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
화려만발한 술상은 겉보기보다는 실속이 다소 떨어지는 상태였다·
미리 준비한 음식이라 식어서 미적지근했다·
술도 밍밍하니 거의 도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청은 대단히 만족했다·
왜냐하면 공짜니까!
게다가 다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겠는가·
배 위에서는 화기엄금·
물놀이 중에는 주취엄금·
청이 와구와구 음식을 쓸어담았다·
서문수린이 보았다면 기겁하며 핵꿀밤 융단폭격초토화 작전을 가했을 장면이었다·
중원의 미인적 식사란 이러했다·
참새 눈물만큼 집어다가 살며시 입에 넣는다·
앙다문 입술을 아주 살짝 오무린 모양으로 오물오물 작은 턱짓으로 씹어야 한다·
그리고 다소 과장된 동작으로 삼키기·
표정은 상시 주름이 가지 않도록 아주 살짝 찌푸린 상태를 유지할 것·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다시 나오지 않을 절대적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미인 고금절대미인 서시의 식사법이었다·
서문수린은 이 미인적 식사법을 전파하기 위해 강력한 주체적 핵무장을 갖췄다·
그래서 청도 이 대단히 아름답다고 하는 식사법을 매우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었다·
매 앞에는 장사 없는 법이었기에·
만약 매 앞에서 버티는 자가 있다면 혹시 매가 모자라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문수린은 청을 너무 얕잡아보았다·
인간 교정에 대한 이해가 쪼끔 모자랐다·
아예 예와 멋을 버릇으로 들이겠다는 그 발상은 중원의 모든 스승들이 벌떡 일어나 배움을 청할 만큼 혁명적이었다·
그 성과가 청이었다·
청은 이제 마흔 두 가지의 머리 묶음을 완벽히 구사할 수 있었다·
조금 풀린 느낌이 든다 싶으면 손이 저절로 움직여 바로잡는 경지에 도달했다·
성큼성큼 나아가던 보폭이 줄고 천방지축 나아가던 이동 속도도 느긋해지며 여인다워졌다·
내공을 사용해 옷의 주름을 펴는 방법을 알고 터진 솔기를 아주 깔끔하게 꿰맬 줄도 알았다·
그러나 버릇이란 결국 무의식의 영역이다·
무의식을 뛰어넘는 욕망이 있어 어떤 행동들은 절대로 버릇이 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취향이라던가·
청은 본래 음식이 한가득 입에 들어가 가득 채우는 그 중량감을 사랑했다·
핵꿀밤으로 억압되었을 뿐 이제 자유의 몸이 된 이상 더는 참을 필요가 없었다·
너무나 먹성 좋은 청의 모습에 차남정조차 조금 깰 정도였다·
“낭자 좀 천천히 드시오· 다른 요리도 있으니····”
“아 그것도 먹을 거니까 괜찮아요·”
“···?”
여류 무인이라더니·
거지새끼가 들었나 먹은 게 다 가슴으로 가나 도대체 어떻게 저리 많이 처먹을 수가 있나·
차남정은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무슨 놈의 계집년이!
애교도 없고 교태도 없다·
부찰도위사의 며느리 자리를 노리고 살살 기며 비위를 맞추는 그런 맛이 없단 말이다!
이러면 재미도 없다·
유혹으로 쓴 가면이 벗겨지는 그 순간 그 순간이 중요한 것이었다·
욕설을 하며 반항을 하면 더 좋고 울고불고 살려달라고 비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온통 먹을 것에만 정신이 팔렸으니 화가 안 나고 배기겠나·
차남정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얼추 배를 채운 청이 술을 즐기기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분노가 사라졌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홀짝거리는 청의 주도는 서문수린의 혹독한 핵꿀밤에게서 가장 피해가 적었던 부문이었다·
게다가 청은 소수마공을 익혔다·
저주받을 마공과 주도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 싶겠지만 소수마공의 특징 중 하나가 아름다운 손의 모양이었다·
세상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우나 또한 세상 가장 잔혹한 섬섬옥수·
소수마공을 묘사할 때 빠지지 않는 문구였다·
손의 살결은 희다 못해 투명할 지경이다·
늘씬하고 길쭉하니 유려하게 뻗은 손가락이 술잔을 살포시 감싸 안은 자태는 질척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난간에 기대앉아 잔을 들이키는 청의 옆모습은 그 자체로 사내를 홀리는 마성을 뿜었다·
차남정이 부풀어오르는 분신의 기상을 느끼며 느물느물 미소지어 다가왔다·
“술이 입에 좀 맞는 모양이오?”
