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9
왜 검을 쥐고 휘두르느냐니·
청이 되물었다·
“음· 살기 위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네 실력이 미천했을 때야 그렇겠지만 이미 고수라 할 수 있는 제자가 아니더냐· 이제는 그저 살겠다면야 살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으니 생존을 위한 검이 예기를 잃고 날이 무딜 수밖에는 없지 않겠느냐·”
“아·”
사실 그 말이 맞았다·
절정 후기쯤 되면 사실 동네 무관에라도 가면 평생 대접받으며 살 실력이다·
물론 계속 고수들이 튀어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근래에 정말로 생존에 대해 걱정한 적이 있던가?
이번 혈교 놈들 조질 때도 그랬다·
독이 안 통하는 체질을 믿고 들이댔다·
게다가 그러며 어찌 생각했던가·
수틀리면 도망치면 된다고·
경신법에는 아주 천하제일을 논해도 될 수준이라서 도망치는 것 하나는 자신감이 넘치는 상태라서·
애초에 본인 걱정일랑은 한 적이 없다·
낭인이나 슬슬 밉상인 모용주희 정도를 걱정했을 뿐이지 본인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안 되는 걸까? 먹고 살만 해서?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서문수린이 청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흉중에 품은 검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란다· 한 번 정했다고 무조건 지켜야 하는 율법도 아니지· 그리고 마땅한 정답이 없으니 제자가 정하는 것이 바로 정답이다· 그러니 제자는 부담 없이 마음껏 고민을 해 보거라·”
“음·”
청에게 무공이란 그저 편리한 도구다·
사실 아직도 실감을 잘 못한다고 할까 믿기지가 않는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영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다고도 하겠다·
왜냐하면 내공이 대체 뭔데?
정신을 집중하고 숨을 잘 쉬어 우주천지의 기운을 받아들여 쌓는 신체 어디에든 작용하는 만능 자원이라니·
청의 고향에는 그런 초인적 능력은 없다·
있었으면 체계적인 교육과 관리로 아예 학교의 기본 과목으로 지정해서 온 인구의 무인화 그리하여 십억의 절대 고수를 완성해서· 음· 완성해서 뭘 하지?
어차피 열병기 아래에 무력할 텐데·
십억 고수가 열양장을 대성한다면 물을 끓여 터빈을 돌릴 수는 있겠다·
친환경이긴 하지?
아니면 십억 고수가 빙공을 연마해서 지구 온난화를 막아낼 수도 있겠고·
또 친환경이네·
그러니까 내공이 저쪽 현대에서도 존재했다면 지구가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론이 좀 이상하지 않나···
모처럼 진지한 고민이 멍청한 망상으로 치닫는 청이었다·
중원에는 없는 물음표라는 기물이 한가득 떠다니는 듯한 청의 ‘그 표정’에 서문수린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글렀구나· 왜 집중을 못 해·”
그러나 집중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피한다고 보는 편이 정확했다·
잘못하여 세계에 대한 의심으로 번질만한 생각을 본능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칫 위험한 발상을 삼천포로 배를 끌고 높은 산으로 저 우주 드넓은 별들의 군집으로 밀어내면서·
“으음· 잘 모르겠어요·”
청의 어깨가 축 쳐졌다·
그에 서문수린이 청의 머리를 다시 쓱쓱 힘주어 쓸어주었다·
“본래 먼 곳의 기물보다 제 안의 진심을 찾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란다· 음· 그러니 차라리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어·”
“앗· 사부님· 그렇게 말을 하려다 마시면 제자는 궁금한 나머지 잠도 못 자게 되어버려요?”
