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비록 청하사협 중 막내가 탈락하며 청하삼협이 되고 말았더라도 숫자 상 세 자루 대 한 자루의 싸움이다·
본래 셋이 하나를 상대하면 유리한 것이 정석이었으니 지금도 역시 그러했다·
이는 둘의 태도 차이에서 기인했다·
안성일은 숫자에 밀려 겁을 먹고 내뺄 궁리를 했으며 청하삼협은 단기 결전을 목표로 몰아붙였다·
싸움에서 기세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다고 하니 연신 물러나 검을 쳐내기 바쁜 안성일과 공격 일변도의 청하삼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기를 이십여 합·
참고로 무림에서 합이란 현대식 표현으로 턴제 게임의 턴과 일치한다·
안성일이 생각했다·
‘어라· 생각보다는 할 만하지 않으냐?’
청하삼협의 대형 조각산이 생각했다·
‘젠장 벽의 격차가 이리도 심했나!’
사실 합격의 궁극은 셋이 아니라 넷이서 하나를 상대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앞뒤옆옆 동서남북 네 방향이 있으니 사방을 점하여 몰아쳐야 제대로 된 합격술이 완성되는 것이다·
사방이 완벽함은 증명된지 오래다·
불가에는 사천왕 도가에는 사방신이 존재하니 고대로부터 방위를 넷으로 잡은 이유였다·
따라서 셋으로는 불완전했다·
심지어 적의 경지가 더 뛰어났으니·
일류 후기와 절정 초기 단 한 단계지만 그 벽은 생각보다 높았던 것이다·
다시 십여 합이 흘렀다·
조각산이 형제들과 눈빛을 나누었다·
오랜 형제애로 다져진 눈빛 대화였다·
‘안 되겠다· 튀자· 막내도 챙겨야 하고·’
‘좋은 생각입니다 형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님·’
생각보다 맥이 빠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청하삼협의 대형 조각산의 별호를 생각하면 당연한 이치라고도 하겠다·
무림에서 별호는 생각보다 단순한 원리다·
일류쯤 되면 어엿한 무인쯤 되지만 작금 무림에 일류 무인은 너무나 많다·
그러니 일류 무인 주제에 멋들어진 별호가 붙으려면 누구라도 인정하며 감탄할 수 있는 활약이 필요했다·
그러나 사람은 많고 활약은 적으니 보통 활동하는 본거지 특징 성향의 조합이었다·
증여(에서 활동하는) 추(추한) 귀(나쁜 놈)
청하(에서 활동하는) 질풍(빠른) 협(착한 놈)
이러니 청하질풍협 조각산의 경우는 특기가 질풍과 같은 속도에 있는 것이다·
특히 싸우다 불리하면 질풍처럼 후퇴하는 신묘한 병법!
그에 감탄한 사람들이 붙여준 별호였다·
‘근데 막내가 안 올라오는 거 보니 어디 부러지기라도 했나 봅니다·’
‘막내놈이 빠져가지곤 셋째가 챙긴다·’
‘아니 또 접니까? 이번에는 둘째 형님이 좀 챙기시면 안 됩니까?’
‘어허 셋째가··· 말대꾸?!’
안타깝게도 막내는 이미 죽었다·
하지만 막내의 부고가 전해지지 못했으니 본래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막내가 ‘저 죽었는데요 형님들’ 하고 말해주었다면 형님들은 막내의 죽음에 분기탱천하여 사생결단을 내었을 테고·
몸뚱이에 구멍 몇 개 뚫리고 나서 악적 겸 막내의 원수를 처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내뺄 생각뿐이었다·
조각산이 둘로 쏘아지는 안성일의 검격을 겨우 흘러내며 돌연 바락 소리를 질렀다·
“지금! 연행귀산!”
안성일이 공세를 잡아 공격을 이어가다 말고 급히 한발 물러섰다·
연행귀산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위험한 수법이 등장하지 않을까 싶어 물러난 것이다·
다만 조각산의 외침 연행귀산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그저 질풍 같은 퇴장을 위해 상대방에게 겁을 주려고 아무 말이나 뱉었을 뿐이니 죽은 공명이 산 사마의를 물리치듯 아무런 뜻 없는 단어가 절정 고수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참으로 신묘한 계책이었다·
그리고 질풍협의 위명이 그 빛을 발했다·
질풍처럼 빠르게 멀어지는 세 사람!
