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0
신룡新龍이라 하면 기나긴 이무기의 삶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이 승천한 용을 말한다· 혹은 잠룡비무회의 우승자를 말하는 빛나는 신성에 대한 경의이기도 했다·
문제는 긴긴 세월 여인의 몸으로 우승한 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논쟁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본래 용이라 하면 사내를 말하는 것이고 여인을 말함이란 봉황을 일컫는다· 그래서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들을 용봉이라 부르지 않으냐·
그러니 신녀문 제자에게 붙어야 할 칭호는 신룡이 아니라 신봉이 맞지 않겠느냐·
그러면 옆 사람이 딴지를 건다·
혹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그럼 신봉이 맞지 암·’ 하고 한 탁자에서 극적인 협의를 보고 나면 듣고 있던 옆 탁자에서 딴지가 날아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신봉은 어감이 좀 구리지 않느냐· 강호 역사에 신봉이라는 후진 별호가 붙었던 적이 없다고·
그러면 여기서 또 의견이 둘로 갈린다·
신룡에 해당하는 여성형은 역시 어린 봉황 봉추가 되어야 맞다·
무인에게 남자 여자가 어디 있느냐 긴긴 전통에 따라 신룡이라 붙이는 것이 맞다·
이러니 개봉 시내 어디든 도대체 싸움이 나지 않는 자리가 없다·
다만 모두 동의하는 의견이라면 신녀문 제자가 우승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애초에 그 소림을 꺾고 올라오지 않았나·
옥기린과 수준 높은 비무를 펼친 공손가의 여인의 무위 역시 놀랍기는 하다·
하지만 청은 소림을 권으로 꺾고 올라온 검객이다·
본래 무기를 드는 것이 들지 않는 편보다 훨씬 강하다· 이는 갓 태어난 아이조차 어미의 배 속에서 이미 깨닫고 나오는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그러나 천하제일의 권법을 자랑하는 소림을 권으로 꺾었다는 사실은 검으로서는 더 성취가 높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고·
그러니 다들 그럴듯한 별호 하나 짓겠다고 아주 난리통이었다·
저까짓 게 뭐라고 별호를 짓느냐고 타박을 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의 공감을 사는 훌륭한 단어를 만들어내면 비공식 별호로 널리 쓰이게 된다·
이런 식으로 별호를 여럿 가진 무인이 한둘이랴·
자신이 만든 별호가 비공식으로 널리 쓰이게 되면 그야말로 대대손손 물려줄 자랑거리가 하나 생기는 셈이니 자랑거리에 진심인 중원 놈들이 이 기회를 놓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라던데 서시검은 어떤가? 서시검이라니 완전 후진데· 그럼 서시신검? 굳이 서시를 붙여야 쓰겠나· 난 삼두신룡이 괜찮다고 보네· 삼두신룡이라니 어찌 용이 머리가 세 개 아· 그렇군· 머리가 세 개· 그럼 삼두봉추여야지 어찌 용을 쓰나?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머리가 셋 달린 용이나 봉이라고 해봐야 마물이 아니냐·
새로운 미인이니 무림육화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럼 신룡검화라 해야지· 그럼 검화가 둘이 되지 않냐· 그럼 신룡신화? 음· 자네는 그냥 별호 짓겠다고 나대지 말고 가만히 듣기나 하는 게 좋겠어·
다만 별호에 대한 접근들이 서문수린이 들었다면 꽤 격노할 만한 방향이었다·
신위에 대한 예찬은 없이 그저 미인 혹은 젖통이 크다는 소리밖에는 없었으니 사실 강호 인심에 여인이 강해봐야 어디다 쓰냐 하는 못된 기저 심리가 깔린 것이다·
그리하여 결승 비무 당일 우아하게 솟아 가볍게 내려앉은 청에게 무수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소림 제자가 나타났을 때보다도 훨씬 그 성량이 우렁찼으니 그야말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지상 최대의 울림이었다·
청이 초월적인 청력으로 하는 소리 몇 개를 잡아 들어보니 음· 뭐야?
삼두미봉 음· 어떤 새끼인지 봐 둬야지·
파패신녀? 아주 지랄이 났네·
화시가인? 돼지라고?
