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
청이 충돌 직전 배를 버렸다·
어차피 청의 배도 아니었다·
살포시 뛰어올라 거선 위 갑판에 올라서니 바닥에 몸을 붙여 엎드린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나선-
쿠웅···!
발바닥에서 전해지는 육중한 충격과 함께 갑판이 크게 기울었다·
기이이이···!
나무 뒤틀리는 소리 배가 지르는 비명이 온 사위를 가득 메웠다·
그러나 고수는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실제로도 자리에 우뚝 선 사람들이 제법 많아 대뜸 충각과 함께 등장한 의문의 여인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렇게 와닿는 눈초리가 워낙에 곱지 못했다·
와닿는 적의에 청이 급히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구조선인지 애써 탈출하고 났더니 또 다른 악당의 소굴에 들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업이 나락까지 떨어진 놈도 있고 이따금 선업을 유지한 사람도 있었다·
극단적인 몇 놈을 제외하면 평균치는 그럭저럭 객잔 수준이라 할 만했다·
그때 뱃머리에 서 있던 장한이 청에게 작살을 겨누며 으르렁거렸다·
“감히 장강 위에서 수로채를 건드리다니 그것도 감히 이 용왕선을· 용담 하나는 칭찬할 만한 계집이로다만·”
청은 지금이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다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믿음도 있었다·
배가 지혼자 흘러가다 박았을 뿐이 아닌가·
청이 자 들박하라! 외치며 사나이답게 냅다 들이박지도 않았다· 물론 해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방금의 충돌은 본의가 아니었다·
청은 대부분의 오해가 진솔한 대화 혹은 선동과 날조로 풀 수 있다고 믿는 상식인이었다·
그리고 서문수린에게 진솔한 대화법도 배웠다·
청이 보고 듣고 겪은것이 삼류 낭인 뒷골목 왈패들이었던지라 수많은 핵폭격을 감내하며 배운 제대로 된 무인의 교양이었다·
“소···인은-”
그래도 소녀는 좀 아니지·
“-서문청이라 합니다· 구명의 은혜에 감사드려요·”
청이 척 포권을 취했다·
장한의 노기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에 청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구명이라· 무슨 소리지?”
“그게 말이에요· 식사를 사준다고 아니 대접해 준다고 해서 배에 탔더니 그 새끼들이 그러니까 그놈 아니 그분? 아니 그 사람들? 여하튼 개놈들이었는데···”
억지로 짜낸 교양이라 긴장이 풀리자마자 도로 뒷골목 시절로 돌아가기는 했다·
버린 음식통을 가지고 거지들과 사투를 벌이던 그 경험이 워낙 강렬했다·
무엇보다 청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딱히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만·
청이 이야기를 마쳤다·
대충 그 새끼들이 순 나쁜 새끼들이었고 나는 휘말렸을 뿐 죄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장한 장강일착 파본무가 고민에 빠졌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딱히 죄를 묻기는 뭐하다·
뱃놀이 가자며 꼬셔서 몹쓸 짓을 하는 수법이야 예로부터 유명한 수법이었다·
유명한 강이며 호수마다 물귀신 전설이 내려오는 이유기도 했다·
거기에 청의 근본없는 말본새와 준수한 용모가 빛을 발했다·
예쁘장한 소녀가 어설프게 예의를 차린 말투로 씩씩거리며 항변을 하고 있었다·
딱 보니 세상 물정 모르는 명가의 가출 소녀가 아닌가·
도가의 내공심결을 익힌 사람이 가지는 특유의 현기 어린 눈동자가 그 착각에 크게 한 국자 퍼서 보탰다·
게다가 파본무 역시 딸 둔 아비이기까지 했다·
강호 초출 철없는 소녀에게 차마 모질기가 어려웠다·
“흠흠 원래 사내새끼들이 좀 그런 법이니까 알아서 조심을 해야하는 법이다· 조심성 없게 아무 놈이나 따라다니니 그 꼴을 보지·”
어느새 적의도 다 사라진 후였다·
청이 한결 편하게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가까운 도시에 좀 내려주실 수 있어요? 근데 여긴 또 어디지?”
“동정호다·”
“네? 동정호요? 어떻게···”
청이 뒷말을 삼켰다·
어떻게 호수 이름이 동정호?
삼킨 주접을 알지 못한 파본무가 대충 멀리 떠내려와서 놀랐구나 하고 넘겼다·
그보다는 들은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이 있었다·
“그나저나 그 개새끼가 관리 아들이라고 했지· 누구 아들이라고는 말 안 하던가?”