안성일이 황당함에 눈만 끔벅거렸다·
—-
아청이 위층에 올랐을 때 쏜살같이 달려오는 세 사람을 보았다·
아청이 세 사람 머리 위의 숫자 업을 훑었다·
십칠 구 일·
낮기는 하나 선업이었다·
착한 놈들이니 증여추귀는 아닌 모양·
아청은 관심을 끊었지만 스쳐 지나가던 세 사람은 움찔하고 말았다·
아청의 몰골이 보통이 아니여서·
피를 뒤집어쓰고 실실 미소를 짓는 여검객을 보면 누구라고 한 번은 놀랄 수밖에·
심지어 어딘가 심장을 옥죄는 듯한 압박감을 뿜어대니 홰가닥 돌아버린 눈동자에 한 줄기 불길한 색채가 깃든 탓이었다·
그러나 아청이 청하삼협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는 무림인의 비언어적 표현이었다·
볼일 없으니 서로 갈 길 가자는 뜻이다·
세 사람이 스쳐 지나가고 나서 아청이 객잔 위층에서 곧장 악적을 찾아냈다·
머리 위의 숫자가 비범한 놈이 있었으니까·
악업이 삼백칠십육 점 지독히도 많은 악업을 쌓은 놈이었다
다른 말로는 죽여도 되는 놈이었다·
죽는 편이 오히려 세상에 이로운 쓰레기였으니까·
아청이 안성일과 눈이 마주쳤다·
안성일이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했다·
아까와 같은 무림인의 비언어적 표현이다·
서로 갈 길 갑시다·
안성일은 아청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무림의 오래된 잠언이 있지 않은가·
아이와 여자와 늙은이를 조심하라·
물론 이 잠언은 아이와 여자와 늙은이를 특히 더욱 조심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 중 아이와 여자와 늙은이를 빼면 남는 것은 성인 남성뿐이다·
그리고 성인 남성을 보면 누구나 경계하며 조심하게 된다·
여자와 아이와 노인을 조심하라는 말은 무림에서 만나는 모든 이를 경계하며 방심하지 말라는 깊은 뜻이었다·
안성일은 이와 같은 지혜로 싸움을 피하고자 했으나 아청은 안성일에게 용무가 있었다·
“야· 거기· 늙은 새끼· 니가 증여추귀인가 하는 그 인간말종이냐?”
난데없는 폭언이었다·
안성일이 재차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심한 욕이기도 했다·
“그래 너 늙은 새끼· 어디서 모른 척이야? 딱 봐도 얼굴에 개새끼라고 쓰여있는 게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안성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딸 미만 손녀 이상의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에게 욕을 먹었으니 그도 당연하다·
“이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감히···”
“뭐? 무슨 년? 방금 욕했어? 감히 내게 그런 심한 욕을 하다니· 모욕적이야 참을 수 없다·”
참을 수 없다는 표정치고는 싱글벙글 잘도 웃으며 검을 뽑아드는데-
“이런 미친 계집을 봤···! 헙·”
안성일의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청의 협봉검에서 가닥가닥 실오라기로 풀려나온 기운이 일렁거렸기 때문에·
이는 검기가 생성되고도 남은 기운이 밖으로 흐르는 현상으로 이를 검사劍絲라고 부른다·
절정 후기의 무인들이 쓰는 수법이었다·
안성일이 식은땀을 죽죽 흘렸다·
눈앞의 계집이 저보다 훨씬 윗줄의 고수였던 것이다·
생명의 위기가 눈앞에 닥쳤다·
실로 압도적인 실력차!
“미친? 또 욕을 해? 와 너무 모욕적이야· 하 화가 난다 너무너무 난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차라리 우리 가문을 부모를 모욕했다면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모욕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다· 문답무용! 죽어라 내 월광검이 굶주렸다!”
장난스러운 동작과는 달리 숨을 한번 들이쉬기도 전에 여인의 검 끝이 갈라지며 세 개의 형상을 그렸다·
세 갈래로 굽이치며 쇄도하는 검기·
안성일의 두뇌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무엇이 실초고 무엇이 허초냐·
사느냐 혹은 죽으냐· 고민할 시간이 없다·
죽음의 삼지선다 앞에 안성일이 목숨을 건 도박을 행하려던 찰나였다·
전신의 솜털이 쭈뼛 곤두서는 감각!
‘셋 다 실초로구나!’