“좀 독한 술이면 좋겠는데요·”
밍밍하니 영 술 같지 않은 술이었다·
“그야 낭자가 취하지 않았으면 하니까· 취하여 정신이 혼미한 여인은 영 재미가 없다오·”
“재미? 무슨 재미요?”
“글쎄····”
뱃전에 있던 사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청을 둘러싼 사내들이 칼을 뽑았다·
“오·”
청이 두근두근한 가슴을 다잡았다·
드디어 시작일까?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
“일 각· 딱 일 각의 시간을 주겠소·”
“일 각?”
“우리는 일 각 후에 출발할 터이니 어디든 도망쳐 보시오· 반 시진만 버티면 무사히 돌려보내주지· 약속하겠소·”
“못 버티면?”
“오늘 우리 모두와 운우지정을 나누는 것이지·”
오우· 한 두번 해 본 기획 실력이 아닌데·
청이 흐뭇해졌다·
그러면 나도 마음 편히 즐겨도 되겠구나·
“아· 혹시 이제와서 배 밖으로 뛰어내리는 방법은 추천하지 않는다오· 여기가 바로 서릉협이니· 자결의 방식으로는 퍽 고통스러울 것이오·”
서릉협은 본래 그 험함으로 유명했다·
위아래의 물길이 다르고 위아래로 꺼지고 치솟는 용소가 곳곳에 깔렸다·
그 탓에 강물마저 싯누런 색을 띨 정도였다·
어지간한 무림인들조차 헤엄치지 못하고 휩쓸리는 험역이기도 했다·
“흐음·”
청이 천천히 걸어나갔다·
칼 든 사내들이 길을 틔워주듯 몸을 기울였다·
비켜주지는 않았는데 지나가려면 몸이라도 비벼 보라 뭐 그런 뜻이겠지 하고·
청이 그 사이로 지나가지 않았다·
대신 사내의 칼날을 맨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꽃 붙은 나뭇가지를 떼어내듯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똑 부러뜨렸다·
청이 칼날을 든 손을 꽉 쥐었다 폈다·
가늘고 길게 구겨진 칼날이 툭 바닥을 굴렀다·
사내새끼들끼리 짓궂게 낄낄거리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청이 칼날을 쥐어짰던 손바닥을 세심히 살폈다·
생채기는 커녕 눌린 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그제야 청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거거든·
이 맛에 보라색 무공을 배우는 거지·
“자· 봤지? 강간범 새끼들아· 아주 꼴값을 떨고 앉았어요· 이 쫍아터진 배에서 도망치긴 뭘 도망쳐? 하늘로 솟을까? 땅으로 아 땅은 없지· 쨌든· 하여간 고추 달린 새끼들이 정정당당하게 고백 공격으로 승부하지 않고· 아주 고추 망신은 다 시켜요· 내가 다 창피하네 아주·”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사내들의 시선이 청과 칼날이었던 철사를 번갈아서 오갔다·
“얼씨구?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새끼들아·”
청의 손이 위로 치솟았다 아래로 떨어졌다·
손가락 네 개가 사내의 정수리쯤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두개골을 지나 뇌를 헤집는다·
안와와 광대 위 턱뼈와 치아를 거쳐 아래 턱뼈로에 이르기까지·
고운 모래를 퍼내듯 부드럽게 도려낸 손가락들이 목젖 앞으로 빠져나왔다·
안면에 네 줄기 깊은 고랑이 파인 사내가 털썩 자리에서 쓰러졌다·
시체가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신경이 덜 죽어서 그렇다·
시체의 대가리에 깊게 파인 네 줄기 자상·
거기에 부풀어오른 속이 올록볼록 튀어나왔다·
세상에 이런·
청이 몸을 떨었다·
손가락 마디마디 길쭉한 그 전체를 써서 남의 머리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어떤 비유법이 아니었다·
진짜 물리적인 방문이었다·
거기에는 뼈를 후벼파는 진한 감동이 있었다·
단전으로부터 진한 열기가 전신으로 뻗었다·
밍밍했던 술 따위보다 훨씬 감미로운 취기가 온 신경을 훑어나가 찌릿하게 휘저었다·
진짜 검하고 맨손은 완전히 다르구나·
장갑 끼고 코 파는 거랑 똑같은 거였네·
기분이 좋아진 청의 입꼬리가 거의 귓가에 닿을 지경까지 쭈욱 늘어났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도망 안 치니? 옳지· 가라! 내 월광검···은 저쪽에 있으니까· 다시·”
청이 연신 주먹을 쥐었다 펴며 다시 말했다·
