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4
청이 조용히 칼자루를 쥐었다·
내공을 쓰기에는 아직 상태가 좋지 않다·
신체 능력으로 싸우려면야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상태가 어지간히 만만해야만 가능한 기예다·
검기만 해도 검기 없이 상대하려면 몇 합 지나지 못해 검이 버티질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리 오래 버틸 필요도 없다·
신녀문 산문 아래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곧장 사부님이 칼 타고 날아오실 테니까·
마교 놈들도 그걸 알아서 음? 사부님만 믿고 나댈 때는 아닌 걸까····
청이 설이리에게 눈짓을 준다·
심상치 않은 사태에 가부좌를 푼 설이리의 전신에서 하얗게 찬 김이 뿜어져나온다·
그 희뿌연 한기가 흘러나오는 내기라서 영약 먹고 내내 열심이더니 기세가 여간 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저 정도면 이제 처맞지는 않겠다고 청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았다·
-아이고 나리· 무슨 일이십니까요?
-안에 누가 타고 있지?
-신녀문 제자이신 서문 소저께서 타고 계십니다요·
-크큭 그래? 신녀문 제자라····
청이 조용히 칼을 뽑아들었다·
그에 설이리가 돌연 수통을 열어 제 손에 쏟아붓나 싶더니 쩌적 소리와 함께 길게 얼어붙어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뭔데? 뭔데 자꾸 멋있는 게 나오지?
그러나 지금은 한가로이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므로 청이 손가락으로 휙휙 신호를 보냈다·
나 왼쪽 너 오른쪽·
설이리가 고개를 끄덕·
그리고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신녀문은 금남의 도관이 아니었나? 자네는 여인처럼 보이진 않는다만·
-저는 여기까지만 바래다 드리고 돌아갈 예정입지요·
-아· 그렇군· 전원 무장 해제· 신녀문의 제자라고 하신다·
“엥·”
뭐지? 분위기가?
그리고 똑똑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
-실례하겠습니다· 신녀문 제자라 하셨습니다만 혹여 사내가 숨어들지 않도록 잘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마차를 한 번 살펴도 괜찮겠습니까?
내리깐 목소리가 정중하기 짝이 없다·
“안 그래도 이제 내려서 산문에 오를 생각이었어요·”
청이 마차 문을 열고 나가니 반짝이는 황금 갑옷을 입은 무장이 눈에 들어온다·
무림인은 어지간해서 갑옷을 입는 일이 별로 없으므로 복장만 봐도 관의 군사라는 사실을 알겠다·
무장과 눈이 마주치니 어어 하는 표정으로 그대로 얼어붙어 눈조차 깜박이질 못하며 청을 쏘아보는 것이다·
“저기요?”
“헉 실례 실례했습니다·”
급히 목례를 건네는 무장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은혜로운 미모에 기습을 당하고 말았으니 심장은 쿵쿵 거세게 뛰고 팔다리는 저리다 못해 후들거리며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줄어 반쯤 우물거리는 투다·
“어라· 무슨 일 있어요?”
“그· 마마께서 제를 지내고 계시기에·”
“마마요?”
마마란 까마득한 상전을 이르는 존대다·
청이 되묻자 무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황후 폐하께서 왕림하셨습니다·”
황후에 대한 공식적 경칭은 천자와 같은 폐하를 쓴다·
“앗·”
아니 그 아주머니가?
청이 소림 앞에서 만났던 어미 호소인을 떠올렸다·
육신으로만 따지면 그러니까 생물학적 어머니는 맞으신 것 같기는 한데·
하지만 연술 공주는 연술 공주고 서문청은 서문청이니 엮이면 엮일수록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이질감이나 들 텐데·
뭐라고 하더라? 테씨의 배? 뭐였지?
선장이 바뀌면 그 배가 그 배냐? 선장이 바뀌어도 그래도 그 배 아닌가?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선장이 아니라 선주가 바뀌면? 선주가 이름 바꾸면 다른 배 아닌가? 뭐지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그 배는 누가 모는지 누가 선주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겠다·
하지만 진실은 저 머나먼 곳에 있고 청이 알 방도가 아예 없으니 무어·
어쨌든 청은 연술 공주가 아니기에 결국 황후 역시 제 딸이 이미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았음을 깨닫게 되고 말 터였다·
다만 네년이 내 딸이 아니로구나 내 딸 내놔라 돌려줘 이 괴물아 하는 씁쓸한 결말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거리낌이 든다·
그리하여 신녀봉 험한 산세를 타고 올라 마침내 팔 부 능선 신녀문 현판앞에 이르니 번을 서던 제자들이 청을 보고 활짝 피어오른다·
그러나 그뿐·
웬일로 똑바로 번을 서고 있다가 청이 지근에 닿아서야 척 허리를 굽히는 것이다·
“태사숙조님 오셨습니까!”
“어서 오십시오!”
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이게 맞나?
