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옥기린 팽대산· 천하제일미남 팽대산·
팽대산은 이 별호가 싫었다·
정말로 진절머리가 났다·
그저 잘생겨서 얼굴이 잘 나서 붙은 별호였다·
그런 별호를 받고도 좋다고 웃는 새끼는 무림인의 자격도 없는 놈일 것이다·
팽대산의 나이 스물둘·
팽대산은 겨우 스물둘의 나이에 절정 중반에 올랐다· 실로 하늘이 내린 무재이자 이번 후기지수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성취였다·
그런데 뭐? 옥기린? 천하제일미남?
세상에 이런 치욕이 있을 수 있을까·
남궁가의 신재 놈만 봐도 그렇다·
절정 초기에 겨우 턱걸이한 남궁신재 그놈의 별호는 무려 소검왕이었다·
차기 검왕이라는 뜻이었다·
심지어 남궁신재는 팽대산보다 한 살 많았다!
걔는 소검왕이고 나는 옥기린이라니!
그래서 팽대산은 삐뚤어졌다·
그래도 근본이 성실한 탓에 크게 삐뚤어지진 않았다·
대신 이성에 한해서만 싸가지라는 개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팽대산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팽대산은 현 무림 최고의 신랑감이다·
일단 잘생겼다· 목소리도 좋다·
중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가문의 장자이며·
심지어 팽가는 오대세가 중 정략혼이 없는 유일한 가문으로 유명했다·
물론 다른 거대세가들에게 ‘혼인을 거래하는 소인배 좀생이 얼간이 수전노들’ 취급을 하는 데에 재미가 들렸기에 유지되는 가풍이기는 했다·
팽가는 혼인에 있어서 순정 이외의 하찮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근데 너네는 아니네? 하고·
거기에 더해 팽대산은 고수였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고수가 될 예정이었다·
외모 신분 재력과 실력을 두루 갖췄다·
그래서 팽대산은 깨어있는 모든 순간과 간혹 잠이 든 시간에서도 반경 내 모든 여인들의 시선을 받았다·
그나마 지켜보기만 하는 여인은 나은 편이었다·
팽대산이 가는 길마다 온갖 잡것들이 바닥에 버려지고는 했다·
자수를 놓은 천조각으로부터 향낭에 면포 단도에 심지어 망측한 속곳들까지·
그리하여 팽대산은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저 앞만 보고 곧게 걸어 나갈 뿐·
보다 진취적인 여인들은 몸통 박치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절정 고수와 우연인 척 부딪칠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이미 글러먹기는 했지만·
제까짓 것이 넘어지면 쓰러지기 전에 받아주리라 생각하는 비대한 자아였다·
팽대산은 몸을 날려 바닥에 착지하는 여인들을 보고 웃어야 할지 비웃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여하튼 대산은 어려서부터 극도의 여난을 겪어왔다·
극한에 이른 도화살이었다·
그래서 여인 앞에서 팽대산은 점점 무례해졌다·
싸가지를 잃었다·
관심 없으니 떨어져 나가라는 뜻이었다·
사실 팽대산에게 아청의 접근은 놀랍지 않았다·
차별화된 연애 전략이랍시고 온갖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두루 섭렵했다·
대강의 분류 체계도 갖췄다·
아청을 분류하자면 ‘당돌한 여인’과 ‘웃긴 여인’ 전략을 섞어놓았다고 하겠다·
‘웃긴 여인’ 전략의 성공 사례는 손에 꼽았으니 아청의 한 수는 인정할 만 했다·
오랜만에 웃었다·
아수라는 예상 못 했다·
패륜적 농담이라니·
그리고 나선 ‘거친 여인’ 전략이었다·
다만 그 수위가 좀 무슨 뒷골목 건달이나 할 법한 걸걸한 내용인 건 좀 의외였다·
그런데 아구창을 맞았다!
이건 또 무슨?
‘날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병신 같은 연애담인가?
