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
“그래서· 그게 정말인가요?”
“뭐가요·”
청의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저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착 감기는데 하필이면 아주 천하제일 씨발년이었네····
청에게 있어서 악인이란 죽여도 괜찮은 짐승 이상 혹은 이하의 어떤 생물이다·
악인은 죽는 과정에서 청의 기쁨을 선사한다·
죽어서는 선업을 보태주고 돌발 임무가 뜨면 많은 수련점까지 챙길 수 있었다·
흠잡을 데가 없는 유익한 장난감이었다·
게다가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일과 같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이득이 되기까지!
다만 반드시 죽여야 하는 원수는 아니었다·
딱히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으면 청도 그냥 나쁜 놈이네 하고 말았다·
“모조리 도륙을 내버리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냥 혼잣말인데요·”
“그런가요·”
청의 대답이 무뚝뚝했다·
말 걸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언연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뭇 우아한 자태였다·
“그런데·”
왜 자꾸 말을 걸지? 혼자 있어서 외로웠나?
혹시 눈치가 더럽게 없는 년인가?
기대가 실망으로 변했으니 청의 생각이 그만큼 날카로웠다·
그때 이어지는 느긋한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왜 실망했어요?”
“···네?”
“분명히 처음에는 말예요· 으음· 뭐라고 할까요· 으음···· 반했다? 그래요· 소저는 제게 반했어요· 맞지요?”
“그런 일 없는데요·”
청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서문 소저· 있잖아요· 사람의 반응이라는 것이 결국 몸의 신호로 나타난답니다· 갑자기 뛰는 심장· 크게 확장된 동공· 그 예쁜 얼굴에 살며시 번지던 홍조가· 살며시 풀린 근육들이 그리는 온화한 미소와 같은 신호 말예요·”
이쯤 되면 소름이 다 끼친다·
“소저는 내게 반했어요· 그렇지요?”
“이봐요 그냥 우리 조용히 있다가 각자”
“그런데· 사랑이 갑자기 식어 버리네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언연영이 청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당신 정말로 좋은 향기가 나·”
“진짜로 소름 끼치니까 그만 좀”
“왜일까요? 살아있는 사람한테서 어떻게 이런 향기가 나지? 어떻게···”
언연영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청은 조난 때문에 일주일을 제대로 못 씻었다·
누런 강물로 천을 적셔 몇 번 닦아낸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찝찝해 죽겠는데·
그런데 향기는 무슨·
이거 완전히 맛이 간 년이었네·
청이 자신의 안목에 좌절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굳이 참을 필요가 있나?
사내새끼가 들이댔으면 가만히 있었을까?
스승님의 여인주의사상에 물들어버렸나?
그럴 수는 없지·
청이 태세를 전환했다·
“그쯤 해 두지 않으면 유혈 사태는···”
“어머나· 발톱을 세울 건가요? 귀엽기도 하고·”
선실 안에 수많은 검의 형상이 떠올랐다·
허공에서 청을 겨누며 번쩍거리는 강기들이 둘 넷 여섯 여덟···
“세지 않아도 된답니다· 얼마든지 더 만들 수가 있으니까·”
“하하· 되게 고수시네요· 우와· 강기다· 멋져·”
“정말이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청이 즉시 전의를 상실했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했다·
이놈들이 날 그 감찰도지사인지 뭔지한테 넘기려고 가둔 게 아니었구나·
애초에 초고수가 이런 데에 갇혀있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청만 해도 이 구금 상태에서 곧장 탈출할 자신은 있었으니까·
그 이후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제대로 돌아버린 초고수 살인마한테 제물로 던져준 거다·
심심하면 얘나 좀 잡아먹고 있으라고·
청의 입장에서는 꽤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데서 미치광이 살인마한테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답답하지 않으세요? 문 열어드릴까요? 밖에도 사람 참 많은데·”
“글쎄요· 잠깐 손 좀 빌려도 될까요?”
