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1
청은 언제나 당당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추태를 부렸다는 인식을 가졌다· 무림 출도 이후 최초의 실책이었다·
내가 얼마나 성실하고 선량하게 살았는데·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번에도 내 잘못은 아니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정신이 아주 메롱한 때에 눈앞에서 양아치짓을 벌인 태평검문이 잘못했다·
그리고 그 후엔 눈치도 없는 대련무새 새끼가 사람을 긁어놓았지 않았던가·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좀 과했다·
그래· 나도 눈꼽만큼은 잘못이 있는 거니까·
내 완벽한 도덕성이 깨지고 말았구나·
그런 이유로 청은 우울했다·
사실 청도 사람 베고 희열을 느끼는 지금의 상태가 결코 정상이 아닌 걸 안다·
하지만 좋은 걸 어떡해·
진짜 참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그래서 몸가짐을 조심해왔다·
베고 찢으며 즐기는 건 나쁜 놈들만·
청은 아주 약간 특이할 뿐 결국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런 때의 해결 방법도 평범했다·
나쁜 추억만 가득한 도시 떠나야지·
청의 행동력은 중원 제일이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매인 데가 없으니까·
가는 길에 태평검문에 들렀다·
정문을 지키던 무인이 용건을 묻길래 전리품 다섯 자루를 고이 넘겨주었다·
“이건···?
“오다 주섰어요·”
“···?”
뭘 하면 검을 오다가 줍는단 말인가·
그것도 문파의 검을 다섯 자루나·
잠시 뇌가 정지한 무사가 뒤늦게 손을 뻗었을 때는 청이 이미 성큼 멀어진 이후였다·
“소저? 어디 가시오! 잠시만···!”
정문을 지키느라 따라붙지도 못하고 애처로운 목소리만 청을 붙잡았다·
하지만 청은 바람과 같아서 붙들 수 없다·
그러고 나니 어딜 가느냐의 문제가 남았다·
청이 생각했다·
일단 나는 물이랑은 안 맞나 보다·
어째 강과 엮여서 좋은 꼴을 못 봤다·
갑툭튀한 끝판왕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아마 사주 쪽에 물과 관련된 살이 낀 모양·
장강 자유이용권은 아깝지만 팔자를 어기면 좋은 꼴을 못 본다는 조상님들의 지혜를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청이 그렇게 호사스럽게 여행한 역사가 별로 없었다·
언제부터 표행 찾고 마차 타고 그랬다고·
그렇게 청이 도보로 길을 나서려는데-
“뭐야· 너 왜 따라오냐요·”
“아니 따랐다기보다는· 나도 딱히 갈 데가 없으니 눈길 가는 대로 가다 보니 무심코 이리된 모양이오·”
“그런다고 대련은 없거든? 그리고 갈 데가 왜 없어요? 좋은 집 놔두고 배부른 소릴·”
“그게 흠· 아무래도 가출을 좀 할 생각이라서 그렇소· 이대로 돌아갔다간 아무래도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으니·”
일이 벌어진 지 사흘이나 지났다·
소문이 뭉게뭉게 퍼지면 안휘성의 실질적인 지배 가문인 남궁세가에게 흘러드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현 가주 검왕 남궁대로는 대쪽 같이 빳빳한 사람이었다·
대낮에 여인을 희롱했다는 소문이 귀에 들어가면 대로할 것이 뻔했다·
청이 황당해서 물었다·
“안이 그럼 갈 길 가지 왜 따라와요?”
“소저 너무 매정하게 굴 것 없지 않소? 같은 검객끼리· 검의 길을 추구하는 자는 사해 안의 모두가 동지와 같다오·”
청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동무 기립해야 할 것 같은 소리야?
이 혹덩이를 어떻게 떼어버린담·
그러다 문득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었다·
왜 부잣집 도련님을 굳이 떼어놔야 하는가?
그러자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내가 초심을 잃었구나!
애초에 청이 누구와 함께 여행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움직이는 때는 그로 인한 혜택을 잘 누려왔지 않던가·
그러고 보니 산이는 잘 있으려나?