그 결과 팽대산이 진짜로 빡쳤다·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분노로 인해 받아 더욱 낮게 깔렸다·
“하다하다 내가 온갖 미친년을 겪어봤지만·”
목소리에 은은한 살기가 실렸다·
그 살기에 반응해 아청의 천살이 눈을 떴다·
아청은 제가 무림 일로 상처입은 마음 보호를 위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피를 본다고 여겼다·
능동적인 해결 방책이라고·
그러나 사실은 발동이 걸리면 천살의 살기에 휘둘리는 진짜 미친년이 되는 식이었다·
피동적인 살육 충동이다·
본래 천살고성의 살기에 취하면 살육과 혈겁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어 있으므로·
“왜 빡쳤냐? 흐드흐드 느그 은긎 므츤는을 극그븠즈믄· 뭐 목소리 깔면 뭐라도 돼나? 흐흐·”
“따라하지 마라·”
“뜨르흐즈 므르· 왜 어쩌쉴? 한 대 치쉴?”
깐족거림에 있어서 현대 한국인을 따라잡을 수 있는 민족은 적어도 이 세상에는 없다·
팽대산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타오르는 분노가 그를 집어삼켰다·
“더이상의 모욕은 참지 않겠다·”
“드으승으 목욕은 참치 먹고싶 야!”
쩡! 칼과 도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먼저 쳤다? 정당방위다? 진짜 해보자는 거지? 그래 좋은 칼 두고 어째 입으로 떠든다고 했어·”
“죽이지는 않겠다· 다만 그 방정맞은 혀를 잘라주마·”
“잘라갈 능력은 되고? 옛다· 잘라 봐· 에붸-”
아청이 혓바닥을 내밀었다·
유난히 붉은 혀가 요사스레 날름거렸다·
“에붸붸붸-”
그런데 혀가 좀 오래 나와 있는다·
도대체 적당히를 모르는군·
뭐 이런 미친년이 다 있지?
이 시점에서 오히려 팽대산은 기가 꺾였다·
화가 폭발하여 도까지 뽑았으나 외려 아청이 더 날뛰면서 난리를 치는 꼴에 오히려 자괴감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져 주기도 그랬다·
절정 중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절정 중기의 힘을 살짝만 보여줘야···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아청의 검에 검기가 서렸다·
휘감아 흐느적거리는 하얀 실들이 선명했다·
검사· 절정 후기의 기예였다·
팽대산이 아청의 얼굴을 살폈다·
아직도 남사스럽게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 새삼 팽대산이 더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청의 앳된 얼굴 이제 겨우 소녀의 태를 벗어날 듯 말 듯 한 인상을 보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초절정을 넘고 그 너머로 향하는 벽을 깨부수면 조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도달한다·
화경이라고도 부르는 경지였다·
그 때에 신체는 단 한 번 세월을 거슬러 젊음을 되찾는다· 이를 반로환동이라 했다·
그렇게 반로환동을 거친 무인이란 실상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인세의 괴물이었다·
싸움이란 같은 종끼리 성립되는 것이다·
인간과 괴물은 싸울 수 없다·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 유린이라 부를 테니까·
“그 어느 방면의 고인이십니까?”
“뭐야· 여기서 그만? 거 똥 싸다 끊을 놈이네·”
도대체 저게 어찌 여인의 언행이란 말인가·
하지만 반로환동을 이룬 초고수라고 생각하니 또 말이 되는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할머님도 저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시던가·
여인이 나이를 먹으면 입이 걸어지나보다 하고·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팽가의 팽대산이라고 합니다·”
“아청이야·”
어느새 존대가 역전되었다·
아청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 새끼 쫄았구나·
역시 무림은 센 놈이 곧 법이라고·
—-
팽대산의 오해는 반 시진을 넘기지 못했다·
입만 열면 무식이 철철 흐르는 아청이었다·
무식이라기보단 기본적인 상식의 문제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겐 그거나 그거나였다·
실상 지금 팽대산이 왜 무엇을 어떻게 오해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오해는 어렵지 않게 풀렸다·
그러고 나선 팽대산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그럼 이 미친 여자가 나보다 고수라고?
“실례지마는 소저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나? 나는····”
아청이 잠시 고민했다·
서른 중반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애초에 말해도 믿지도 않을 것이다·
믿는 척이라도 하는 놈이 있었어야지·
그렇다고 아직 애기에 불과한 애기를 손윗사람으로 대하기는 좀 그렇다·
애기·
아청의 본신으로 볼 때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은 아직 군대도 안 간 애기이다·
이는 현대 한국인의 너무나 보편적이고 당연한 심리였다·
게다가 좀 잘 살 뿐이지 나보다는 약하잖아·
“팽 공자부터 말해 봐·”
“저는 올해 스물 둘입니다만·”
“나는 스물 다섯이야·”
“···진짜요? 맞소?”
