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5
과거 무림맹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정파는 그저 느슨하게 엮인 거대 문파-세가의 집합체였다·
중요한 점은 느슨하게나마 엮였다는 것이다·
경조사에 서로서로 참여해 얼굴을 비추거나 편지를 통해 안부를 묻거나 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잠룡지회는 바로 이때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후기지수의 모임도 아니었다·
그저 문파-세가의 실권자들이 친하게 지내며 경조사를 위한 일종의 계였다·
금액이나 조금씩 모았다가 돌잔치니 회갑연 혼인과 상조에 보태라고 전해주는 그런 모임·
그런데 마교가 쳐들어왔다·
정파는 살아남기 위해 힘을 합쳐야 했다·
그런데 잠룡지회로 잘 아는 이웃들이다·
게다가 우리 아들이 너네 사위고 너네 아들은 쟤네 사위인데 또 쟤네 아들은 우리 사위다·
그렇게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하나로 뭉친 백도 정파의 힘이 마교의 침략을 저지했다·
무림맹의 탄생이었다·
정식으로 백도 정파의 연맹이 출범하고 나선 잠룡지회는 청년 무인으로 구성된 예비 전투단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찬물에도 위와 아래가 있는 법이다·
감히 구파일방과 십대세가의 존귀한 청년들이 어설픈 백도 정파와 겸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잠룡지회는 2개의 단으로 구성되었다·
천무대· 그리고 지용대·
천무대는 구파일방-십대세가의 청년들로 이루어지며 대원 중 소속이 다른 10인 이상의 추천을 받은 특별 대원을 포함했다·
지용대에는 그 외 젊은이들을 모아놓았다·
그래서 백도 정파의 젊은이는 누구나 천무대 대원이 되기를 꿈꾼다·
그들에게 천무대원은 구름 위를 노니는 진정한 정파 무림의 실세들이었다·
속물적인 요인을 제외하더라도 대원 모두가 나이를 한참 뛰어넘은 고수들이었다·
빼어난 성취를 이룬 진정한 잠룡들!
이러니 정파의 청년들이 천무대를 동경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청년들의 상상 속에서 천무대원들은 사귀며 서로의 무공을 끌어올리기 위한 진중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각자 깨달은 무학의 도리와 이치를 아낌없이 나누고 토론하겠지·
아! 나도 그 자리에서 함께 토론하며 의견을 나눌 수가 있다면!
백도 정파 젊은이들의 꿈이었다·
그리고 여기 청이 그 꿈을 누리고 있었다·
천무대원들과의 징명한 무학 토론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백일창 천일도 만일검이라 하지· 이는 검이 만병지왕 무기 중 가장 위대함을 증명하지 않겠나? 어떤가 검우?”
“인정합니다· 창빈 도사는 어때?”
화산파는 화산검파라고도 불린다·
검 쓰는 놈들이라는 뜻이었다·
“본 도사 역시 한 사람의 매화검수로서 인정할 수밖에는···”
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언했다·
“그러면 압도적인 인정 표결로 검이 도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안건은 통과되었습니다·”
팽대산이 인상을 구겼다·
청이 방실거리며 다음 의제를 꺼냈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도는 칼날이 한쪽밖에 없는 검이므로 반밖에 없는 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도라고 하지 않고 반검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오! 검우 반검이라니· 내 살면서 그렇게 도를 정확하게 묘사한 단어는 처음이오· 이건 감동적이기까지 해· 나는 인정하겠소·”
“그래도 타인의 병기를 그렇게까지····”
“창빈 도장 지금 배신하는 거예요? 우리는 도문이잖아요? 도 닦는 친군데? 도문 버려?”
“···반검 인정합니다·”
“그럼 삼진 인정으로 인해 앞으로는 산이가 도객이 아니라 반검객인 걸로···”
검객이 셋에 반검객이 하나였다·
팽대산이 반대를 하려고 해도 숫자에서 밀려 패배하고 마는 다수결의 함정이었다·
“하· 도대체 유치해서 어울려 줄 수가 없군·”
팽대산이 이를 갈며 생각했다·
굳이 청과 동행할 이유가 있었던가?