“자 내 월광손이 굶주렸다· 꼭꼭 숨고· 머리카락 보일라·”
—-
차남정은 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뭐냐! 뭐냐고 그 년은! 그게 사람은 맞냐! 아주 미친 계집이잖아!”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건든 것 같습니다만·”
“넌 여기서 뭐해! 그래봐야 계집 아냐? 왜 가서 안 잡고 이러고 있어? 그냥 죽여! 그딴 년 더러워서 안 먹는다· 안 먹어·”
호위가 목을 움츠렸다·
“도련님 그년은 진짜 고숩니다····”
“뭐야? 그럼 넌 가짜 고수라고? 그래봐야 한 년 아냐? 여기 장정이 몇 명인데 지까짓 게·”
“도련님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면 보통은 깨지거나 터지는 게 정상 아닙니까·”
“그야 당연한 소릴·”
“그런데 그년은 무슨 진흙처럼 뼈와 살을 퍼냈단 말입니다· 칼을 써도 그렇게는 못 할 겁니다·”
호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게 가능하다 한들 실제로 또 그렇게 실행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호위는 정말로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제서야 차남정의 분기가 사라지고 희게 질린 얼굴만 남았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 있는 놈들 다 합쳐도 못 이깁니다· 절대 못 이겨요· 아주 제대로 잘못 걸렸습니다·”
“뭐 무슨 소리야! 너가 만만한 년이라고 분명히 그랬잖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아무리 무림 고수라도 부찰도위사를 적으로 돌리기에는 부담스러울 거라는 겁니다·”
차남정이 화색이 되어 재우쳤다·
“그러면?”
“일단 살살 달래고 재물로 회유하십쇼· 처먹는 걸 보아하니 어디 가난한 문파 출신인 모양인데 분명히 금전으로 수습이 가능할 겁니다·”
“그럴까? 그렇겠지?”
그때였다·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저기요 안에 계신가요? 분명히 이쪽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차남정과 호위가 입을 틀어막았다·
-없나? 내가 잘 못 들었나···
이상하다 하는 말을 끝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그 후로도 한참이나 입을 막고 있던 두 명이 자연스레 입을 막았던 손을 내렸다·
순간 선실 문에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돋았다·
아무 소리도 없이 마치 문을 통과하는 것 같은 모양으로 스르륵·
이내 손가락들이 아래로 내려간다·
그에 꼬리처럼 이어지는 긴 균열·
바삐 눈빛을 교환한 둘이 문이 붙은 벽 쪽으로 딱 달라붙었다·
문 너머에서 끔찍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실로 압도적인 살의였다·
-진짜 없네? 괜히 기다리고 있었네· 없는 척하는 줄 알았잖아·
그리고 나서야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다시 한참 동안 두 사람이 조각상 흉내를 냈다·
일각을 훨씬 넘기고 나서야 두 사람이 겨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저게 사람이야 귀신이야?”
“모르겠습니다· 강호가 워낙에 넓다···”
호위가 문득 말을 멈췄다·
“도련님···”
“왜?”
“배 안에서 걸을 때··· 발소리가 들립니까?”
“당연히 걷는데 발소리가 안 나게? 갑자기·”
“그··· 보통은 나무 뒤틀리는 소리가···”
“어?”
두 사람이 일시에 굳었다·
순식간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식은땀·
두 사람이 삐거덕거리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실 문에 세로로 길게 난 구멍 사이·
그들을 지켜보는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요기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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