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4
명단을 챙긴 설가놈이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를 꺼내들었다·
“아· 그런데· 구녕이 말일세· 흠· 설이리 거 참 입에 안 붙는군·”
“둘이 아는 사이에요? 그런데 구녕이는 또 뭐야· 애가 좀 멀쩡하진 않지만 암만 그래도 여인한테 구녕이가 뭐야 구녕이가·”
그에 설가놈이 쓰게 웃었다·
“뭐 어느 세가라고 다를까보다는· 아니 세가라기보다는 집성촌의 특징이라고 해야 하나· 북해 성씨에도 여느 세가처럼 본가 직계가 있고 분가 방계가 있다네· 취급을 따지자면 본가는 왕족처럼 살고 방계는 뭐 평범한 사람처럼 산다네·”
“그런데요?”
“그리고 그 아래에 천민이나 노비 혹은 짐승 비슷한 취급으로 잡종 중원 표현으로 하자면 사생아들이 살지· 누구나 자유롭게 부려 먹어도 되고 심심하면 매질을 해도 되지· 다만 죽게 만들면 대가가 좀 쎄·”
청이 인상을 팍 구겼다·
“엥· 그게 뭐예요? 국법에 노비가 금지가 된 게 언젠데·”
“그래서 중원에 노비가 없던가? 깨나 산다 하는 집이면 한둘은 으레 데리고 있지 않나·”
“국법이 우스워서 그렇긴 하죠· 어쨌든 아주 쌍놈들이네 그냥 재수 좋아서 혈통 타고난 주제에 뭘 직계니 방계니·”
아주 역적스러운 소리였다·
하지만 청이 말하면 역적은 아니지만 또 황실 적통의 공주님이 말씀하시기엔 어이가 없는 소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주님 모르는 설가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어쩌다 이리 되었는가 곰곰히 생각을 해 보았더니 대충 이해가 가네· 일종의 자원 관리가 아니겠나·”
북해는 척박하다·
그렇다고 딱히 물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질 좋은 모피가 있으나 북해 사람들 쓰기에도 모자란 양이다·
물론 한철이 나기는 한다·
하지만 배가 고프다고 해서 전략 물자를 함부로 유출하는 문파는 없는 법이었다·
당장 중원 시골 요새화한 집성촌들의 경우만 보아도 철광맥 가진 집성촌이 주변 동네들을 아주 휘어잡고 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철은 절대로 팔지 않는 이치였다·
게다가 북해까지 교역을 오는 상인 자체가 별로 없고 그나마도 여름에는 얼음이 얇아 못 오고 겨울에는 추워서 못 온다·
봄 때에 잠깐 가을 때에 잠깐 드나들 뿐이라서 밖에서 사오는 양곡도 쥐꼬리만큼·
북해 땅이란 애초에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없다·
그러니 출산 역시 혈통을 따져서 철저히 통제되는데 춥고 할 일 없는 땅에서 달리 할 일이 또 무어가 있겠는가·
그냥 열심히 붙어먹다 보면 통제고 뭐고 애가 덜컥 배 버리고 잡종이 태어난다·
“그래서 잡종은 마구 부려먹어도 되지·”
딱히 필요 없는 잡종이라도 입어야 하고 먹어야 한다·
북해의 모자란 물산을 축내는 이들이니 가축처럼 일이라도 해야지·
대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지 않냐·
청이 설가놈의 가설을 들으며 생각했다·
역시 동네 최고의 지성!
북해에 있을 때는 물론 북해 최고의 지성이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잡종인 줄 알아야 써먹지 않겠나 그러니 이름부터 아주 잡종처럼 짓는다네·”
이름을 짓는데 딱히 수고도 안 들인다·
사내 이름은 몇 개 계집 이름 몇 개를 돌려 쓰는 것이다·
설씨 한씨 빙씨 북해의 세 성씨에 사내는 가놈 종놈 개놈· 좆놈·
계집은 가년 종년 개년· 구녕·
“앗·”
“아는 사이냐고 물었던가? 북해 북쪽에 옥녀궁이라는 문파가 있네· 대부분 여인들로 이루어진 문파인데· 그렇다고 꼭 여인만 있는 문파는 아니고 무공 특성상 사내들이 굉장히 꺼려하는지라· 어쨌든 그런 옥녀궁이라는 문파가 있었다만·”
그리고는 설가놈이 씨익 웃었다·
마치 음식이 존나 맛있다는 칭찬을 지나가며 들은 숙수(요리사)가 지을 법한 아주 자부심이 듬뿍 묻어나는 미소였다·
“물론 이제는 없네·”
위아래로 다 죽이고 사문은 불태운 후에 비급 챙겨서 튀었다고 했던가·
전에 이야기하기를 조금 심했다고는 생각해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만약 과거로 돌아가게 되어도 똑같이 했으리라고 말을 했던 것도 같고·
“구녕이는 재수가 좋았다네· 빙정과 친한 피를 타고났거든· 그래서 빙궁으로 간 게 마지막이었는데 빙궁 직계로 편입이 되었으니 이름도 새로 받았겠지·”
“그럼 전에 알던 사이였던 거네요?”