“어 그게·”
검강 하나가 스르륵 미끄러져 청의 턱 아래로 끝부분을 들이밀었다·
청이 급히 손을 내밀었다·
“여기요! 여기· 감히 제 미천한 앞발을 고수님께 내밀기가 좀 그랬던 거지 싫다는 게 절대 아닙니다요·”
“자· 조금 따끔해요· 따끔·”
“왁! 우와아악! 멈춰! 검강 멈춰!”
청이 온갖 엄살을 떨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시퍼런 검강이 손가락을 향해 날아드는 꼴을 본다면 마찬가지일 터였다·
이년이 내 손가락을 노리는구나!
몇 마디 좀 쌀쌀맞게 굴었다고 이렇게까지!
청이 온힘을 다해 진기를 끌어올렸다·
소수마공과 넘치는 진기라면 검강도 튕겨낼 수 있지 않을까? 자유수련점을 더 아껴뒀어야 하는데 주양세심경 말고 소수마공을 대성할껄·
다행히 손가락을 잘라버릴 것 같았던 검강은 손끝만을 콕 찍어놓고는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어머나· 이건· 소수마공이네요? 하지만· 이상한걸요· 소수신파가 제자를 들인 적이 없는데· 서문 소저는 대체 어떻게 배웠을까요? 분명 지맥들을 전부 정리했다고 들었는데·”
“저 그게···”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아까 당신이 그랬듯이 말예요·”
이거 뒤끝인가? 그거 한마디가 빈정상했나?
청이 그저 오들오들 떨 수밖에는 없었지만·
언연영이 청의 손가락을 잡고 가볍게 훑었다·
피가 몽글몽글 솟아 예쁜 반원을 그렸다·
엄지로 피를 훔쳐낸 언연영이 제 입술에 대고 혀를 날름거렸다·
“아· 이해했어요· 그랬구나· 정말로 실존할 줄은 몰랐는데· 이러니 향기로울 수밖에는·”
그게 뭔데 이 미친년아!
혼자만 아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청이 일갈을 꾹 눌러 참았다·
개기면 죽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오늘따라 유난히 피가 고팠다·
아· 사람 좀 베고 싶다!
다행히도 그 후 모든 검강이 사그라들었다·
청이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청이 살인마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
두 명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한 명이 지나치게 불편한 동거였다·
“그렇게· 불편해하지 말아요· 저는· 서문 소저에게는 전혀 해롭지 않답니다?”
“그럼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
“안 돼요·”
“네···”
아· 살육 마렵다·
청이 한탄했다·
그러나 사람은 적응의 생물이었다·
그리고 청은 개중에서도 상당히 빨리 적응하는 인물상이었고·
청 특유의 간보기 능력이 아니더라도 상대가 전혀 적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체불명의 초초고수에게 살살 개겨보는 것은 청이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정말· 모르겠어요?”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이래요?”
“소저의 마음?”
“우리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에요·”
“세상에· 극복 불가능한 역경은 없답니다·”
“저는 나쁜 사람 안 좋아해요·”
“우리· 같이 노력해 보도록 해요·”
“착한 사람 되겠다는 소리는 안 하네요?”
“세상에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있잖아요·”
청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악업이 자그만치 천 칠백 점짜리 악당이었다·
게다가 현재 –1732 옆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도 악업이 계속 늘어나는 중이었다·
청이 한 삼사 년 붙어 다니며 ‘저 새끼는 해로운 새끼다 출동 어녀녕!’ 하고 손가락으로 목표를 찍어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건 이쪽에서 사절이었다·
그렇게 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이 년 상당한 뚝심이 있었으니까·
“좋아요· 서문 소저도 좋아하는 취향이 있지 않나요? 나한테· 말해봐요· 내가 맞춰줄게요· 교태 있는 여인을 좋아하나요? 아니면· 장부와 같이 담대한 여인? 아니면· 천진하고 발랄한 소녀?”
