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3
청이 반중력 보행으로 우아하게 뛰어올라 따각! 사뿐하게 내려앉으니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진다·
물론 양민들의 안목은 발목 언저리쯤에 달려있으니 천천히 떠올라 천천히 떨어지는 절세의 보법을 알아봐서는 아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신선과 같은 기상천외한 움직임을 눈으로 보았으니 여기저기 천녀님 혹은 선녀님 하며 손을 모으는 이들이 속출하는 것이다·
그에 청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니 군중이 좌우로 쫙 찢어져 길이 열린다·
바다를 찢은 누군가와 비견될 정도는 아니라도 꽤 인상 깊은 장면이라 하겠다·
청이 그 사이로 따각따각 당당하게 걸어 나가니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홀린 듯이 뒤를 쫓았다·
그 모습을 보는 걸타란의 눈시울이 붉고 안쪽으로는 눈물이 촉촉하게 차올랐다·
천마지존께서 백성을 이끌고 가신다!
패도가 아니라 선과 덕으로 중원 정복의 기틀을 닦고 계시니 아아 천마신교의 앞날에 광명만이 비치는구나!
다만· 좀 거룩한 위엄을 떨치시며 가시면 안 되실까····
그나마 걸타란이 감격으로 울음을 터뜨리지 않은 이유라면 역시 저 음란하고 요사하여 자연스럽게 사내의 혼을 빼놓는 걸음걸이 사이한 뒤태 때문이라고 하겠다·
어쨌거나 급히 정신을 차린 걸타란이 군중을 헤치고 청을 따라잡아 오른쪽 한 발짝 뒤를 점거하고 손을 모아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마치 이러니 천마지존의 오른팔이 된 것만 같아 계속 감동의 바다 웅비하는 기쁨에 이미 죽어서 극락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인가 어쩐가· 꿈인가 생시인가·
“걸타란· 이 동네에서 곡물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상단이 어디야?”
“그야 당연히 장흥상방입지요·”
장흥상방이라·
공사를 맡은 상방이랬던가·
방문을 해 보아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원래 제일 맛난 부분은 마지막 한 입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것이 맛을 잘 아는 지성인들의 합리적인 방식이기에·
“걔네는 좀 나중에 가고· 그 다음은?”
“그러면 당연히 낙령상단이지요·”
“좋아· 거기로 가자· 어디야?”
“그것이···”
그러자 걸타란이 머뭇거리며 좀체 입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뭐야 왜?”
“반대로 오셨습니다· 저 뒤편입니다·”
에이씨 방향 잘못 잡았네·
뒤쪽으로 군중들이 우르르 따라오는 때에 돌아서기도 힘들 뿐더러 이렇게 당당하게 앞장을 서 놓고서 ‘아 이 산이 아닌가 보다’ 하고 뒤로 돌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씨· 지금 후진하면 모양이 빠지잖아· 이 앞으로는?”
“저기 앞에 네 번째 큰 대문이 대완상회입니다·”
“좋아·”
그리하여 청이 대완상회 대문에 향했다·
본래 어느 도시건 간에 상방 거리란 마차가 여럿 다니기에 바닥이 단단하며 길폭이 무척이나 넓다·
짐마차 여섯 대는 너끈하게 지나가는 그 드넓은 길을 가득 메우며 행진하는 민중의 벽이다·
그런 벽이 다가오는 가운데 상방 거리의 장원 문지기들은 하나같이 이미 시리는 오금과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선 상태였다·
청과 군중이 스쳐 지나간 세 개 장원의 문지기들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대완상회의 문지기는 제발 그냥 지나가라 하고 부처님 상제님 천지신명 등등 온갖 신통한 분들에게 기도를 드렸더란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를 구해야 하는 법·
아무리 신통해도 신은 인간을 구해주지 않는다·
“안녕하신가요?”
“예 옛!”
“소녀는 서문청이라 하는 계집이랍니다· 대완상회의 주인분께 드리고자 하는 말씀 그래요· 좋은 말씀 전해드리러 왔는데요·”
“어 사전에 약조를 해 두셨는지···”
“이런 제가 경황이 없어서· 하지만 시일을 다투는 다급한 사안이고 방주? 단주? 회주? 어쨌거나 그분께도 좋은 말씀이 될 텐데 좀 들여보내 주시겠어요?”
“그것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요·”
그에 청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더 곤란해지고 싶으세요?”
“아니 아닙니다·”
쪽수 앞에 장사 없는 법이라고 이미 거리를 가득 메운 군중들 앞에 문지기들은 그저 무력한 개인일 뿐이다·
그리하여 대문이 활짝 열리니 청이 당연하다는 듯이 따각따각 당당하게 들어간다·
그 뒤를 민중이 따라 또 우르르 드넓은 상방의 장원 안에 사람이 차오르는데 문득 청의 앞을 가로막는 한 무리의 무인들이·
“멈추시오!”