“부찰? 부찰관찰사?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요·”
파본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부찰도위사·”
“네 맞아요! 그거 같아요·”
“씨발 니미럴····”
파본무가 욕설을 내뱉었다·
—-
장강수로채는 수적 집단 떼강도들이다·
전대 총채주 시절에는 그랬다·
현 수로채 두목 총채주 소면교호 복하운은 이 사업이 언제든지 막을 내릴 수 있는 칼날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관부 때문이었다·
관부가 토벌에 나서는 순간이 수로채의 종말과 같은 결정이 되고 말 것이다·
화포는 관의 전유물이고 수전에서 한쪽만 화포를 가지고 있으면 애초에 싸움이 성립되지도 않는 판이었다·
복하운이 보기에 수로채는 그저 관부의 인내심 속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복하운은 수로채를 바꿔나갔다·
관부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어서 관선을 보호하고 연락선을 대리로 운용했다·
검문을 실시해 범법자의 추포를 돕기도 했다·
밀수업자를 때려잡는 것은 예전부터 하던 일이었다· 밀수는 수로채만 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관부의 눈치를 보느라 통행세도 대폭 낮췄다·
덕분에 장강의 수운량이 폭등했고 이는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풍족한 수입으로 되돌아왔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서 장강수로채는 이제 수적이라기보다는 장강 관리 사업체에 가까운 집단이 되었다·
비공식적이나마 관의 인정을 받은 장강의 진정한 주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부찰도위사의 아들이 죽었다·
문제는 그 책임 소재였다·
청은 차남정이 충돌 사고 이전에는 아직 살아있었다고 주장했다·
약간의 왜곡이 있긴 해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팔과 다리가 괴사하고 양물과 혀가 잘리기는 했어도 어쨌거나 명줄 자체는 붙어있었으니까·
청의 계획대로라면 의창에 내려 일백 미만 악업의 생존자들이 차남정을 끌고 다니며 그 악행을 증언해야 했다·
불운한 사고로 전부 수장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면 그 고관대작 아들내미 죽음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수로채주 복하운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안 그래도 복잡한 때에 또 사건이 터졌다·
“그 변태 색마 살인귀 새끼가 언제고 사고를 칠 줄은 알았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차남정이 장강의 의창 유역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장강 위의 일은 수로채가 안다·
애초에 선박의 관리자들에서 하역부까지 배를 띄우는 데 필요한 노동자들 중 수로채와 인연이 닿지 않은 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어쨌나?”
“일단 선옥에 가둬놨습니다만·”
파본무가 미적거리며 물었다·
“저 그 아해는 관쪽에 넘길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불쌍하지 않습니까· 몹쓸 꼴을 보곤·”
“불쌍하긴 하지· 그렇긴 한데·”
복하운이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칼을 차고 나왔으면 이미 강호인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강호에서 순진한 건 죄야· 어쩔 수 없잖나·”
“끄응····”
복하운이 착찹한 목소리로 파본무를 달랬다·
“딸 같은 심정이야 누가 모르겠나· 그래도 굳이 우리가 화를 자처할 필요가 있나? 그런 건 정파 놈들이나 할 일이고·”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양 물었다·
“아 그러고보니 흠척이 그 놈 못 봤나? 며칠 전에 크게 혼쭐을 좀 냈더니 사내새끼가 삐져가지고는 애비한테 얼굴도 안 비추고·”
—-
청이 선실로 들어서자마자 문이 꽝 닫혔다·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들었다·
문을 흔들어보니 꽉 잠겨 열리지 않았다·
부찰관찰사인가 뭔가 그 새끼 애비 하는 일을 댔더니 장한의 표정이 잔뜩 쫄았다·
그 뒤로 악양에 도착할 때까지 하루 지낼 방을 안내해 주겠다길래 그러고 마는가보다 했더니·
“그 아저씨 그렇게 안 봤더니 이렇게 통수를 치네· 험 험· 모조리! 쓸어버릴까? 아예 도륙을 내버릴 수도 있다····”
청이 평소 흠모하던 위대한 작가의 명대사를 흉내 냈다·
주접이야 항상 떨던 그 주접이었다·
다만 입밖으로 소리를 낼 때는 듣는 사람이 없거나 아니면 어차피 들어봐야 죽게 될 악인의 앞에서였다·
주접을 알아들을 사람은 없겠지만서도 맨정신으로 떨기에는 왠지 쑥스러워서·
“그게 정말인가요?”
“으악!”
그래서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정말로 깜작 놀라 크게 화들짝 몸을 떨고 말았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요·”
어딘가 병약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사근히 귀에 감겼다·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듯한 감미로운 미성·
청이 바라보자 미인께서는 포근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청의 심장 한가운데를 꿰뚫는 미소였다·
그렇구나·
나 병약한 미인을 좋아하는구나·
그런데 왜 나한테 웃어주지?
이거 설마···?
“언연영이에요· 진주 출신이고· 소저는요?”
“서문청이요···”
청이 사람의 얼굴에 집중을 하면 스스륵 그 위로 숫자가 떠오른다·
그건 언연영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아이는 몇이 좋을까 그러면 서문씨를 줘야하나 아니면 이 원시 중국에서 우리집 대를 이어야 하나 고민하던 청의 눈에 숫자가 들어왔다·
-1711·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네 자리수? 실화?
에이 씨·
사랑했다 너란 여자····
청이 급격히 울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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