뭐 여인 떼를 몰고 다니면서 숨이나 쉬겠지·
어쨌든 부잣집 도련님과는 충분히 어울릴 가치가 있었다·
대련의 귀찮음에 너무 매몰되고 말았다·
까짓것 투닥투닥 몇 번?
해주면 그만이지·
물론 그 전에 필수적인 과정이 있었다·
바로 올바른 관계 정립이었다·
오래 볼 사이일수록 그 관계가 명확해야 하는 법이었다·
해봐야 이십 대 중반 애기다·
꼬박꼬박 존댓말 붙이며 따라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청이 일단 슬쩍 던져보았다·
“검의 길을 추구하는 동지라면· 이를테면 검우가 되겠네요·”
“검우!”
남궁신재가 눈을 부릅떴다·
“살면서 이리도 감동적인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없군· 검우 검우라니····”
“그럼 우리 검우하는거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요! 검우· 좋군·”
“그럼 같이 검을 수련하는 사이에 굳이 예의 차리며 거리를 둘 필요는 없지 않을까?”
“흠···”
남궁신재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군· 원한다면 그리 하시오·”
뭐야· 이렇게 쉽게?
청이 가소로운 상대에게 실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실망이 너무 빨랐다·
남궁신재의 별호는 소검왕이고 달리 불리는 별명이 있었다· 바로 검치였다·
검에 미친 새끼라는 뜻이었다·
청은 남궁신재를 너무 얕보았다·
“···그래서 검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무기라 할 수 있는 것이라오· 구천현녀께서 굳이 현신하시어 월국에 검을 전하고 팔선의 수장이신 여동빈께서 검을 쓰시니 세상 이치가 곧 천하제일병기가 온전히 검뿐임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소?”
“어· 그래···”
“흔히 백일창 천일도 만일검이라고 이야기하지· 물론 그 화자가 창수나 도객와 가까이 지낼 경우야 백일과 천일의 자리가 뒤바뀔 수도 있지만 일만 일을 수련하여 끝을 보기 힘든 만일검의 자리를 감히 위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오· 이는 검의 우월함을 다시금 증명하는 바이며 우리 검객들이 다른 병장기를 다루는 유사 무인들과는 다르게 진정한 무인···”
아씨 괜히 엮였네·
옆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검 자랑이 도무지 끝날 기미가 없었다·
검우· 검 친구라는 말이 남궁신재를 제대로 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오랜만에 진정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한 남궁신재가 흉중에 고이 품어둔 검에 대한 특별한 소회를 털어놓는 것이다·
거 참 말 많네·
게다가 남궁신재의 검 예찬은 청이 듣기에도 상당한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단순히 나는 검이 좋다 너무 좋아서 주체할 수가 없다의 수준이 아니다·
검이야말로 세상 유일한 병기이며 나머지는 사실 무기라고 쳐줄 가치가 없다·
따라서 진짜 무인은 검을 든 검객뿐이며 그 외 나머지 무기라고 쳐줄 수 없는 유사 병기를 드는 놈들은 무인이 아니라 무인 호소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대충 이런 주장을 펴는 중이었으니까·
“아· 너무 내 이야기만 했나 보오· 소저는 어떠오? 소저도 검에 대해 품은 깊은 철학이 있을 텐데·”
“어· 일단 뭐 편리하지?”
“맞소! 그 압도적인 편의 그걸 무시할 수가 없지· 자고로 창은 그저 찌를 뿐이고 도라는 사이비 검은 그저 베기만 할 뿐이니 그 묘리가 얕고 보잘것 없다오· 그런가 하면 곤은 애초에 병기가 품은 의지 적을 참하는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이오 편은 애초에 쓰는···”
청이 일단 말을 잘랐다·
“자자· 검 좋은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이야기니까 일단은 다음에 하고· 어디 가 볼 만한 데 없냐?”
“흠·”
남궁신채가 턱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그러다 주먹을 탁 쳤다·
“그럼 화산은 어떠오?”
“화산?”
“이전에 화산의 절검벽을 보고 왔다오· 정말 굉장하다는 말 이외에 다른 표현을 할 수가 없더군· 신녀문이라면 화산파도 절검벽을 공유해 줄 것이 틀림없소·”
“적에 없는 문외제자라도 상관없으려나?”