“중원 식으로는 조카 삼촌 사이가 되지· 다만 잡종한테는 족보가 없어서 그런 소릴 입 밖으로 내면 몰매를 처맞지만·”
실제로 설이리가 삼촌 소리 하다가 계속 처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애가 고집이 아주 더럽게도 쇠고집이라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삼촌 소리를 멈추질 않으니 점점 맷집만 늘더라고·
음· 그 고집 뭔지 알겠네·
청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뭐예요 그럼 지금 조카한테 삼촌 찾아 죽이고 비급 찾아오라고 이 먼 땅까지 혼자 보냈다는 말이에요?”
“명분이야 그렇지만 그냥 내쫓은 거지· 구녕이도 그리 알고 있고·”
“엥· 이리도 알고 있어요? 뭐예요 둘이 이야기했어요? 아니 애초에 설가놈을 알아봤구요?”
“그야· 내가 이 꼴이지 않나?”
옥녀궁에 사내가 있음에도 옥녀궁인 이유는 태음옥녀신공의 부작용이 사내를 여인처럼 가꿔내기 때문이다·
설가놈은 빙천수라마공으로 그 부작용을 극복했지만 대신 감각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정작 살아보니 감각이 없는 삶보다는 여인의 꼴을 하는 것이 수백배는 나은 삶이라서 소녀환희공을 통해 빙천수라마공을 정화해서 다시 이전의 꼴로 되돌아왔다·
즉 설가놈이 옥녀궁에 종놈으로 살던 때에는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듣자하니 빙백신장만 가르치고 정작 중요한 빙백신공을 전수받지 못했다지·”
그런 주제에 신공을 익혀야 한답시고 태음옥녀신공은 흩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심공이라고 이름 그대로 얼음도 못 만드는 한심한 내공심법 하나만 남았으니 내공으로는 일류만도 못 한 상태·
“빙백신장이 물론 천하일절의 신공이긴 한데 내가 공부가 그따위여서야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겠나· 그런 애한테 문파 하나를 박살낸 마두를 잡아오라고 시키면 단박에 제가 쫒겨났다는 사실을 알지·”
다만 굳이 왜 쫒아냈는지는 걔가 입을 다물어서 모르겠다고·
설이리의 재능이 너무 뛰어났기에 빙궁 직계들이 경계해서 쫓아냈거나·
아니면 재능이 딱 빙백신장을 익힐 정도로만 아슬아슬 미천해서 직계라고 데리고 있어 봐야 자원만 축낸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설가놈은 그리 말했지만 청이 듣자마자 곧장 결론을 내렸다·
걔 하는 꼴 보니까 쓸모가 없어서 내쫓았다는데 한 표·
“직계는 왕족처럼 산다면서요? 아까 무슨 빙정이니 하며 직계에 편입되었다고 한 했어요?”
“그야 자네도 생각해 보게·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더럽고 천한 거지년이 재능 좀 있다고 하루아침에 왕족이 되어버린다 한들 누가 그걸 인정하고 따르겠나?”
“하긴· 그건 또 그렇네요·”
청은 자신이 공주라는 생각은 안 한다·
왜냐하면 죽은 공주는 이미 진작에 죽어 몸만 남겨놓지 않았던가·
황후 마마께는 죄송하지만 딸자식 몸만 날름 훔쳐먹은 주제에 딸 행세까지 하기는 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데 왜 굳이 설가놈을 찾겠다고 쫓아왔어요?”
“나 사는 거 보고 잘살고 있으면 같이 좀 살자고 하려 했다더군· 그러니 자네가 구녕이 좀 잘 돌봐 주게· 안 그래도 잘 따르더만·”
“안 그래도 잘 돌보고 있거든요? 이보다 더 잘 돌볼 수가 없는 수준인데요·”
“그렇겠지· 온종일 자네만 따라다니더만· 그래도 좀 더 자세히 봐 주게· 특히 뭔가 거동이 수상하면 의원 앞에 데려다 놓고· 북해 사람은 원래 아픈 내색을 안 해·”
“왜요?”
“북해 땅에 가 보면 아네· 그 혹독한 땅에서는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네·”
그 눈보라 몰아치는 혹한의 땅에서 아픈 이를 챙기다간 같이 죽자는 꼴이다·
그러니 뒤처지는 이는 그냥 버린다·
아프다고 해서 도움을 기대할 수 없으니 이를 악물고 따라잡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다들 아파도 내색을 절대로 안 한다·
심지어 잡종이라면 아프면 쓸모가 없다·
아픈 내색을 할 정도면 이미 상태가 심각해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그냥 이미 죽은 셈 치고 짐까지 다 뺏어다가 버리고 가 버린다고·
“그러니 죽어도 아픈 내색을 안 하려 든다네·”
“엥· 나한테는 했는데요·”
그에 설가놈이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부드러운 마치 대견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어쨌든 밤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보게· 아니면 자고 갈 텐가? 참고로 나는 다 벗고 자는 버릇이 있다네·”
“옷 입고 자잖아요· 상의까지 다 젖어서 등장했으니까 입고 잤겠지·”
청이 헹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음· 그러면 오늘만 벗고 잘까 하는데 같이 잘 텐가?”
