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
그때 바깥이 소란스럽더니 문이 열렸다·
청도 아는 얼굴이 문전에 서 있었다·
이해해 주는 척 속여다가 여기 가둔 그놈!
청이 경계심을 바짝 올렸다·
사람 좋아 보여서 믿었더니 이 꼴이었다·
청이 그러거나 말거나 장강일척 파본무는 굳을 얼굴로 제 할 말을 했다·
“언 소저· 죄송한데 도움을 좀 주십쇼·”
“결국 일이 그렇게 되었군요· 제가 분명히· 경고를 드리지 않았던가요?”
“이거 면목이 없게 되었는데· 일전에 한 제안이 아직도 유효한 거면···”
“일단· 가지요·”
청이 눈을 번뜩였다·
저 미친 여자를 데려가는구나 하고·
그야말로 이 끔찍한 감옥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였다·
빨리 좀 꺼져라· 나는 자유를 찾아 떠나야지·
그러나 미쳐버린 반사회적 초초고수 살인마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문 소저도 같이 가도 괜찮겠지요?”
“아니 나는 왜? 그냥 여기 있을 테니· 두분이 사이좋게 다녀와요· 집 지키고 있지 뭐·”
“그러면· 못 써요? 파 대협· 괜찮겠지요?”
“언 소저가 굳이 그래야겠다면 어쩔 수 있겠소? 허나 왜?”
“글쎄요· 개인적인?”
언연영이 청의 팔을 잡아끌어 팔짱을 꼈다·
청의 표정이 썩어들었다·
그렇게 청이 한쪽 팔이 인질로 잡혀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려 갑판 위로 올랐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
갑판이 온통 피바다였다·
뜯겨진 팔과 다리 따위가 여기저기 나뒹군다·
몸통 속에 들어있는 여러가지 요소들 역시 개별적으로 떨어져 나와 전시된 상태였다·
나만 빼고 즐거운 잔치를 벌였구나·
치사한 새끼들·
나도 팔다리 뜯을 줄 아는데·
나도 장기자랑 하고 싶은데!
청이 이를 으득 갈았다·
“어머나· 서문 소저· 화가 나나요? 그렇게 흉악한 무공을 익히고서는· 의외로 정의로운 여협이었을까요? 어라아···?”
“뭐래·”
언연영이 큰 오해를 했지만 어차피 청이 질색하는 중이었다· 대답 그대로였다· 뭐래·
순간 팔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청의 허리가 엉거주춤 굽었다· 귀에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미친 여자의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나쁜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거· 비밀이었답니다?”
“남이사·”
“매정하시어라····”
언연영이 섭섭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청은 이 악당이 참새 눈꼽만큼도 서운하지 않다는 데에 전 재산 더해 팔다리까지 걸 자신이 있었다·
청의 발길이 뱃전 한가운데서 멈췄다·
사람들이 정색을 한 채로 무언가를 빙 둘러싸고 있었는데 파본무가 나타나자 슬쩍 비켜서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꽁꽁 묶인 청년이 있었다·
얼마나 꼼꼼하게 묶어놓았는지 두꺼운 선박용 밧줄을 감아놓은 줄타래에 사람 머리만 밖으로 나온 꼴이었다·
청년이 무언가 연신 말을 하려고 하나 입에 단단히 물려놓은 두꺼운 재갈에 읍읍읍읍 나직히 안간힘만 쓰고 있었다·
“목강시네요·”
“치료가 치료가 가능하겠소?”
“이미 원단이 반 이상은 상해버리고 말았네요· 단전을 부숴 정압을 풀어놓는다 해도 남은 수명은 이십 년 내외가 될 거예요·”
“정녕 그 방법뿐이오?”
언연영이 대답 대신 복하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복하운이 괴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언가의 소가주가 말하는 바라면 그뿐인 거겠지· 필요한 것들이 있소?”
“다행히 대부분은 갖추고 있답니다· 제 짐과 신선한 암탉 두 마리· 그리고 달걀 한 꾸러미··· 그리고 식도를 준비해 주시겠어요?”