순간 셋 모두 실제의 검초임을 알았다·
목숨이 경각이 달한 때 사람이 가지는 초감각 무학적 개념으로는 상단전의 공능이라고도 했다·
심장을 노리는 검격을 쳐 내고 안성일이 힘껏 몸을 비틀었다· 어깨와 허리가 선뜩하더니 이내 격렬한 통증이 밀려온다·
고작 한 수 받아냈을 뿐이다·
벌써 상처가 둘·
절망적인 실력차였다·
절정 초기와 후기의 차이도 있지만 여인의 검법 자체가 상승의 무학이었다·
거기에 방년이나 겨우 넘겼을 터인 젊은 여인의 실력이 이러하면 그 배경 역시 심상치 않은 문파이리라·
즉 져도 죽고 이겨도 나중에 추적자에게 죽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싸우면 안 된다· 무조건 망하는 싸움이다·
“잠깐! 대협! 오해십니다! 오해! 오해요!”
“오해는 무슨·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이 수모 죽음으로 갚도록 해라!”
“아니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대협 잠시 잠시만!”
“대협? 내가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여? 감히 여인의 나이를 들먹이다니·”
“소 소협 잠시만!”
“소협? 이제 막 절정 딴 하수가 고수님을 그리 부르게 되어 있나? 감히···!”
“여협! 제발 여협! 잠시만 제 말을!”
“여협? 협객에 남협과 여협이 따로 있냐· 성차별이 세상을 어지럽히니 내 여기서 그 굴레를 끊어내겠다·”
여인의 검이 연신 날아들었다·
때로는 세 갈래 때로는 네 갈래 다섯 갈래에 이르러서는 이미 대적할 의지를 잃었다·
그저 필사적으로 입을 털 수밖에는·
벌써 이십여 합·
아직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 기적이었다·
순간 거짓말처럼 공세가 멈췄다·
“자꾸 오해라고 하니까 내 말해두는데·”
“예 대협 아니 소 아니 그····”
“내가 모처럼 비싼 요리를 차려놓고 이제 막 즐기려고 했던 순간이었단 말이지· 내게 있어서는 아주 각별한 기념일이었다구· 무림 출도 이후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었어·”
“어 그··· 소란을 끼쳐드려서····”
“아니 내가 시끄럽다고 사람 죽이고 막 그런 살인마인 줄 알아? 그게 아니라 하늘에서 뭐가 뚝 떨어지더라고· 객잔 안이니까 천장이겠구나?”
아청이 고개를 돌렸다·
안성일이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뻥 뚫린 구멍이 보였다·
안성일이 땀을 죽죽 흘렸다·
어쩐지 피를 뒤집어쓰고 있더라니·
“좋아· 이제 네가 죽는 이유를 알겠지?”
“사 살려주십시오!”
“흠· 어쩔까·”
아청이 생각하는 척 시간을 끌다 말했다·
“일단 돈 내놔· 요리도 버렸고· 옷도 버렸으니까·”
“드 드리겠습니다!”
“아 이걸 어떻게 참아· 너무하네·”
“예? 예?”
“다시! 돈 내놔!”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안성일이 허둥거렸다·
대체 뭘 어쩌라는 것인가?
사람 꿇려놓고 놀리기라도 하는···
아·
안성일의 눈빛이 팍 썩었다·
그가 아직 살아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검격이 일시에 날아들어도 급소를 노리는 살초는 항상 단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치명적인 살초만 피하면 나머지는 어떻게 몸으로 막아 때울 수 있도록·
즉 여인은 그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고양이가 새를 가지고 놀듯 신이 나 헤실헤실 실없는 미소를 띤 얼굴로·
“내가 내가 살귀에게 걸렸구나···”
“아· 들켰네?”
아청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러니 착하게 살았어야지· 이게 다 업보라는 거야· 업보· 내 월광검은 오로지 악인의 피만 마시기 때문이지·”
아청이 검을 들었다·
끝을 직감한 악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년은 무사할 줄 아느냐! 오냐! 나 나쁜 놈이다! 네년은 아닐 줄 아느냐! 지옥에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
“지옥은 무슨· 내 선업이 얼마나 높은데·”
안성일의 세상이 빙글 돌았다·
허물어지는 제 몸뚱이가 시야에 담겼다·
그가 죽어가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정면에서 떨어진 검에 목이 베일 수가 있을까·
도대체 이 무슨 신묘한 검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0·30 대대적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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