평소대로라면 번이고 뭐고 얼굴 보자마자 당장 뛰쳐나와서 지분거리며 재잘재잘 아주 온갖 질문을 퍼부어야 했을 터였다·
청의 표정이 정직하기 때문에 제자들이 킥킥 개구진 웃음을 터뜨리며 설명했다·
“큰 손님이 와 계셔서 문주님이 단단히 당부를 하셨어요· 촐랑거리다간 꿀밤 맞을 각오 해 두라고요·”
“아· 그래· 꿀밤· 아프지···”
청이 곧장 납득했다·
핵꿀밤 아래 모든 제자는 평등한 법이다·
“진짜 너무 아파요·”
“얘는 한 대 맞고 엉엉 울었어요· 거의 일각 가까이요·”
“일각은 아니었거든? 그냥 쪼끔 눈물만 샌 거거든?”
“그게 쪼끔 눈물 샌 거야? 그러면 제대로 눈물 새면 아주 세상이 물에 잠기겠다?”
“뭐얏 오늘 한번 아옹다옹 해봐? 머리칼 뜯기고 오늘 한번 눈물 제대로 새 볼래?”
“네가 울면 세상이 아주 눈물에 잠기지 않겠니? 천하의 평화를 위해 내 오늘은 참아주도록 하마· 아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어떤 분이세요? 와 너무 미인이셔· 이 몸 반해버릴 것 같아·”
청을 보고 반가워서인지 핵꿀밤의 출력이 청이 아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는지·
어째 평소대로의 신녀문 제자들이었다·
이러다 꿀밤 맞는 거 아닌가·
“북해빙궁의 설이리 소저야· 무림오화 중 설화 알지?”
“와! 설화! 무림오화!”
“네·”
“와 머리채가 너무 예뻐요!”
“네·”
그에 설이리가 화답했다·
“···?”
뭐지? 여기서 보통 네가 나오나? 그러한 의미의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평소대로의 제자들에 평소대로의 설이리였으므로 큰 손님 이외에 딱히 특기할 일은 없는 모양이다·
그때였다·
“이년들이· 그새를 못 참고 아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손님 앞에서 경망스럽게 이 무슨 창피한 꼴이란 말이냐·”
“헉·”
“헉·”
두 제자가 놀란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삐꺽삐꺽 고장이 난 동작으로 고개를 돌리다 신녀문 문주 천둔검 왕주희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무 문주님·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태사숙조님 오셨습니까부터다· 왜·”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그 예민한 청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존재감이 없어 천둔검이라 불리는 그 왕주희의 신묘한 은형술이 세상을 속여넘겼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왕주희는 딱히 은형술을 쓴 적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캥기는 일 없는 청만 활짝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문주님! 제자 이제 복귀했습니다·”
“그래· 별일 없었지? 어디 보자· 빙궁의 설이리라고?”
“무림말학 설이리가 문주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설이리가 꾸벅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무리 설이리라도 큰 어른에게까지 네 아니오 단답으로 일관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럴 때 보면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래· 연서야 여기 설 소저에게 객청을 안내해 주고· 청이는 곧장 스승님을 뵈러 가자꾸나·”
“옙! 악! 아윽····”
따악! 촐싹거리던 신녀문 제자 연서가 기어코 꿀밤 한 대를 얻어맞았다·
서문수린의 제자라면 당연히 핵꿀밤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다·
열심히 얻어맞다 보면 나도 이 현묘하고 심오한 깨달음을 남에게 전파하여 서문수린류 교육법을 실천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서 말고 사랑이가 안내해 주렴·”
“예· 문주님· 제자 말씀 받들겠사옵니다·”
핵폭격의 순간을 목격한 신녀문 제자 사랑이 그 감동으로 인해 정숙하고 다소곳한 숙녀로 변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서문수린류 핵투발 교육법의 기적적인 효능인 것이다!
오랜만에 뵌 오랜만은 아닌가?
그래도 한번 나가면 계절이 바뀌고 그래야 뵙고 그랬는데 겨우 두 달 정도니까·
어쨌든 그렇게 제자 얼굴을 본 서문수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래· 연술 공주라고?”
“앗· 들으셨어요?”
“졸지에 관직을 받아 여사태모학사女師太母學事가 되고 말았는데 내가 몰라야겠느냐?”
여사태모학사는 동궁여사부의 관직으로 정이二품에 해당하는 아주아주 높은 고관이기도 했다·
참고로 같은 정이품에는 한 개 행정성의 행정 총괄인 포정사가 있었으니 그와 동렬에 있는 관직인 것이다·
여사태모학사는 황실 직계 여인의 교육을 담당하며 중원에서 여인이 맡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관직들 중 가장 높은 자리에 해당하기도 했다·
“어· 축하드립니다?”
꽁! 앙증맞은 소리만큼 소형화한 굳이 등급을 분류하자면 전술핵 급의 귀여운 핵 공격이라고 하겠다·
다만 소리보다 더 아픈 것이 원조의 손맛이었으니 청이 제 머리통을 샤샤샥 불이 나도록 문질러냈다·
“살다 보니 공주의 머리통을 때려 보기도 하고·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이로다·”
“아니 이게 왜 아프지···”
“호신경을 놓았으니 아픈 것이 아니냐· 아니 기껏 깨우쳐 놓았더니 왜 또?”