“그게 아니더라도 소저의 신위라면 상관없을 것이오· 내가 갔을 적에도 그러했으니·”
“호오·”
화산이라니 보고싶다!
언제 눈으로 화산을 볼 기회가 있겠는가·
아무래도 좀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은 되지만 얘가 가서 보고 왔다고도 하고·
또 화산파라면 스승님 입에서도 여러 번 나왔으니 유명한 문파인 모양이고· 뭐지? 구파?
문파가 자리를 잡을 정도면 큰 위험은 없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불보다 강력한 용암을 어떻게 참아·
—-
청의 행동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안휘에서 탈출해야 하는 남궁신재도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남궁신재의 돈으로 마차와 마부를 구했다·
마찬가지로 간식거리도 넉넉하게 샀다·
그리고 대련용 목검도 넉넉하게-
청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목검을 그렇게 사? 떼다 팔면 돈이라도 되냐? 여기 특산물임? 목검 잘하는 집인가?”
“이런· 서문 소저가 아직 잘 모르는군· 대련 몇 번이면 금방 부러지는 것이 목검이오· 넉넉하게 챙기는 게 모자란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소?”
그런 것 치고는 좀 많은데····
하지만 자기 돈으로 사겠다는데 딱히 말릴 것도 아니었다· 청이 그냥 그런갑다 했다·
대련이야 귀찮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어차피 마차에서 엉덩이를 조지면서 검 예찬을 듣고 있노라면 이 새끼를 좀 두들겨 패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그럼 두들겨 패지 뭐·
원래 대련에서는 실력의 차이가 더욱 도드라지는 법이니까·
비겁한 수단 금지·
위험한 요혈을 노리는 것도 금지·
그 외 위험성이 있는 초식을 쓰려거든 먼저 알려주어야 하기까지 하고·
그러니 청이 대련이라고 해도 그 결과는 빤히 보이는 것이었다·
겨우 검기도 제대로 유지를 못해서 깜빡깜빡 정신 사나게 구는 절정 초기 애송이 따위·
사실 대련보다는 지도가 더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궁신재와의 대련은 도움이 전혀 안 됐다가 또 됐다가 왔다갔다 애매했다·
그러니까 첫 대련에서였다·
청이 짓쳐오는 다섯 개의 검영에서 두 개를 골라 툭툭 쳤다·
실초 두 개가 모두 파훼 당하고 나자 기세를 잃은 허초의 모습이 흔들려 사라지고 만다·
청이 한 발짝 내디디는 척 속임수를 걸면서 남궁신재의 발목을 툭 찼다·
남궁신재가 억 하고 정수리를 내밀었다·
아! 바로 지금이구나!
청의 왼손이 중지가 슬쩍 튀어나온 주먹으로 오무라졌다·
사부님 드디어 제자도 한 건 하겠습니다·
하늘에서 지켜봐 주세요·
딱!
순간 청은 내면에서부터 차오르는 아주 진한 만족감을 느꼈다·
사부님이 항상 이 좋은 걸 혼자 하셨구나·
그렇게 승부가 났지만 남궁신재가 승복하지 않았다·
“소저 너무 치졸하지 않소! 반칙이오!”
남궁신재가 분한 듯 소리쳤다·
“엥? 내가? 내가 뭘?”
청이 진짜 몰라서 물었다·
“어찌 검을 두고 다른 공격을 한단 말이오!”
기묘한 대답이 돌아왔다·
발길질 금지 핵꿀밤 금지라는 소리였다·
“···? 뭔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검술 대련에는 오로지 검만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오· 그것도 몰랐소?”
청이 황당함에 눈만 끔벅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 풀 뜯어 먹는 소리야?”
“···? 말은 원래 풀을 뜯지 않소?”
“됐고·”
청이 진지하게 항변했다·
“실전에서도 검만 써야 하느니 그딴 소릴 하진 않을 거 아냐?”
“실전에서는 어쩔 수 없지 않소· 내 실력이 모자라니 다른 수단을 쓸 수밖에· 하지만 이건 대련이잖소? 순수하게 검력을 높이기 위해서 하는 수련인데 당연히 검만을 사용해야 하지·”
“음?”
설득력이··· 있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개소리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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