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3
설이리는 표정이 엷다·
익힌 무공 때문이라기엔 설가놈은 꽤나 표정이 풍부한 편이었다·
특히 물을 뒤집어쓰고 가만히 책망하는 표정이 일품으로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을 정도로 분노와 처연함 그리고 그게 전부 네 탓이오 하는 생생한 현장감이 있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생겨먹기를 그냥 저렇게 생겨먹은 천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뚱하니 청을 바라보는 말은 없는 주제에 가만히 있으면 지긋이 청을 계속 바라보고만 있으니 뭐야·
물론 표정이 엷다고 해서 감정이 옅은 것은 아니라서 호불호는 아주 억세게 강하고 또 지금도 보라·
식탁에 앉아 청을 바라보는 설이리는 아무런 표정이 없지만 시선을 조금 내리면 손가락이 금을 타듯이 소리 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본래 사람이 손을 꿈지럭거리는 데에는 여러 감정이 있어서 보통은 불안함이라고 표현이 된다·
그러나 청이 그 몸짓을 해석하는데는 큰 눈썰미가 필요하지 않았으니·
“설 소저· 침 흘러요·”
“아녜요·”
냉큼 입가를 쓱 훔치고는 그 손을 식탁에 슥슥 비빈 설이리가 아닌 척을 했다·
그러나 대답하는 소리가 은근 활기차다·
매양 식사마다 맛난 거 먹이고 다녔더니 식탁 앞에서 기대감 폭발로 신이 난 것·
밥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건 개나 할 짓이 아닌가? 완전 개네· 개년이야·
도도한 척은 다 하더니 밥 앞에선 물을 줄줄 흘리는 음란한 암캐 같으니·
하지만 청은 본래 밥 인심 하나는 푸지다 못해 생불 수준에 이르렀다·
곧 죽여야 할 원수라도 밥만은 챙겨주는 청이었으니 밉상이긴 해도 나름 길동무 길동무까지는 못 되고 애완동물이나 죽부인 정도지만 어쨌거나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맛난 밥 먹여주는 정도야 당연하지 않나·
게다가 사실 밥도 함께 먹어야 맛있다·
또 사주는 밥을 아주 맛나게 먹어주기만 해도 사주는 사람에게는 보람찬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이리는 식사 상대로는 퍽 괜찮은 편이었다·
일단 잘 먹고 많이 먹는다·
추운 동네 출신들이 대식가인 점은 인류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고 청이 볼 때는 중원식 미인류로 깨작거리기보다는 복스럽게 팍팍 먹는 모습이 훨씬 보기가 좋으니 이는 추가 점수를 줄 만한 요인이다·
그런데·
“하읏 앗 하으···”
다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음란한 소리를 내며 추잡하게 처먹기는 해도·
설이리는 일단 팔팔 끓는 음식이라면 아주 사족을 못 썼다·
걸쭉한 국물이 펄펄 끓으면 그 안쪽은 훨씬 더 뜨겁다· 청이 생각하기에는 수저가 녹아 쇳물이 될 정도의 온도와 비견된다고 여길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그런 걸쭉한 국물을 저 깊은 곳에서부터 제대로 크게 한 숟갈 가득 퍼 올려 불지도 않고 입에다 처넣는 것이다·
그리고는 입 안에서 식혀먹는다!
하읏 흣 후읏 후읍 하는 소리가 전부 입 안에 용암을 처넣고 식히는 소리였다·
이 무슨 근본없는 식사예절이란 말인가·
빙궁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입안에 내열 처리를 했는지 아주 경이로운 광경이지만 소리가 참으로 민망하다·
거기에 더해 첫입을 꿀꺽 삼키고 난 이후 곧장 땀을 퐁퐁 흘려대기 시작해서 식사를 마칠 때쯤 되면 은빛 머리카락이 흠뻑 젖고 턱에서는 땀방울이 똑똑똑 떨어졌다·
“설 소저는 땀이 참 많으시네요·”
“네·”
“평상시에는 안 흘리잖아요·”
“빙공을 써요·”
“잘 때도요?”
“네· 그러니까 끌어안지 마세요·”
“왜요?”
“더워요·”
“흠·”
청이 곰곰이 생각하는 척을 하다가 대답해 주었다·
“싫어요·”
그에 설이리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은 흥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맨날 싫어요 이러면서 본인이 당하니까 기분이 상해요? 에잉· 못 써· 쯧쯧·”
“····”
그에 설이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비 오니까 돌아다니기는 뭐하고· 딱히 여독이랄 것도 없는데 하루 쉬어 가기도 좀 그렇고· 그냥 바로 출발하는 게 낫겠어요·”
청은 비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내가 젖을 일이 없고 또한 따뜻하거나 시원한 방 안에서 창문 열고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지켜보는 것만 좋아한다·
내가 맞거나 그로 인해 눅눅하고 끈적하고 꿉꿉하기는 딱 질색이었다·
그게 무슨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비가 아니라 눈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치울 필요 없는 상황에서 굳이 외출할 용무 없는 때에 내리는 눈을 모두가 좋아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 방에 납득일 터다·
마방은 중원의 사업 중 하나로 본래는 관이 도맡던 일이 평화가 지속되며 민간에 이양되었다·
그러나 청의 고향에서 말하는 민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굳이 말하자면 민영화가 아니라 강제적인 떠넘기기였으니까·
너네가 말과 마차를 가지고는 있다·
하지만 천자께서 쓰자 하지면 전부 고스란히 내놓아야 한다·
그전까지는 감히 너희 미천한 양민들이 말과 마차를 잠깐 ‘보관’하도록 허락해주마·
뭐? 그럼 안 하겠다고?