“일단 나쁜 여자에서부터 탈락인데요·”
“그걸· 뛰어넘을 수 있는 취향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청이 일부러 이 악당과 제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여성상을 골랐다·
“나는 털털한 여자가 좋아요·”
“으음·”
언연영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못 하겠어요·”
“안이 다 맞춰준다면서·”
“사람의 능력이란 게· 한계가 있답니다? 대신· 차순위로 맞춰 볼게요·”
“그럼 천진하고 발랄한 소녀는····”
“그것도· 무리예요·”
“장부와 같이 담대한 여인은·”
“생각해보니· 어렵겠어요·”
“교태 있는 여인도 안 하죠?”
“네· 맞답니다·”
“그럼 대체 뭘 맞춰준다는 건데요?”
“하지만· 꾸민 모습으로 마음을 사도· 의미가 없지 않겠어요?”
“···환장하겠네 진짜·”
“환장할거면· 나한테 하면?”
“아오 진짜 싫다! 가요 쫌!”
—-
아청의 구금으로부터 닷새가 지난 아침이었다·
관의 군대가 용왕선에 우르르 올라 승선대 앞에 방진을 쳤다·
그 뒤로 호북부찰도위사 차순단이 나타났다·
수로채주 복하운이 고관을 직접 맞이했다·
“대인 여기까지 오시느라”
“그년 그 찢어 죽일 년을 당장 데려와!”
그러나 자식 잃은 아비는 이미 분노에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아들이 죽었다는 비보와 함께 그 범인을 추포했다 연락을 받고 곧장 군사를 이끌고 달려온 것이다·
복하운이 막 수하에게 눈짓을 하려던 참이었다·
“아버지! 소자 복흠척입니다! 수로채주 복하운의 아들 복흠척입니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일을 완수하러 왔습니다! 저는 복흠척입니다!”
크게 꾸중을 듣고 가출한 줄 알았던 아들놈이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것이었다·
“아니 저 놈이···!”
“아이고 공자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지금 귀한 분께서 오신 때에···”
“저는 복흠척입니다! 저는 복흠척입니다! 수로채주 복하운의 아들 복흠척입니다! 아버지! 소자 복흠척입니다! 저는 복흠척입니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일을 완수하러 왔습니다!”
“이 무슨···”
말릴 새도 없었다·
누가 떠민 것처럼 허공을 붕 날아간 복흠척이 부찰도위사 차순단에게 쏘아져나갔다·
복흠척의 팔이 반원을 그렸고 차순단의 팔이 그대로 끊어져 배 위에 떨어졌다·
호위사장이 차순단을 와락 끌어안고 잡아당기며 급히 언성을 높였다·
“습격이다! 호위사는 대인을 모셔라! 장 천호! 대인을 지켜야 합니다!”
북방 출신의 장수 장 천호 역시 곧장 움직였다·
“수적 놈들의 습격이다! 모방진을 펼쳐라!”
“대인을 지켜! 모방진! 모방진!”
바삐 움직이여 창을 뻗는 병사들·
그 사이에서 복흠척이 팔다리를 휘두르며 광란을 부렸다·
창을 맨몸으로 맞아 오히려 창이 부러져나가니 사내 하나가 군대를 대적하는 신위였다·
병사들이 사방으로 날고 피를 토하며 난장이 펼쳐졌다·
복흠척이 그 와중에도 입을 쉬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일을 완수!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일을 완수! 했습니다! 히힛 히히히힛 히히흐흐하하하핫! 장강수로채 만세! 장강수로채 만세!”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복하운의 정신이 순간 아득해졌다·
이게 무슨 대체 무슨 일이···
—-
“서문 소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청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업이 바뀌는 순간을 목격했다·
한 방에 있는 내내 조금씩 오르던 악업이 이젠 눈앞에서 대놓고 확 치솟았다·
-1814· 대체 뭐 하는 년이야 저건·
청이 인상을 찌푸렸다·
“또 왜? 사람 짜증나게 하지 말고 쫌 꺼지면”
“덕분에·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답니다· 고마워요· 여러모로·”
저거 또 지만 아는 이야기 하지·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살의가 청의 몸 밖으로 새어 나갔다·
언연영이 그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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