그에 서문수린이 흥 콧김을 뿜었다·
“그럼 자지 말고 수련이나 하거라· 외려 잘 되었구나·”
—-
모용주희가 무천각 연무장에서 다리 사이에 머리 처박고 있는 이유는 생각보다 아주 단순했다·
그냥 자려고·
여인으로서 환하게 밝은 대낮에 훤히 드러난 야외에 발라당 드러누워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눈을 붙이기에 좋은 자세를 취해 잠을 청했을 뿐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잠을 청한 이유도 아주 단순했다·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깜깜한 어둠 속에 홀로 놓이게 되면 불안하여 잠은커녕 침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숨기고 입을 틀어막고서 자신을 숨기는 일에 열중이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길기만 한 밤이 지나야 날이 밝아야만 그리고 주변에 사람이 있는 그런 소음이 귀에 들려야만 안심이 된다·
개중에 특히 안심이 되는 목소리가 있다·
괜찮아요· 모용 소저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점차 좋아질 거예요· 그냥 지금 많이 아플 뿐이니까 나아질 거라 믿어요·
귓가에 속삭이던 그 상냥한 말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아서· 그게 진실인 것 같아서·
그래서 밖에 나와서 잤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그 일과도 끝·
나쁜 년· 안 버린다고 했으면서····
하지만 모용주희도 청의 말에는 동의했다· 청을 보면 아픈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마니까·
저도 모르게 갈 곳 없는 증오와 억울함이 터져나오고 마니까·
그래· 버려질 만도 하지·
나 같은걸· 누가·
그래도 버틸 수 있다· 버텨야 한다·
돌아갈 집이 있으니까· 가문을 위해서도·
어떡하지· 가족에게 말을 해야 할까·
사실 모두 털어놓고 따뜻한 가족의 품 안에서 그저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하지만 그 역시 두렵고 또한 치욕스럽다·
오대세가의 적녀가 혈교에 납치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문에 큰 폐가 되는 일이다·
심지어 호위조차 떼어버리고 멍청하게 혼자 야반도주를 하다 붙잡히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저 하나 아프다고 세가의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기가 싫었다·
엄마 어머니가 아팠을 때처럼 그렇게는·
그냥 없던 일로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질 테니까·
걔가 그랬듯이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모용세가가 배정받은 객청은 여느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앗 아가씨· 돌아오셨습니까?”
“예· 그· 아버지께서는요? 준이는?”
“가주님께선 안에 계시고 도련님은 놀러 나가셨습니다· 원체 가만히 계시지를 않으시지 않습니까·”
“그야···”
모용주희가 말끝을 흐렸다·
뭐 거창한 환영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여상한 태도에도 쿡쿡 가슴이 아렸다·
나는 그렇게 아팠는데· 내가 아프던 때에 다들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모용성익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야 딸내미· 왔냐· 집에 가겠다더니? 왜 되돌아왔어?”
“그게·”
모용주희가 말을 잇지 못했다·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것이 당장이라도 막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이래선 이래선 안 된다·
말을 해야 해· 안 그러면 내가 못 버티겠다고· 그냥 없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 아픈 기억이라서· 위로받았으면 해서·
모용주희가 그렇게 용기를 끌어모았다·
하지만·
“어디 가는 건 좋은데 호위를 떼 놓지는 마라· 혈교의 악종 놈들이 슬슬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니 우리 딸내미 솜씨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지·”
모용주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혈교 혈교라니요···?”
“이건 너만 알고 있거라· 개봉부에 혈교 놈들이 제대로 자리를 깔고 있었지 뭐냐· 무림맹에서도 고독에 중독된 간자가 셋이나 나왔다·”
무림맹 무사 중에 둘 가족이 상을 당한 이가 하나· 개봉부 관가에서도 초상집이 다섯에 심지어 군사소에서는 지휘사가 상을 당했으니 일시에 줄초상이 났다고·
이는 혈고의 주인이 죽는 바람에 뿌려놓은 새끼들이 일제히 자폭을 한 까닭이라고·
“초장에 막았으니 망정이니 이 얼마나 큰 참사가 날 뻔했냐· 세상에 군사 지휘사가 혈교의 간자라니 삼만 군사가 그대로 혈교 손에 놀아날 뻔했지 뭐냐· 뭐 무림맹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라서 상급서기위원까지 그 꼴이었으니·”
모용주희의 눈동자가 떨렸다·
말 안 한다고 했으면서·
아무도 모르게 해준다고 그렇게·
“그걸 어떻게 누가 누가 말해줬어요?”
“부군사보가 혼자서 직접 발로 뛰어서 알아냈다던가? 뭐· 그럴 리가 있나· 총군사가 공과를 몰아준 거겠지만·”
모용주희가 일단은 안도했다·
청이 자신을 속이거나 아예 버리지는 않은 것 같아서· 모르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리지는 않은 것 같아서·
부군사보 현화 그년인가?
그럼 내 이야기는?
내가 잡힌 것도 전부 들킨 거야?