“희롱이 안 통하면 그냥 접으라니까요· 왜 추하게 두 번씩 해요?”
“뭐든 두 번은 시도해 봐야 하는 일이네· 한 번은 정이 없지 않나·”
“정은 개뿔·”
—-
산적 썰고 수해 복구에 힘썼더니 선업이 사천 점이 넘었다·
본래는 선업 교환을 통해서 태극혜검을 익히기로 했는데 그런데 이미 이 몸께서 초절정에 닿아 초절청으로 진화했단 말이지·
그러면 굳이 이제와서 태극혜검을 익힐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청이 무공창에 빙백신공을 검색해 보니 보라색 테두리의 내공심법이 떡하니 자리를 잡는다·
설이리가 이게 없어서 반쪽짜리면 내가 배워다 가르쳐 주면 온전해지나?
본래 한심공과 태음옥녀신공을 익히고 있던 설이리지만 태음옥녀신공을 흩어내는 바람에 설가놈의 표현으로 한심한 내공심법 하나로 버티고 있을 뿐이라던가·
한 번 흩어버린 공부는 다시 쌓을 수가 없다·
이미 해당 진기는 단전이 받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굳이 청이 빙백신공을 배워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방법이 없지는 않다·
빙천수라마공이 있지 않나·
그 부작용이 원체 심하기는 해도·
그렇다고 소녀환희공을 같이 전수할 수도 없는 것이 잡다한 기운 특히 마공을 정화하여 정순하게 바꾸는 도가의 공부다·
청이나 둘 다 익히고 있지 본래는 둘이 양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초절정에 오르고 나니 잡다하게 여러 검법을 익히느니 피가 되고 살이 되며 내공이 되는 내공심법 한 개 익히는 편이 값지다는 사실을 알겠다·
보라색 내공심법이면 굳이 설이리 때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익힐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니면 빙백신공 익힌 다음에 빙백신장이랑 바꾸자고 해 볼까?
걔도 보라색이던데·
나중에 이리한테 운이나 한번 떼봐야지·
먼저 사부님께 한번 여쭤보고·
설가놈이 조사를 해 보겠다고 했으니 청이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일 맡겨놓고 놀러다니기도 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나온 생각이 적진 정찰이었다·
말이 거창하니 적진 정찰이다·
그냥 장흥상방 사업장이라는 요리점이나 다점을 돌아다니며 먹고 마실 뿐이었다·
그래도 적진은 적진이고 개중에 악업이 툭 튀어나온 사람이 있으면 그놈이 범인이 아니겠나 하고·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그동안 절세 미인 둘이 함께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서안에 쫙 퍼졌다·
그야말로 서안에 도는 장안의 화제 겸사겸사 장안에도 도는 장안의 화제였다·
사실로도 관용어로도 진짜 장안의 화제가 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무더운 날에 사내들이 유달리 거리로 나와 거닐었으니·
“음· 저 옷은 몇 번 본 것 같은데·”
여인들이 천하제일미남을 쫒아다닐 때는 아주 대놓고 서서 성벽을 친다·
하지만 사내들은 또 달라서 슥슥 몇 번이나 같은 길을 지나가면서 흘끗거리거나 아니면 괜히 같은 다점에 자리를 잡고서 무한으로 차를 즐기며 흘끗거리는 식이었다·
청이 낙녕에 있을 때야 아직 소문이 덜 퍼졌지만 수해 복구에 오는 시간까지 한 달 반이면 충분히 서안에는 소식이 닿는 시간이다·
천화검 떴다!
천하제일미인이라고 미는 놈도 있다던데 가서 진짜 그런지 한번 보자! 하고·
그리고 삼두세요 머리가 세 개에 허리가 가늘다던데 정말 머리가 세 개인지도 확인해야 하는 중요 사항이고·
청은 그런 의미에서는 사내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보고 즐길 뿐 심한 추파는 날아오지 않았는데 그야 방년에 초절정을 이룬 초고수는 좀 많이 부담스럽지 않나·
아무리 마누라가 예뻐도 매 맞는 남편은 사절인 것이다·
그래도 소소한 추파는 날아온다·
“저기 계신 소협께서 보내신 겁니다·”
“와· 뭐 이런 걸 다·”
청이 술병을 들어올리며 눈웃음으로 화답을 해 보였다·
그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날락 말락 눈치를 보기에 청이 손을 살짝 흔들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어쨌거나 덕분에 청이 적진 정찰을 하는 사흘 내내 쓴 금전이라고는 노점에서 군것질거리 사 먹을 때뿐이었다·
이러고 나니 얼굴 믿고 사내들한테 과자며 밥이며 차나 술을 뜯어내는 못된 요녀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상은 절세미인의 무한 식사라는 진귀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길거리 매담자들보다 더 보람찬 구경을 시켜 주니 받은 만큼 충분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나흘 차·
드디어 설가놈이 이리 말하는 것이다·
“한 놈 찾아냈다만· 직접 가겠나? 아니면 사람을 보내 잡아 올 수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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