팽대산의 불신 가득한 눈빛이 날아들었다·
“내가 동안이라 그래·”
“정말이요?”
“으음·”
거짓말도 하다 보면 악업이 쌓인다·
나이를 서른 중반이라 우기는 건 어떤 점에서는 진실이었다· 그러니 뻔뻔하게 밀 수 있었다·
아무도 믿어주진 않았지만·
하지만 이 신체의 나이를 대라고 하면?
이게 뭐라고 악업까지 쌓을 일은 아니었다·
아청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실은 나도 몰라· 열일곱쯤 되는데 조숙한 건지 아니면 진짜 스물다섯쯤인데 동안인 건지·”
“어떻게 나이를 모를 수가 아니·”
팽대산이 생각 없이 되물었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손을 내저었다·
아청은 푸른 옷을 입은 아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춘추 시대의 절대 고수라고 알려진 여인 월녀의 별명이기도 했다·
월녀가 푸른 옷만을 입고 다녔다나·
역사서에 따르면 위기에 닥친 월나라에 홀연히 나타나 월녀검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 검법이 워낙 신묘하고 어려워 누구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겨우 눈으로 보이는 검형만을 따라서 검보를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가공할 신공이었다·
신공으로 무장한 월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결국 아청이라는 이야기 속의 인물은 강호 여류 무인들의 우상인 것이다·
강호를 꿈꾸는 여인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그런 뻔한 이름을 제 것으로 가져다 붙인 여인·
거기에 제 나이조차 알지 못한다고 하면·
팽대산이 또 제멋대로 오해를 시작했다·
설마 고아 출신으로 떠도는 여인이었나!
그러나 이번 오해는 풀기 쉽지 않은 종류였다·
혹시 애미애비 없으시냐고 물어볼 수는 없으니·
아수라가 딴에는 진지하게 한 소리였을지도·
홀로 자라난 여인이 시조가 어쩌니 하는 물음에 대답하기가 궁했을지도 모른다·
성씨는 그저 이름의 맨 앞 글자가 아닌 뿌리와 혈족의 긍지다·
그러한 것을 아예 모르고 자란 모양이지·
그리고 저 못 배워먹은 천박한 언행!
백치와 같은 무식함!
“아니오· 내 실언을 했소· 미안하오·”
“뭐지? 갑자기 왜 기분이 나빠지지···?”
아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묘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뭐지? 또 상태창 발작이 오려고 하나?
“됐고· 동년배인 것 같은데 그냥 친구 먹지·”
“동년배라니···”
팽대산은 또래의 청년에게서 동년배라는 소리를 처음 들어보았다·
어휘의 상태가? 좀?
그러거나 말거나 아청은 나름 속셈이 있었다·
딱 봐도 부잣집 아들내미다·
친구 삼으면 얻어먹기 딱 좋을 것 같았다·
동생 삼으면 빈대 붙기가 영 모양이 안 산다
그렇다고 애기한테 형님 소리를 할 수도 없다·
“알간? 그럼 친구 먹는 거다? 알겠지 산?”
팽대산이 당황했다·
남녀가 유별한데 함부로 산이라니?
“그 소저? 아무리 친구라 하여도 산이라니·”
“내가 산! 하면 너는 청! 딱 나와야지· 산?”
“아무리 그래도 남녀가 그리 허물없이····”
“야 친구 사이에 남녀가 어디 있냐?”
“보통은 그 반대 아니오?”
그러자 아청이 당당하게 답변을 던졌다·
“그래· 설사 남녀 사이에 친구가 없다 치자· 그럼 그걸 극복하는 게 진정한 우정이 아닐까?”
“음?”
은근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알겠지? 산? 산? 산? 산?”
아주 극성맞고 시끄러운 여자였다·
딱 봐도 받아줄 때까지 떠들겠다는 의지였다·
팽대산이 마지못해 받았다·
“···청·”
“목소리가 작다! 실시! 산?”
“···청·”
“안 들리는데? 산?”
“청·”
“산?”
“청! 청! 알겠으니 그만 좀 보채시오! 좀!”
팽대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청이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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