“어디 가서 말하진 말고· 남들 알면 아주 손가락질을 할 일이 아니냐· 하· 내가 다 부끄러워서 아주·”
모용성익의 태도를 보아하니 자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차라리 잘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참에 나도 붙잡혔었다고 자연스럽게-
그러나 모용성익의 한탄이 모용주희의 입을 막았다·
“하여간 무림맹 꼴이 아주 잘 돌아간다· 쯧쯧· 간자가 셋이나 나오고 일전에도 그렇지 않냐 언가의 아이도 총명하다고 독립 순찰 직위까지 떡하니 줘놓고는 혈교의 앞잡이한테 그리 중한 자리를 넘겨주고는· 그 때 인사 검증을 다시 한다느니 어쩌니 아주 호들갑을 떨더니면 또 간자가 나오고·”
“그 그거랑은 좀 다르지 않아요? 혈고가 들어가고 나면 목숨이 달렸으니까· 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요·”
“그래서 저 살자고 동료를 팔았지· 그냥 차라리 죽었어야지·”
모용주희의 숨이 턱 막혔다·
속이 꼬이는 듯 뒤집히는 듯 마구 헝클어져 죄며 경련하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지금 무림맹이 발칵 뒤집어졌어· 정보가 어디까지 유출되었는가 파악하느라 온 부서가 난리라더라·”
“그건·”
“거 참· 진주언가가 어찌 되었는지 알고 있는 놈들이 그래· 혈교의 간자 하나가 십대세가에 든 가문 하나를 멸문시키지 않았냐· 멸문만이면 다행이게 그 식솔 그 많은 인원들을 죄다 강시로 만들었다고 하니 죽는 것보다 못해·”
모용주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졌다·
그나마 앉아있기에 망정이지 서 있는 상태였다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을 터였다·
그러나 기분만은 이미 쓰러져버리고 만 상태였다·
“딸? 왜 그래?”
“그 그래도· 그 사람들이 혈교에 잡힌 건 그건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도 자신들이 잡힐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을 테니까·”
“차라리 저항하다 죽었어야 하는 것이 무인 아니냐? 무인이 죽지 못하고 사로잡혔으면 그걸로 이미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 거기에 혈고에 중독이 된 걸 알았으면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몇 놈 해치워 동귀어진을 하던가 아니면 맹에 알리던가 했어야지· 분명 저 살겠다고 목숨을 구걸했겠지· 하· 쓰레기 같은 놈들·”
“읍·”
“딸?”
우욱 웨엑 결국 요동치는 속을 버티지 못하고 모용주희가 속에 든 것을 입 밖으로 꺼내놓았다·
“왜 왜 이러니? 어디 아프냐? 의원 의원을 그래 당가가 사람을 아니다 조금만 참고 있거라 애비가 금방 사람을 불러 올 테니-”
“안 돼! 아니 아니에요·”
모용주희가 비명 비슷한 소리를 냈다·
당가는 안 돼· 당가는 안 돼····
“좀 체해서 내릴까 하고 억지로 먹었더니 이제 이제 좀 편해졌어요·”
“아이고· 체한 걸 먹어서 내리려 하냐· 미련하기는·”
“그으 헤 헤헤···”
모용주희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모용성익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로 단단히 당부하는 것이다·
“어디 아프면 숨기지 말고 말해· 네 어미 꼴을 또 봤다간 이 애비도 그때는 진짜로 저승까지 가고 말 테니까· 알겠지? 딸?”
“그럼 그럼요·”
모용주희가 애써 정말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그저 속으로 절규를 꾹 삼키면서·
—-
무림대회도 굵직한 일정들이 하나둘씩 다 끝을 맺었으니 잠룡비무회 결승은 그 대미를 장식하는 최대의 행사였다·
여러모로 이변이 많이 일어났다고 하는 잠룡비무회였다·
그러나 사람의 인심이 뒷간에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법이라고 지금은 아주 싹 과거를 잊은 듯이 말을 바꾼 상태였다·
청이 월봉을 누가 봐도 납득할 만한 명승부를 통해 꺾었으며 와중에 미모를 드러냈다· 게다가 이후 소개에서 여중제일인의 제자라고 밝혀지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니 추면검녀니 못생긴 년이 무공이라도 뛰어나야 한다느니 떠들던 이들이 모두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어쩐지 처음부터 묘한 기품이 넘치더라· 게다가 방년의 나이로 그러한 신위라니! 과연 여중제일인의 제자다운 면모가 아닌가·
하· 족족 반대로 걸다가 죄다 꼬라박은 새끼가 이제와서 아닌 척을 하네·
뭐야? 이 새끼가···!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준결승 비무 이후 개봉 시내에서 크고 작은 싸움들이 유난히 빈번하게 벌어졌더란다·
물리적 싸움 말고도 말싸움 역시 그랬다·
개봉의 모든 밥집 술집 요리집 찻집에서 사람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고 핏대를 세워 언쟁을 벌여대는 것이다·
보통 이러한 유행이 도는 경우에는 모든 이가 당연히 흥미를 가질 만한 언쟁거리가 돌아서 모두 제 의견을 앞다투어 말할 때 이루어지는 현상이었다·
그리하여 사람 모이는 곳마다 언성이 높은 그 주제는 바로 이러했다·
여중제일인의 제자 신녀문의 서문청에게 과연 어떤 별호가 어울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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