파패波霸라 하면 으뜸가는 물결이라는 뜻으로 가슴이 큰 여인을 말했다· 청이 거지 시절에 제법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중원에서 큰 가슴이 흉이 되기에 좋은 뜻의 어휘는 아니고 돼지년아 비슷한 어휘가 된다·
사실 청의 고향에서도 가슴 큰 여인을 젖소라고 부르기 시작한 때가 얼마 되지 않았다·
동서양을 아울러 가슴 큰 여인에 대한 멸칭은 돼지다· 근본 있는 단어인 것이다· 그리고 중원에서 가슴 큰 여인이 천대를 받았으니 돼지년이 된다·
하지만 꽃돼지라는 말은 별개다·
중원 사람들이 제 연인을 부르는 가장 친근한 달리 말하면 제일 닭살 돋는 애정의 표현이다·
가슴이 크기는 해도 외려 애정하겠다는 화시가인이라는 말에는 중원 사람들의 해학이 듬뿍 담겼다고 하겠다·
아주 좆같은 해학이었다·
물론 꼭 가슴가슴 노래만 부르진 않았다·
발산동지 산을 뽑고 땅을 뒤집는다·
항우선녀는 음· 보통 항우 뒤에 선녀가 붙을 수가 있는 단어인가 싶다·
아마도 소림승의 손목를 붙잡고 휘둘러 메쳐댄 괴력이 인상이 깊었던 모양·
천하제일미녀는 좀 그렇네· 천하에 예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쑥쓰럽게·
검후미인은 벌써 검후 소리를 하나···
온전히 저를 향하는 환호성에 속이 간질간질한 것이 음· 이러니까 또 나쁘지 않네·
그래도 좀 진정들을 하시고·
청이 손을 들어 관중들을 진정시켰다·
뒤이어 나타난 공손요예에게는 환호성이 크지 않았으니 이러니 또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도 멋들어진 별호가 생긴 모양으로 헌원현녀라니 뭐야 왜 그럴듯 한데·
“서문 소저· 제 부탁 잊지 않으셨겠죠?”
“응· 잘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어제오늘 내내 열심히 궁리를 해 보았지만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죽일 기세로 해야 진심이 되는 걸까·
“그럼·”
공손요예가 가볍계 목례를 올리고는 양손으로 굳게 쥔 장검을 높이 치든다·
그러자 거대한 검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청의 얼굴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두터운 검 그림자다· 하늘을 둘로 나누는 거대한 검기가 한없이 위로 치솟아 창대하게 펼쳐진다·
거기에 깃든 막대한 기운에 청이 이를 꽉 악물었다·
이게 바로 진원을 소모하는 진짜 헌원검이구나·
그에 화답하듯 청의 검에서 최고 출력의 검기가 피어오른다· 검사가 어리다 못해 대검처럼 크게 부풀어오르는 청의 특제 검기 초월이다·
일 장 높이로 쭉 늘어난 공손요예의 검과 좌우로 넓어진 청의 검기 대검이 요란하게 꽝 부딪쳤다·
단순한 태산압정의 초식에서 느껴보지 못한 강한 압력이 밀려든다·
두근두근 약동하는 예의 검기·
생명을 태워 이끄는 강대한 힘·
하· 나도 진짜· 완전 글러먹었네·
사실은 공손요예를 얕잡아보고 있었다고 어차피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또 이렇게 한 수만에 크게 내몰리고 만다·
그런데 저거 완전 사기 아냐?
무슨 검이 늘어나? 그것도 일 장짜리 검을 휘두르면 검격의 범위가 대체 어떻게 되냔 말이야·
검이 길면 거리도 길다·
그리고 종심에서 휘두르는 반경이 머니 그 끝에 붙는 속도는 그야말로 빛살과 같아 선이 아닌 면을 그리며 쇄도한다·
검객을 상대하는 무투가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거리를 좁혀야 하는데 이걸 어찌?
일 수는 맛보기였다는 듯이 가로로 베며 공간 자체를 점유하는 검격이 뒤를 잇는다·
질량 없는 검기는 막아내도 튕기지 않아 지긋이 밀어내며 압박을 가할 뿐이다·
공손요예의 검기는 황제의 색 붉은색과 보라색 사이 귀한 염료로 물들인 고귀한 색채다·
청이 일자로 쭉 뻗은 검기를 우로 밀어 막아내며 발걸음을 뗀다· 저저적 검기끼리 부대끼는 기이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마구 흝어지는 검기의 불꽃이 검면을 따라 공손요예에게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순간 검으로 와닿는 압력이 탁 풀려 사라지고 만다· 공손요예의 검이 줄어들어서 검기가 짧아져 맞댐이 풀렸기에·
힘을 주어 밀어내던 청의 검이 허공을 휘젓는다· 기대던 몸이 휘청였다·
공손요예의 검이 선에서 점으로 변한다·
청을 똑바로 향한 찌르기였다·
검기가 그저 쭉 늘어나는 것을 찌르기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청이 기겁했다·
철판교? 아냐· 아래로 꺾일 수 있어·
아직 거리가 멀어 공손요예의 검은 아주 자유롭다· 푹 찌른 후에 내리는 것만으로도 철판교를 세로로 가르는 치명적인 일격이 될 수도 있다·
청이 물에 뛰어드는 자세로 몸을 날렸다·