역모다! 목을 잘라라!
그러니 마방 주인들은 언제고 관에서 징발하면 쫄딱 망해버릴 사업을 강제적으로 계속 진행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다고 불쌍하지는 않다·
마방 주인은 털어먹을 희생자들을 적당한 강도에게 알선해주는 일로 쏠쏠한 뒷돈을 챙긴다·
말과 마차는 징발되더라도 자기 재산만은 보전할 수 있으니 벌 수 있을 때에 수단을 가리지 않고 벌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여기에 또 희생자가 한 무리·
여인 둘이 마방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일단 그 미모가 천하절색 경국지색의 미인들이었다·
검을 차고 있으니 일단은 경계해 본다·
그러나 키 큰 쪽의 여인의 태도가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고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었으며 뭐라 말을 할 줄을 몰라 우물쭈물 먼저 물어봐주길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덜 큰 쪽 여인은 뚱하니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이기는 하나 손에 손바닥만하니 평평하게 누른 왕사탕의 막대를 쥐고는 입에 물어 우물거리는 통에 아주 맹하고 멍청한 인상을 준다·
마방 주인이 쾌재를 불렀다·
무림의 철부지 계집년들이로구나!
“마차를 찾으십니까?”
“아 네· 그· 마차· 장안에 가려는데···”
마방 주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여행 경험도 없는 완전 철부지들이구나!
무슨 낙양에서 장안까지 가는 마차를 찾는단 말인가·
본래 마차란 다음 도시에 들러서 반납하고 갈아타는 것이다·
너무 멀리 가면 마방끼리 마차를 돌려보내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런· 소저· 마차를 대여하시면 다음 도시에서 마방에 마차를 반납하시고 갈아타셔야 합니다· 음· 장안이면 낙녕까지 가서 갈아타시면 되겠군요·”
이 새끼 좀 봐라·
청이 모르는 척을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장안까지 가려면 황하를 옆구리에 끼고 큰길 따라서 쭉 향하면 그만이었다·
굳이 낙녕으로 보내는 이유야 뻔하다·
길이 더 멀고 돌아가야 하니까·
“네 넷· 그런데 돈이 얼마나·”
“아아· 그런데 마차는 좀 비쌉니다만·”
“그 얼마나요···?”
“마차에 따라 다릅니다만은·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습니까?”
“은자 스무 냥 정도는···”
“아이고· 그걸로 마부까지 다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 새끼가 또 수작질이네·
강도 알선에 바가지까지 씌우겠다?
그 꼴은 못 보지·
속마음과는 달리 청이 소심하게 항변했다·
“그치만 이거면 충분하다고···”
“음· 그래서야 좋은 마차는 힘듭니다만·”
“으· 어쩔 수 없지· 다른 마방에 들렀다가 올게요·”
청이 그리 말하며 설이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에 설이리가 순순히 손을 잡았다·
설이리는 손을 잡는 데에는 의외로 아무 말 없이 순순히 따랐는데 물어보니 청의 손은 시원해서 괜찮다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중원의 더위에 적응을 못 하는 설이리였다·
빙공으로 계속 차갑게 하고 있으니 적응을 못 하는게 아니라 안 한다 아예 적응할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청이 익힌 소수마공으로 싸늘한 손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
손만 내밀면 순순히 척 붙잡아 붙들더라·
“아이고· 비도 오는데 괜한 걸음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기 가나 저기 가나 본래 싯가라는 게 다 똑같은 법이지요· 으음· 어쩔 수 없지요· 소저들께서 어여쁘시니 제가 크게 한 번 인심 써 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청이 마방의 최고급 마차에다 숙련된 마부까지 딱 추천을 받았다·
마차 모는 실력은 모르겠지만 악업을 보니 마부의 부업은 열심히 해 온 모양·
청은 저 심해에 사는 아귀나 다름없다고 하겠다·
저 심해에 사는 아귀라는 물고기는 제 이마에 빛나는 더듬이를 달아놓았는데 거기에 홀려 몰려든 피래미들을 덥썩덥썩 한 입에 삼키는 흉악한 생물인 것이다·
청이 한 번 성공한 마부 낚시에 재미를 들렸으니 아예 작정하고 털어보라고 살살 야광 더듬이를 흔드는 것이다·
은자 스무 냥에 최고급 마차에다 마부다·
낙녕까지 사흘 혹은 비 와서 나흘 닷새까지 걸릴 수 있는 여정이기는 해도 조금 바가지를 쓴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저번에 강도들 베고 약탈한 금액이 이백 냥이 넘었으니 이 정도 투자야 뭐·
마차에 올라타고 나선 설이리가 그제야 한 마디 툭 던졌다·
“마부가 못생겼어요·”
“허어· 그런 나쁜 말 하면 안 돼요· 못 생긴 것도 서러운데 그런 말까지 들으면 또 얼마나 서럽겠어요?”