언연영이 밧줄 묶음에 바짝 달라붙었다·
청년의 미간에 검지와 중지를 세워 붙이고 입으로는 연신 도문을 읊었다·
놀랍게도 그럴듯한 도사처럼 보였다·
때를 틈타 청이 파본무에게 물었다·
“저 여자 대체 정체가 뭐에요?”
“듣지 않았나? 진주언가의 소가주라고·”
“듣긴 했는데 그래서요? 거기는 뭐하는 가문이길래 저딴 게 나와요? 아주 미친 여자던데·”
“소저· 내 딸 같아서 해주는 말인데· 아무리 정파의 명가 출신이어도 무림맹의 대순찰자를 그렇게 부르다간··· 아니 당장 우리가 할 소리는 아니구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파본무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뭐야 미친 살인마한테 사람을 바친 주제에·
청이 무시하고 재촉했다·
“그래서 뭔데요?”
“진주언가는···”
진주언가는 중원 제일의 장의도사들이다·
장의도사란 시체를 염하고 돌보며 명복을 빌어주는 도사들을 말했다·
승려나 도사도 하는 일이나 장의도사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도술이 있었다·
시신의 시기를 이끌어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기이한 도술이었다·
이렇게 스스로 움직이는 시체를 강시라고 했다·
“뭐야 강시요?”
“강시는 아는구먼·”
“그 이렇게 하고 폴짝폴짝·”
청이 팔을 펴고 강시 흉내를 냈다·
파본무가 혀를 찼다·
“쯧쯧· 딱 꼬맹이들이나 믿는 소리로군·”
“그럼 그냥 꼬맹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그래서요? 이게 다 무슨 일이래요? 대순찰자는 또 무슨 소리고· 무림맹이요? 저 여자가 무림맹이야?”
무림맹이면 정파들 모임인데· 왜 저런게?
청이 닭의 피로 부적을 쓰고 있는 언연영을 흘끗거렸다·
저건 그새 악업이 또 늘었네·
내가 뭔가 오해를 한 건가?
강시가 문제인가? 죽은 사람 가지고 놀아서?
아니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그리고 자기 입으로 나쁜 년이라고 자백했고·
청이 긴가민가하는 사이 파본무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 아저씨 의외로 입이 가볍다·
파본무가 알았으면 억울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청을 명문 정파의 가출 소녀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어차피 알게 될 사실 그냥 말해주는 것뿐이었다·
“열흘쯤 전이었나 그때···”
장강수로채에 무림맹 대순찰이 찾아왔다·
그리고 대뜸 하는 소리가 일전에 근처의 비밀 동혈에서 혈강시 몇 구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혈강시 한 구를 만드는 데에 희생되는 생명의 숫자가 자그마치 일백이었다·
맹은 이를 동해에서 실종된 사람으로 추정했고 그들이 뱃길을 따라 동정호로 옮겨졌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장강에서 그런 천인공노할 사악한 밀수를 실행할 수 있는 집단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장강수로채였다·
그러나 무림맹은 복하운의 성향상 절대 그러한 일을 저지를 인물이 아니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그렇다면 다른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대순찰자를 보내 알리고 진상을 조사하고자 했다·
“말이 다르잖아요· 독방에 가둬놓고선·”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만·”
파본무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부터는 수로채의 사정이었으니까·
—-
장강수로채는 변했다·
물 위에 배 탄 강도에서 벗어나 이제는 번듯한 사업을 가진 하나의 문파와 같았다·
통행세?