“네·”
청이 순순히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는 대완상회의 사업장이오· 아무리 도시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한들-”
“저는 서문청이라고 합니다· 대협께서는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크흠· 이가검문의 일대제자 이반조라고 하오· 서문 소저께서는 어떠한 용무로 이리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오셨습니까?”
상방들이 도시 무관에 금은을 기부하고 그 협객들을 ‘초청’하여 머물도록 대접하는 일은 중원에서 아주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이는 무관들이 절대로 제자들에게 남의 집 경비를 시키는 일이 아니고 언제까지나 호의를 받아 손님으로 머물 뿐이다·
물론 이러한 경우는 거의 대부분 정파다·
사파 놈들은 금은을 기부받아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데다가 초청해봐야 소란만 생기지 전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그리고 정파 식구들이면 뭐·
“어떤 용무로 찾아왔느냐고 물으신다면 제가 무림대회에 참여했던 이야기부터 먼저 이야기를 드려야겠네요·”
청이 대뜸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꺼낸다·
“제가 미욱한 실력이나마 잠룡비무회에 우승하여 천화검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받아 그 기쁜 소식을 사문에 전달하러 돌아가는 길이 아니겠어요?”
이반조가 천화검 하고 중얼거렸다·
천상의 꽃이라는 말인지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답다는 말인지 어느 어느 쪽이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돌아가는 길에 도시에 들어서니 큰 흉사가 미쳤기에 소녀가 사재를 털어 구휼 사업을 벌이고자 마음을 먹었답니다 다만 가진 것이 금은뿐이라 상단주님께 좀 팔아주십사 부탁을 드리려 왔답니다·”
“크흠· 좋 좋은 일 하시는군요·”
“예· 그러하니 협사분들께서는 우려하지 마시고 길을 열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그야 당연히 좋은 일 하십니다·”
정파 무인에게 명분이란 생명과 같다·
물론 그만큼 명분에 있어서는 치열하기 짝이 없어서 겨우 이런 얕은 수작질이란 반박하고자 하면 반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잠룡비무회의 우승자라지 않나·
후기지수 중 최강자 그리고 무림맹에서 인정한 최고의 신성·
천화검이라는 거창한 별호에서부터 아주 높으신 분들의 위엄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여기서 척을 져서 좋을 일이 없고 구휼 사업을 펼치겠다는데 굳이 막을 이유도 없다·
이유가 없기는커녕 이반조가 오히려 한 술 더 떴다·
“그렇게 훌륭하신 뜻을 세우셨다니 저희 이가검문 역시 그에 함께하겠습니다· 뭣들 하느냐 혹여 소요가 있을지 모르니 제자들은 사람들을 지키지 않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편을 바꾸어 군중 앞에 척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리하여 청이 다시 따각따각 딱딱하게 야무진 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이끌고 장원을 가로질렀다·
그리하여 본청 앞·
“이 무슨 소란인가? 사전에 미리 약조한 바도 없건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고들어오는 법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냐?”
“소녀는 서문청이라 합니다· 무례인 바는 알지마는 사안이 사안이라 급하여 어쩔 수 없이 실례를 하고 말았답니다· 혹여 상회의 주인 분이 되시나요?”
“크흠· 본인은 대완상회의 총관을 맡고 있다오·”
“소녀가 가진 금은으로 구휼 사업을 벌이고자 하는데 곡식을 좀 팔아 주십사 하고 찾아왔답니다· 회주 분을 뵐 수 있을까요?”
“그 여쭤 보겠소이다·”
상대가 차라리 마구 무례하게 나서면 모르겠으나 대뜸 우르르 쳐들어와서 행패는 행패인데 태도는 그렇지 않으니 어정쩡하게 대꾸한 총관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나와서 말하기를·
“회주님께서 수락을 하셨소이다· 일단은 소저께서 안에 들어서 이야기를-”
“아니요· 저 혼자가 아니라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께서 함께 부탁을 드리러 온 바가 아니겠어요? 실례인 줄은 알지만 회주님을 이 자리에 모셨으면 합니다·”
청이 말을 뚝 잘랐다·
애초에 들어가서 일 대 일로 담판을 지을 것 같으면 우르르 끌고 오지도 않았다·
그냥 혼자 쓱 들어가서 검강이 반짝반짝 어떻게 빛나는지 보여준 후에 정중히 부탁하면 안 팔고 배기겠는가·
하지만 그런 식이어봐야 나중에 모른 척 하면 또 그만이고 수작질 끼면 머리도 아프고 무엇보다 사야 할 곡물이 산더미인데 일일이 전부 찾아다니며 부탁할 수도 없다·
우르르 끌고 가서 제일 큰 상방만 몇 개 조져놓으면 작은 가게들이야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를 수밖에는 없을 테니까·
“그 그건 곤란하오· 애초에 이렇게 많은 이들을 끌고와서는 협박이나 진배없는 것이 아니오?”