바닥을 두 바퀴 굴러 벌떡 일어나니 다시 늘어난 검기가 청을 쫓는다·
청의 용천혈에서 강맹한 진기가 솟았다· 용천혈이란 발바닥의 앞꿈치 두 뼈 사이에 있는 기혈의 자리다·
탁 탁 탁 청의 보폭이 성큼 길어지며 큰 원을 그리고 눈빛은 흔들림 없이 공손요예를 향했다·
청이 소용돌이치며 점차 중심으로 공손요예를 향해 거리를 좁힌다·
청의 뒤를 쫓아 빙글빙글 돌던 공손요예의 검기가 자취를 감춘다·
그만 돌고 어서 오라는 듯 검끝을 바닥 위에 가볍게 대고 지팡이처럼 짚어서 서는 것이다·
청이 그 부름에 답한다·
격공순신 신투의 거의 모든 것인 절세의 신법이 펼쳐지니 청의 시야에서 공손요예의 전신이 일순간 상체만으로 확장이 된다·
청이 신녀검의 초식을 막 펼치려는 때-
문득 얼굴로 손의 피부로 느껴지는 기이한 대기의 흐름· 청이 발뒤꿈치로 비무대를 쾅! 바닥이 박살이 나고 나무조각이 튀어오르는 무식한 짓밟음· 청의 몸이 곧게 펴져 뒤로 발사된다·
그리고 높이 뜬 상공에서 공손요예를 감싸는 성긴 그물을 보았다· 검기가 그리는 궤적이 온 사방을 뒤덮어 그물의 형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와· 각성신공· 이거 효과를 좀 보네·
그런데 저게 대체 무슨·
무학이란 일정한 수준을 넘으면 사상에 닿는 지점이 있다· 그저 칼을 휘둘렀다 빠르게 천천히 강하게 부드럽게를 떠나서 개인이 정의한 마음의 검을 꺼내 세상 밖에 내어놓는 기적이다·
공손요예의 초식은 청은 이름을 모르지만 굳이 하나 붙이자면 필살 순식간에 마구 휘두르기쯤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검격 하나하나가 극에 달한 강격 거대한 힘으로 속도를 이끌어 사방을 에우는 중의 묘리를 담았다·
사방으로 촤자작 펼쳐져 장미처럼 만개한 검기의 그물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취를 뚝 감추었다·
공손요예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서문 소저· 월봉 스님 때처럼 윽박질러 넘어가실 수는 없을 거예요· 그건 솔직히 무공이 아니었지요? 타고난 힘과 감각으로 윽박지르셨을 뿐이니까요· 그러지 마시고 부디 진심을 보여주시겠어요?”
“나는 그 진심이란 걸 잘 모르겠어· 난 내가 익힌 것들이란 전부 살육을 위한 그런 무공들인데· 내가 살검을 펼쳐야 진심이 되는 걸까?”
“그야· 저는 알 수 없겠지요· 서문 소저께는 서문 소저의 무학이 있을 테니까요·”
“내 무학이라·”
검은 베는 도구·
애초에 뭐 인류의 역사를 따져도 그렇지 않나? 아니면 뭐 제사 도구? 아니면 권력의 상징?
거기에 학문이라고 할 만한 깊이가 있는 걸까·
“자· 이번엔 제가 가겠어요·”
탕! 진각을 밟는 소리가 날카롭다·
공손요예의 빠름이 보통이 아니다·
대련에서 보아온 속도와는 사뭇 다르니 역시 선천진기를 태워 나오는 화력이겠지·
오래 끌면 끌수록 예의 진원만 계속 소모할테니까· 역시 살검을 써서라도 빠르게 끝내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청의 기세가 일변했다·
곧장 부드럽게 밀려나오는 왼손 데엥 장엄히 울려퍼지는 범종의 소리· 그러나 그 결과는 무참하다· 비무대의 단단한 나무 바닥에 부처의 거대한 손자국이 콱 찍힌다·
순간 지켜보던 소림 무승들이 벌떡 일어나며 일제히 여래신장을 연호했더란다·
그러나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공손요예가 청의 아래로 파고든 상태다·
이런 더 빨라질 수도 있었구나!
청의 검끝이 공손요예의 목덜미를 향해 쭉 뻗어나간다· 그러자 검면을 밀어내는 손등 공손요예의 왼손도 놀지 않기에·
청이 검을 비튼다· 감히 검에 손을 대는 손등을 베어버리려는 듯이· 그러나 상서로운 색채의 내기가 피어오르니 팡 하는 작은 폭발음과 함께 청의 검이 멀리 떠난다·
공손요예가 검날을 밖으로 향하고는 번쩍 치들어 손잡이 끝으로 청의 관자놀이를 향해 망치처럼 휘두른다·
순간 청의 눈이 번뜩였다·
꽈릉! 번개 치는 소리와 함께 주양세심경의 노을빛 진기가 튄다· 빡! 호되게 뼈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공손요예의 어깨가 거칠게 밀려나갔다·
천하십대마공 중 하나 자전마공의 호신 번개다·
음· 될 것 같더라니· 진짜 되네·
각성신공의 공능으로 예리하게 벼려진 감각 덕분이었다· 여느 때보다 대기의 흐름이 날카롭게 피부에 닿다 보니 자전마공 역시 제어가 가능하겠다는 판단이 섰으니까·
제어가 안 되더라도 뭐 다른 데를 때렸겠지만 맞추려던 어깨에 맞췄으니 기쁘기도 하고·
그런데 이걸 막 써도 되나?
에라· 모르겠다· 진심이라니까·
사부님도 우기면 그만이라 하셨고·
보라색 아니고 노을빛인데 주양마공 아니 마공이면 안 되고 주양전신공쯤 우기면 되지 않겠어·
청이 사납게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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