그에 설이리가 고개를 저었다·
청이 경험한 바 저건 그게 아니라 라는 말 대신이다·
무슨 입에 가시가 돋쳤나?
왜 말을 줄이지 못해 안달이야?
“인상이 나빠요·”
“에이· 사람 인상 보고 평가하게요?”
설이리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그저께요·”
“뭐요· 저번에 그 생불같이 생긴 사람은 인상이 좋아서 그 짓을 벌였겠어요?”
그에 설이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설이리는 할 말이 없으면 입을 다문다·
그리고는 다시 왕사탕을 입에 물고 우물우물 녹여내기에 열중하는 것이다·
청이 그 자태에 새삼 감탄했다·
와· 저러니까 진짜 어딘가 모자란 애처럼 보이네 하고·
—-
청이 지난 번 마부의 불순한 시도와 그로 인한 결과에서 배운 교훈은 가히 이 년 차 낙양행에서 얻은 깨달음에 비견될 정도다·
상행에 끼면 밥도 주고 용돈도 준다!
강도 마부를 만나면 죽여도 되고 금전도 굴러들어온다!
생각해보니 저번 깨달음도 낙양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얻었으니 낙양에 뭐가 있어서 이리 큰 가르침을 내려주는 것인지·
백마사? 백마사인가?
한번 둘러서 불공을 드렸어야 아차·
불공 하니 또 까먹고 있던 불경 독송이 떠올라서 청이 다시 반야경의 광명한 글귀를 맑은 목소리로 꺼내 들었다·
가자 가자 저 승천의 언덕으로· 온전히·
어차피 설이리는 동행으로 글러먹었고 비 와서 어두침침하니 바깥 구경도 별 거 없으니 청이 그냥 마음 공부나 열심히 중얼중얼··· 드르렁! 은 얼마 안가 바로 코 골아대며 고개를 픽 기대고 말았더란다·
다만·
의외로 별 일이 없다?
청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 맞았는지 사람 외모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마부는 친절하고 싹싹하며 마차도 잘 몰았다·
그렇게 낙녕 가는 길에 중간중간 마을에 들러 밥 먹고 또 밤에는 자고· 비 때문에 때가 안 맞을 때는 있어도 아주 성실하게 마부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어라· 이게 아닌데·
청이 크게 실망했다·
다만 특이점은 하나 있었는데·
“설 소저? 어디 아파요?”
설이리가 아주 땀을 쭉쭉 뺀다·
그냥 빼는 게 아니라 턱으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아니요·”
“웬 땀을 그렇게 흘려요? 안색도 안 좋잖아요· 아프면 말을 해야죠·”
설이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더워서요·”
“엥· 빙공은 어쩌구요·”
“위험에 대비해서요·”
저번 마부의 공격에 설이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는 빙공을 계속 운용하느라 독이 드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눈치를 채고 나서는 내공이 거의 바닥이라 대응하지 못했다·
저번에 감기 걸린 이유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니 인상부터 수상한 마부 때문에 혹여 모를 위험에 대비해서 빙공의 운용을 멈춘 것이다·
그리고 빙공을 멈추면?
덥다·
이제는 칠월 초순· 비가 내린다고 해도 덥기는 더워서 오히려 습하고 더워서 쩍쩍 달라붙어 꿉꿉하니 지저분한 더위다·
하지만 청은 이미 한기불침 추위에 대한 아주 강력한 내성과 그 곁다리로 더위에 대한 그럭저럭한 내성을 갖췄다·
그렇다고 덥지 않은 것은 아니라서 덥기는 똑같이 더운데 땀이 배어나오고 끈적한 느낌은 덜해서 그냥 가만히 있으면 버틸 만은 한 정도?
“가만히 있으면 안 더워요·”
청이 말하고 나서야 어르신들이 매양 하시던 말씀 가만히 있으면 안 덥다는 말의 요체를 깨달았다·
그에 설이리의 이마에 또 핏대가 솟았다·
마차 내에서 설이리가 한 일이라고는 가만히 있기가 전부였으니까·
청이 헹 코웃음을 치며 설이리를 놀렸다·
“정 더우면 내 손이라도 잡고 있을래요? 내가 원래 손이 좀 많이 찬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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