“협박이라니요? 부탁이라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이게 어떻게 부탁이-”
“앗· 갑자기 검강이 막 나오네· 총관님? 혹시 검강이라고 아세요? 이게 초절정부터 쓸 수 있는 건데요·”
중원의 평범한 양민들은 무공의 이름이나 그 수준을 알아볼 안목은 없다·
다만 경지나 용어에는 빠삭하니 제대로 꿰고 있으니 중원의 덜떨어진 놀이 문화로 무인들을 줄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익히게 되는 상식인 것이다·
그러니 반짝반짝 빛나는 섬뜩한 별빛을 본 총관의 마음도 덜컥 내려앉았다·
저게 참으로 검강인가 아니면 어떤 수법으로 사기치는 거짓 수작인지는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겠다·
집 지키라고 돈 쥐어준 이가검문의 무인들이 떡하니 편을 바꿔 서 있는데 다들 입을 헤 벌리고 찬탄과 놀라움과 존경이 담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여인의 검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회주님 언제 오시나요? 제가 연약하여 칼을 오래 들고 있기 힘들어서· 팔에 힘이 빠지면 막 어디로 휘둘러질지 저도 모른답니다?”
“아니 그건 진짜 협박-”
“앗 저 기둥! 되게 두꺼운 것이 한 명의 검객으로서 베어보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든다! 검강을 쓰면 당연히 잘리겠지?”
이젠 그냥 대놓고 협박이었다·
그에 총관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모셔오겠소! 모셔오겠습니다!”
대완상회 회주는 아주 싱글벙글이었다·
위기는 곧 기회 도시에 커다란 재난이 덮친 때야말로 상인들의 재산이 수십 배로 불어나는 그야말로 하늘이 주신 기회였으니까·
물론 아침에는 기분이 상하기는 했다·
태청상방인지 뭔지 무슨 상인의 자격조차 없는 잡놈새끼들이 구휼곡을 푼다고 지랄을 떤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어차피 기어들어온지 얼마 안 되는 신생 상방이 뭐 곡량을 조달해봐야 얼마나 조달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다가 창고에 물량 떨어지면 끝이고 그러면 그때부터는 곡식이 그야말로 금값 진짜로 금에 비견할 만한 가격이 되니까·
물론 저 가난해 빠진 양민들이야 곡식을 살 돈조차 없다·
그렇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으니 빚으로 달아논 후에 뭐 딸자식 있으면 데려다가 회수를 시켜도 되고 아니면 종놈으로 갖다 팔아도 되고 전답문서 빼앗아 오면 어쨌든 막대한 이득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본래 큰 재해 이후에 갑자기 쑥 성장하여 지부를 까는 상방이 생겨나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 싱글벙글도 여기까지였으니·
“아주 개떼같이 몰려와서는 회주님을 내놓으라고 난리입니다· 지금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아니 뭘하면 저 새끼들이 여기까지 들이쳐? 이가검문 놈들은 뭘 하고?”
“이가검문 놈들도 한패에 섞였습니다·”
“내가 금은을 얼마나 갖다바쳤는데! 대체 이딴 식으로 하고도 무관이 돌아갈 줄 알아!? 그럼 누가 보호비를 내고 기부를 한 단 말이냐!?”
기부는 안 할 수 있어도 보호비는 어차피 내야 하지 않나? 칼 들 깡패들이 내놓으라 하면 그걸 어떻게 안 줘·
총관이 그리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관은 관부에 사람을 불러야지!”
“부를 때 부르더라도 당장 저들이 돌변하면 그걸 어찌 막는단 말입니까? 일단 회주님이 나서서 달래건 약조를 하건 하셔야-”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저기 나가서 못 팔겠다고 하면 사람이 뭐가 되냔 말이야! 아주 낙녕 땅에 발도 못 붙이게 될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안 나갈수도 없다·
애초에 사람이 이만큼이나 모이지 않았나 개중 한 명만 소리쳐도 일순간에 강도로 돌변하는 것이 중원 사람들이라서·
그러니 어쩌랴· 일단은 나가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건 어쩌건·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회주가 그리 중얼거렸다·
청이 들었다면 꿀밤 참기 일만 배 쯤 할 푸념이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