도대체 무슨 변덕이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분명한 진심은 이러했다·
괜히 그랬다는 것이다·
그냥 가는 길 가게 둘걸· 빌어먹을·
“그럼 오늘의 간식은 반검객이 쏘는 걸로?”
팽대산이 으르렁거렸다·
“지금 내가 그딴 소리를 듣고도 다과를 대접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얼굴 두껍기로는 아주 세상 제일이로군· 하·”
“왜? 그래도 반은 검객으로 인정을 받은 순간 아닌가? 나 같으면 감동에 울부짖으며 소돼지 잡아다 동네방네 아주 잔치를 벌였다· 진짜로·”
옆에서 남궁신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팽대산의 음정이 하나 내려갔다·
“뚫린 입이라고 마구 지껄이는데”
“에이· 싫으면 말구· 검우? 목마르지 않나? 시원한 용정차 한잔 안 당겨?”
“검우가 목이 마르다면 내 두고 보겠소?”
“그럼 빙소 먹어도 됨?”
빙소란 발효된 우유를 얼린 과자를 말했다·
현대의 요거트 맛 아이스크림이다·
수제 요구르트가 살짝 쿰쿰한 점을 제외하면 맛도 식감도 완벽하게 일치했다·
청이 이 과자의 존재를 알고 크게 놀랐다·
이 미개한 원시 고대 중국에서 빙과류라니!
겨울에 얼음 파서 저장하는 원시인들 아닌가?
어떻게 이런걸?
그냥 청이 몰랐을 뿐이었다·
중세 중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 국가였다·
한여름에도 온갖 빙과류를 척척 만들어다 잘만 퍼먹었다·
더울 땐 찬 것이 최고다·
눈 퍼다가 단물이나 뿌려 먹은 서쪽이야말로 이 시절에는 미개한 놈들이었던 것·
물론 이토록 빼어났던 중세 중국의 유산은 붉은 인민의 아찔한 즐거움으로 대체되었다·
“빙소만으로 되겠소? 밀빙도 먹고 소락도 먹고 찬 과자로 한 상 차려다 다 먹어도 되오·”
청이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여윽시 우리 검우! 감동의 검세! 검!”
“우!”
남궁신재가 우를 외치며 검을 들어올렸다·
허공에서 검이 모로 만나 교차했다·
팽대산이 고개를 저었다·
청이야 본래 정신 나간 여인이라서 그렇다고 치고 일일이 받아주는 남궁 형이 문제였다·
사실 남궁신재는 잠룡 중 최고로 꼽혔다·
어릴 때부터 보인 남다른 이해력과 틀을 깨는 안목으로 하나를 보면 열을 깨닫는 문일지십의 천재로 온 무림의 기대를 샀다·
검왕이 아니라 차기의 무제가 될 것이라고·
오로지 검으로만 경지에 오르겠다는 기이한 집착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절정 후기에 아니 초절정에 이르렀을지도 몰랐다·
만류귀종·
모든 무공이 그 정점에서 단 하나로 결론이 난다는 말이었다·
무학의 이치가 이러한데도 오로지 검술 하나에만 매몰된 남궁신재였다·
경지가 오르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남궁신재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고집을 부려 검치 행세를 하고 다녔다·
진지한 사람에게는 진지한 말이 날아든다·
하지만 바보에게는 참견하지 않는 법이라서·
검왕이 답답함에 매일 밤마다 술을 술잔 없이 안주도 없이 들이키며 폭음을 하는 이유였다·
그야말로 불타는 효자였다·
팽대산이 이를 갈았다·
“아주 꼴값을 떨고 앉았군·”
그때 청의 합류로 말수가 줄다 못해 아예 사라져버린 창빈이 슬그머니 질문을 던져왔다·
“근데 팽 아우· 본 도사가 궁금해서 묻는데 도대체 시원한 용정차라는 게· 내 살면서 그렇게 끔찍한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런 게 진짜로 있기는 하나?”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러십니까?”