애초에 무림문파들도 자기 구역에서 보호비를 받았다·
장강을 지키는 호걸들이 약소한 통행세를 받는 쯤이야 그들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다만 이 변화에 모두가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녹림이 있었다·
녹림과 수로채가 예로부터 강력한 맞수로 평가되던 만큼 수로채의 진화가 달갑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산적 놈들이 계속 입을 털었다·
본분도 모르는 부끄러운 새끼들·
감히 호걸이라 칭하지 마라 관부의 개새끼가 되어 먹이나 받아먹는 주제에·
나 같으면 관과 붙어먹느니 고추 자르고 비구니가 되고 말겠다 등등····
복하운의 입장에서는 산적 놈들이 뭐라고 지껄이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수로채에 속한 놈들이 그 말에 동조하고 나선다는 것이었다·
전대의 마인들이 주축이 된 소위 전통파였다·
약탈과 강간 식인의 맛을 잊지 못한 인간 말종 쓰레기들· 그리고 그걸 바라고 수로채에 들어온 예비 말종 쓰레기 지망자들이 힘을 보탰다·
그리고 최근 놈들이 명백히 무언가 음모를 꾸미는 기색이 있었으므로 혈강시라는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전통파가 보통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니다·
잘못하면 수로채 전체가 휘말려 박살이 난다·
이 일은 외부의 도움 없이 처리해야 한다!
이런이런 일이 있었는데요 다행히 우리가 막았습니다 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때였다·
무림맹의 대순찰을 ‘보호’한 이유였다·
수로채주 복하운이 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의 간섭을 각오하고서라도 무림맹의 도움을 받아들여야 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랬다면 저 아이도····’
그때였다·
“후우···”
언연영이 땀을 훔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이는····”
“다행히 잘 되었네요· 이제 곧 정신을 차리실 거예요·”
복하운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수명이 줄었다고는 해도 죽는 것보단 나았기 때문이었다·
“이십 년 정도라고 하셨습니까?”
“처치가 잘 되어서 그보다는 조금 더 오래 사실 거에요·”
그 정도면 되었다고 복하운이 생각했다·
이제라도 빨리 혼사를 이뤄주면 되겠지 하고·
복하운이 진심으로 손을 모아 포권을 취했다·
“복 모가 은인께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은인이라니요· 그렇지 않은걸요·”
“아닙니다· 자식의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은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말· 아닌데····”
언연영이 기묘한 미소로 대답했다·
분명 어딘가 석연치 않은 미소였다·
그러나 복하운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것도 털어내지 않으면 전신으로 옮겨붙을 불씨였다·
급한 마음이 복하운의 상념을 털어버렸다·
일단 아들은 살려냈다·
그러나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부찰도위사의 팔이 떨어졌고 그 흉수가 수로채주의 아들 복흠척이었다·
게다가 습격이 복하운의 명령이었다고 쩌렁쩌렁 외쳤다· 부찰도위사를 챙겨 도망간 관군들 중 그 말을 듣지 못한 자가 없었다·
‘이걸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복흠척이 깨어났다·
“윽···· 머리가····”
머리를 짓누르던 복흠척이 돌연 몸을 떨었다·
복흠척이 깜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제 아비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아버지! 큰일 큰일입니다! 본채에 본채에 그 놈들이 저주받을 마물들이 쫙 깔렸습니다! 수로채의 식구들이!”
청은 그 광경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상황이 심각해 보이기도 하고·
당장 배를 돌리라느니 본채를 구원하러 가야겠느니 하면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모두가 분주한 속에 청이 혼자 덩그러니 섰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구경할 때가 아니지·
그 여자가 달라붙기 전에 튀어야·
“어머나· 어디를 가시려구요?”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언연영이 어느샌가 옆에 있었다·
진짜 씨발 개같은 년 같으니·
진심으로 진저리가 난 청이 정색했다·
청이 그러건 말건 언연영이 바짝 귓전에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귓속말을 건넸다·
“곧· 시작될 거예요· 그래도 그저 편안히 있으면 된답니다· 내가 지켜줄게요· 서문 소저는 너무 연약하고 하찮으니까요·”
청이 인상을 구겼다·
초초고수가 너 약하잖아 하는 말이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었다·
저 괴물에 비하면 약한 것이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저 또 반갑지 않은 임무 창이 떠올라서·
진짜 씨발· 진짜진짜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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