주희를 꼬옥 안아주었다·
“아이 참 착하고 용기 있다· 모용 소저는 정말로 강하고 굳센 사람이에요· 알겠죠? 내 말 믿죠?”
“네···”
“괴롭고 힘든 기억이 떠오르면 같이 그 개자식에게 되돌려준 추억을 더듬어 봐요· 복수는 달콤했잖아요? 금방 올 테니까·”
청이 그리 말하고는 휙 반중력 보행으로 날아가 버렸다·
모용주희가 모처럼 초점이 잡힌 채로 제 다리를 끌어안은 채로 숫자를 셌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의문이 하나·
“복수···? 어···?”
모용주희의 초점이 다시 흩어지고 덜덜 몸을 떨기 시작했다·
—-
아쉽게도 혈교의 거점에 머무르는 이선혈고대 대원은 겨우 두 명이 전부였다·
둘 중 한 사람만 살려주겠다는 진실 대결 앞에서 앞다투어 증언이 이어진 끝에 거점으로 쓰는 장원의 위치를 모조리 기억해둔 청이 최후의 승자를 가렸다·
그리하여 진실 대결에서 패배한 대원은 청의 몫이었고 승리한 대원은 모용주희의 몫이었다·
“어 저 나는 괜찮아요· 안 해도 되니까 서문 소저가 하고 싶으신 대로-”
“뺄 것 없답니다· 당한 이상으로 돌려줘야만 마음 속의 응어리도 풀리고 하니까요· 자· 제가 하면 그대로 따라하는 거에요?”
“네 네···”
“아쉽게도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간단히 음 피부만 벗겨다가 매달아 놓을까요·”
그리하여 박피되어 매달린 시체가 두 구·
이후에는 주인 잃은 장원의 욕탕에서 몸을 씻어내는데 모용주희가 물을 보고도 기겁을 하며 새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처박고 덜덜 떨었다·
덕분에 달래랴 씻기야 또 달래랴 머리 감아주느라 물좀 끼얹었더니 발광을 하며 팔다리를 휘두르고 그러면서도 눈을 안 감으려 들어서 아프다고 난리라서 또 또 달래주고 또 씻겨주고 아주 진땀을 쭉쭉 뺐다·
그리고 나서 장원에 있던 옷으로 갈아입히고 나니 이제야 사람다운 몰골이었다·
무천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피칠갑을 한 괴인의 형상으로 무림맹에 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죄송해요·”
“괜찮으니까 그만 해요·”
“하지만 피멍이 새까맣게 퉁퉁 부어서 그 어떻게 해····”
“어쩐지 계속 욱씬거리더라니·”
“그 손톱 뽑으셔도 괜찮으니까·”
“아니 괜찮다니까· 반으로 쪼개지기도 했는데 겨우 멍 좀 든 것 가지고 며칠 지나면 멀쩡해지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요· 모용 소저도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었으니 아무 잘못도 없어요· 모용 소저 잘못이 아니니까·”
“네···”
그렇게 연신 울먹거리며 손톱 아니면 제 것이라도 마구 치라는 모용주희를 어르고 달래 가면서 겨우겨우 무천각에 돌아왔다·
그러고 나니 뒷뜰에서는 탕탕 목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청의 친구들은 걱정도 안 했다·
왜냐하면 청이 천유학의 수련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루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봐야 대모님과(신투 수업이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수련을 하겠거니 했을 뿐이었다·
청이 참 태평도 하다고 혀를 쯧 차고는 무천각 객실에 올라 모용주희를 눕혀두었다·
“서문 소저 어디 가면 안 돼요···”
모용주희가 청의 손을 꼭 붙든 채로 누워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극도의 공포와 피로에 더불어 안도로 오랜만의 편안함에 이기지 못해 금세 스르륵 잠이 들어버린다·
시비에게 부탁해서 당난아를 불러들이고 나니 모용주희를 보자마자 쌍심지였다·
“뭐야 검화 아냐? 쟤가 왜 여기에 있어? 너 또 또 여인을 끌어들이고· 아니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애를 하· 손까지 딱 잡아주고? 이야· 재주도 좋아·”
“그게 아니라· 난아야· 모용 소저가 지금 중독이 됐는데·”
“그래그래· 중독· 청아가 날 부르면 꼭 그런 식이야· 왜 무슨 독이길래?”
“어· 이선혈고라고·”
“응···?”
허리에 손을 턱 얹은 채로 씩씩 콧김을 뿜던 당난아가 눈만 끔벅거렸다·
“방금 혈고라고 했어?”
“응· 이선혈고·”
“농담?”
“내가 이런 걸로 농담한 적 있어?”
그제야 당난아가 정색을 했다·
“세상에 무슨· 혈교의 고독이잖아·”
“음· 나도 알아· 제거는 힘들 것 같으니 여왕 고독을 없애려고 하는데 그러면 아주 푹 마취시켜야 하니까· 부탁 좀 해도 될까?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일이라서·”
도대체 무슨 벌레가 초능력으로 신호까지 보내는지 모르겠지만 여왕 고독들은 하위 고독에게 자결을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독이 품은 독정이 몸으로 퍼져 감염자 역시 사이좋게 황천행이다·
심지어 여왕 고독의 연쇄 자살 신호라는 필살기까지 있어서 고독이 고독을 매개로 우리 죽어야 해 하고 최대 범위로 전달에 전달을 반복하는 대학살 필살기였다·
혈고대의 대원들 역시 대주 부대주에게 제 목숨을 저당 잡힌 상태이자 인간 중계기를 겸해 이 거점 저 거점 몇 명씩 골고루 퍼져있는 이유기도 했다·
그러니 모용주희를 아예 고독 채로 푸욱 재워버릴 필요가 있었다·
고독이 여왕이 자살 신호를 받고 나서도 눈치채지 못해 얌전히 쿨쿨 잠만 자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물론 청이 생각해낸 방법은 아니었다·
혈고대 대원이 알려준 묘책이었다·
그에 당난아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혈교랑 얽힌 거야? 그러면 차라리 맹의 어르신들께 도움을 청하면·”
“그러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서· 이왕이면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 음· 사부님하고 나랑 둘이면 충분할 테니까·”
모용주희는 불미스러운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그것만은 굴복하지 않고 버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혈교에 붙잡혔다는 소문이 돌면 그 말을 믿어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청이야 이선혈고대주 혈륜마귀와 부대주 지탄광마의 취미생활에 대한 진실된 증언을 들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게다가 낭인들 역시 일순간에 추락하며 명예가 시궁창에 처박히고 말 터였다·
낭인으로 없이 살면서도 선을 유지하려 노력한 이들이 그저 약 좀 잘못 먹었다고 그래서야 되겠는가·
“모용 소저 말고도 혈고에 중독된 사람이 더 있는데· 사흘 정도만 재워버릴 수 있을까?”
“아예 고독까지 재워야 한다는 거 아냐· 뭐 어려운 일은 아닌데· 음· 근데 청아 너 되게 자세히 안다· 다시 보게 되네·”
“내가 마음 먹으면 원래 이 정도거든?”
“으이그·”
당난아가 청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무슨 일인지 나중에 알려줄 거지? 나는 일단 약재를 준비할 테니까· 재울 사람들은 미리 모아서 얘기를 해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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