“아니 그게요· 지금 제자가 혈맥에 문제가 좀 생겨서-”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서문수린이 청의 팔목을 탁 채갔다·
그리고 뜨뜻한 진기가 밀려드는데·
“악! 아파요!”
다 찢어진 혈도에 진기가 드니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아프다·
그나마 많이 호전되어 눈물을 빼지 처음 정신을 차렸다가는 내공 돌리다 잠깐 기절할 정도가 아니었던가·
청의 촉촉한 눈가를 본 서문수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대체 이게 무어란 말이냐· 왜 미련한 년이 갑자기 혈맥이 폐인이 되어 돌아와?”
“폐인까지는 아니구요· 그게요 제자가 절검벽을 보았는데요···”
청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서문수린이 안도한 듯 표정을 풀었다·
“흠· 이 스승이 생각하기에는 초절정에 올라 보이고 깨닫는 바가 크다 보니 이전에 비해 그 반동이 더 강해지는 것 같구나· 소림에서는 팔 하나가 종남에서는 온 혈맥이 아니냐· 제대로 회복하지 않고 다음 절검벽을 보게 되면 죽게 된다고 하셨다고?”
“네·”
“하아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있겠냐마는· 제자의 경지가 모자라니 어쩔 수 있겠느냐· 아무래도 당분간 절검벽을 찾는 일은 그만 두는 것이 좋게구나 만은·”
찌릿· 서문수린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래 연술 공주라 하였느냐?”
“어· 그렇다나 봐요·”
“미리 알던 바는 아니고?”
“저도 황후 마마를 뵙고야 알았는데요 음 사실 별로 믿기지도 않고 또 연술 공주로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제자는 공주님보다는 신녀문 외문제자 서문청이 훨씬 좋은걸요·”
그에 서문수린의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황후가 대뜸 찾아와 제사를 지내고 싶다 하는 정도야 놀랄 정도까지는 아니다·
신녀문이 모시는 무산신녀께서는 저 옛날 황태자와의 연애담으로 유명한 천상의 여인과 지상의 황자의 인연으로 유명하신 천녀님이시기에 드물긴 해도 황실 여인들이 제사를 지내러 오기는 하는 편이다·
하지만 돌연 황후가 제게 큰절을 올리며 큰 스승님께 인사를 올리겠다고 하는 때엔 정말로 크게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큰 스승이라니? 황후께서 출가하여 도문에 입문하시겠다고?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해지는 순간!
다행히 황후가 신녀문에 입문하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자식의 스승을 큰 스승님이라 올려 부르기도 하는 것이 중원의 예절인 것이다·
그러고 나니 설마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설마 설마 고것이 제 신분 숨기고 숨어살 요량으로 기어들어온 것은 아닌가·
물론 아니겠지만 심지어 거두기도 직접 거두었고 처음 만난 흙두더지 꼴이 공주가 할 행색도 아니었으니·
그래도 확인은 해야 했다·
그리고 제 입으로 공주보다 서문청으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일순간 맥이 탁 풀리며 정신은 아찔하고 가슴은 콩콩 빠르게 뛰며 저도 모르게 큰 안도가 솟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밀려드는 큰 깨달음·
이 아이가 내게 이렇게 소중했던가·
처음에는 여인으로서 의기가 가상하고 또 자질이 뛰어나니 천하의 여인을 대표하여 여생女生에 새로운 여풍을 불러올 인재로다 하고 거두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찌 이리 정을 주게 되었는지·
혹여 빼앗길까 두려워 이다지도 노심초사 마음을 졸이고 있었구나 하고·
그러니 서문수린의 얼굴이 활짝 필 수밖에는·
그에 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엄청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
그렇게 싱글벙글 오랜만에 아주 흡족한 표정을 하시고는 이리 말씀을 하셨으니·
“낫는 데에 넉넉히 두 달이라 하였더냐? 마침 마마께서 석 달의 제를 지내고 싶다고 하셨으니 남은 기한이 그 정도 되겠구나· 그동안 네가 곁에서 모셔 드리거라·”
청이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제가요? 그 저는 좀·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기억도 없고 딸이라고 하시는데 저는 어색하기만 하니까· 그러다가 이전에 따님 모습을 결국 찾지 못하고 너는 누구냐 내 딸 내놓아라 이러시면 어떻게 해요·”
“그런 막돼먹은 소리는 말거라· 기억이 없더라도 네 어머님 되시는 분이 아니냐· 그리고 기억이 없다한들 사람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바가 있으니 설마 어미라고 하셔서 그걸 모르시겠느냐·”
그게 문제인 건데요····
청의 표정이 영 꺼림직하니 서문수린이 제자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서문청으로 살겠다 하더라도 자식을 찾는 어미를 외면해야 되겠느냐· 마마께서 또 언제 밖으로 나오시겠느냐 어차피 긴 삶에 두 달 뿐이니 공경하여 모셔 드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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