“으음····”
턱을 쓰다듬던 창빈이 결론을 내렸다·
“···쉽지 않군·”
팽대산이 울컥 치미는 것을 입 밖으로 내보내려다가 그래도 형님이다 하고 참아 삼키며 한숨이나 푹 내쉬었다·
결국 청이 방싯거리며 빙과를 처먹는 모습으로 토론의 결론이 나왔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아주 처먹는 꼴이었다·
팽대산은 괜스레 그 꼴이 못마땅했다·
아주 누구라도 사주기만 하면 다 처먹는군·
세가에서 기르는 흑구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주는 먹이는 처먹지 않거늘·
그러거나 말거나·
청은 그저 즐거웠다·
현재 일행은 황천에서 서쪽으로 사흘거리를 달려 신양에 머물기를 이틀 차였다·
도련님들에게 낑겨 가는 여행이 이랬다·
마차 타고 도시에 닿으면 여독 상태에 따라 하루 이틀 정도 쉬었다·
그리고 또 마차 빌려 타고 출발·
물론 다소 검약한 편인 팽대산과 진짜 검약한 창빈은 마차와 마부를 대여하기보다는 표행에 합류하는 편을 선호하긴 했다·
하지만 일행에는 전표책 북북 찢으며 들르는 전장마다 전낭을 가득 채워오는 남궁신재가 있었다·
오대 세가 중에서도 남궁은 두 번째로 부유한 집안이었고 소검왕의 씀씀이는 그야말로 인간 세상에 강림한 재신이나 다름없는 면모였다·
참고로 오대세가 중 제일로 부유한 집안은 사천에 있다나 어쨌다나·
이틀이나 쉬었으니 슬슬 출발할 때였다·
“여기가 갈림길이다· 북으로 가면 편하고 빠를 테고· 서쪽으로 가면 한동안 도시도 없고 멀리 돌게 될 테지·”
“그럼 북으로 가면 되잖아?”
“북으로 가면 낙양이 나온다·”
에이 씨· 낙양에는 악연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공이나 많이 늘었지 경지는 같은 상황이었다·
초절정만 찍었어도 가서 깽판을 놓았을 텐데·
치워 놓은 돌발 임무도 남아있었다·
두고 봐라· 내가 초절정만 찍고 나면 아주 도륙을 내버릴 것이야·
그때까지 목 씻고 기다려라 흑영회!
아니 흑웅회? 뭐였지· 아무튼·
이놈의 원시 중국은 뭐 문파건 사람이건 이름이 다 비슷비슷해서 헷갈려 죽겠다·
물론 청의 얼굴이 많이 달라지긴 했다·
하지만 팽대산이 옆에 있는 이상 결국 주목을 받게 될 거고 만에 하나라도 상황이 벌어지면 또 튀어야 하는 꼴이었다·
“서쪽으로 가면···”
“다음 도시는 대별산 근처가 될 테니 일주일은 걸리겠지·”
청이 인상을 찌푸렸다·
일주일간 촌락 아니면 노숙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사실 중원에서 그 둘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잠자리부터 음식까지 조금 더 수고롭거나 아니면 동전 몇 개로 그 수고를 면하거나의 차이 정도·
그렇다고 뭐 어쩔 수 있나·
청이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무래도 나 때문에 좀 험한 길 가야 쓰겠다고·
“실망이오· 내가 검우의 어려움을 외면할 사람으로 보였소?”
“어 본 도사는 이쯤에서···”
“뭐에요? 도문 동지 버릴 거에요? 배분 버려? 항렬 몰라?”
“동의합니다···”
둘 모두 참으로 호쾌하게 동의를 해 주었다·
물주가 사라지는 일은 면했으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렇게 짐을 싸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상하게 사람이 많은 거리에 또 기이할 정도로 여인의 비율이 높았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은 광경이었다·
무시하고 마방으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청이 기묘한 상황을 목격했다·
“우리 아들 좀 찾아 주세요····”
“아니 이 할망구가! 또 여기가 어디라고!”
“하이고 제발 우리 아들이 분명 대정문으로 간다고 했단 말이에요· 네? 한 번만 찾아보게 해 주세요· 제발···”
으리으리한 담벼락에 난 쪽문 앞·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봉을 든 무인에게 매달려 사정을 하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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