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2
먼 과거에는 천살고성이 뜨면 태어난 아이를 찾아 모두 죽였다·
그래도 제 아이라고 탄생을 숨기는 이기적인 어미들 때문에 전후로 넉넉하게 백 일을 잡아 모조리 죽였다·
많은 피와 눈물이 대지를 적셨다·
그러나 천살의 그 흉험한 외톨이 별을 타고난 아이는 그를 감수하고서라도 제거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지를 적시는 수준이 아니라 거대한 파도로 밀려와 피와 눈물 아래 대지가 잠겨버리고 말 것이므로·
천살은 인간이 감히 견딜 수 없는 광기였다·
그리고 점차 성장하며 불어나는 광기다·
처음에는 그저 피를 보아 향기롭고 살점을 뜯고 뼈를 바스러뜨리며 즐기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살성이 점점 골수에 스미면 그때부터는 살육과 더불어 다른 즐거움을 깨닫게 된다·
사람의 슬픔과 좌절을 보아 웃음이 나오고 타인의 고통만큼 아찔한 오락이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청의 시선이 죽음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오도카니 서서 바르작거리는 산 것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청의 팔이 움직였다·
단단하게 뭉쳐 미는 칼날을 미는듯한 훌륭한 촉감· 근육이 단단한데? 단련을 잘 했어·
한 박자 늦게 청의 고개가 돌아간다·
기이할 정도로 꺾인 머리가 적을 향했다·
잘린 팔뚝을 부여잡은 사내였다·
“반가워요· 우리 초면인가?”
월녀의 검이 나풀거리며 공간을 메웠다·
본래 월녀검이 경쾌하고 명랑하게 나풀거리는 검식이었지만 천살에 취한 심상이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다·
고혹적이고 음험하게·
어느새인가 달라붙은 모기처럼 일순간 몸에 닿으니 곧장 따끔하게 신체를 쏘아 먹고 비틀비틀 무겁게 날아오른다·
월광검의 첨단이 파고들어 힘줄이 닿는 건을 톡 찍었다· 팽팽한 힘줄이 끊어져 근육 속으로 말려들든다·
사지 근맥이 잘린 적이 팔다리를 제각각 기묘한 방향으로 꺾으며 쓰러졌다·
익숙한 자세에 청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상상치 못한 정체? 뭘 좀 아는 놈이네·”
청이 적의 옆구리를 한 번 찔러주곤 앞으로 나아갔다· 비장이 깔끔하게 잘린 적의 배가 크게 부풀며 피가 졸졸 새기 시작했다·
왕손만이 남긴 선물이었다·
이제 청은 인체의 내부를 거의 다 외웠다·
어디를 어떻게 찌르고 헤쳐 어디를 벨 것인가 하는 정보를 학습한 것이다·
청이 검신을 손가락으로 쓸어 피를 훔치곤 제 혓바닥 위에 문질렀다·
짭짤하고 비린 게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니까·
그럼 나도 이제 연회를 좀 즐겨야·
“사제!”
처절한 외침· 청의 고개가 번쩍 돌아갔다·
쓰러진 대정문도를 향해 대도를 번쩍 든 적의 모습· 순간 청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막 검을 내리치려던 적이 비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시체를 뒤집어쓴 대정문도가 기겁해 밀어내고 나니 적의 관자놀이에 삐쭉 솟은 장식이 보였다·
여인의 머리를 고정하는 장신구 비녀다·
“괜찮아요?”
비녀의 장식을 뽑아 드는 백옥같이 긴 손가락과 함께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고운 목소리·
대정문도가 멍하니 은인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참 고우시다·
대정문도가 넋을 놓았다·
“뭐지? 안 괜찮은가? 좀 늦었나?”
청이 비녀를 바지춤에 쓱쓱 닦아낸 후 틀어 올린 머리채에 다시 끼우며 물었다·
대정문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감사 감사합니다!”
“소저 감사합니다!”
사제를 부르짖던 다른 대정문도 역시 압도적 감사에 동참했다·
머쓱해진 청이 손을 내저었다·
“뭘요· 조심해서 싸워요· 괜히 다치지 말고·”
신녀문 비전 모발의 형 제 십일 번·
크게 틀어 비녀 일곱 개 꽂기·
강철로 만든 장비녀가 두 개 투척용 단비녀 다섯 개를 머리에 장착하는 신녀문의 비기다·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는 장소에서도 여인의 비녀를 문제 삼는 이는 없는 법이라고·
머리가 심각하게 무거워지는 단점이 있으나 고수의 목뼈는 굴하지 않는 법이다·
청의 괴력이면 아예 시침봉에 빽빽한 바늘의 형태를 해도 버틸 수 있었다·
대신 외양이 심히 수상해지고 말겠지만·
뭔가 흥이 좀 식네·
청이 입맛을 다시며 전장을 살폈다·
팽대산의 호쾌한 반검격이 보인다·
목 옆으로 들어간 월도가 반대쪽 옆구리 아래로 빠져나왔다·
사선으로 찢긴 몸통이 쿵 뒤로 넘어가 떨어졌다·
에잉· 깔끔하지 못하게스리· 저게 뭔데?
역시 중기 나부랭이의 미숙함이란·
청이 대정문도 사이를 파고들어 검을 뿌렸다·
신녀검 삼 초식 천녀대장부·
검사가 휘감긴 칼날이 팽대산과 같은 궤적을 그려 적의 몸을 통과해 빠져나왔다·
다만 그 결과가 달랐다·
잘린 몸통이 사선의 절단면을 따라 미끄러져 쏟아졌다·
그래· 사선 베기는 이게 제맛이지·
산이도 아직도 하안참 멀었다·
아니 어쩌면 반검객의 한계일지도?
청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잔혹하나 놀라운 신기였다·
거기에 전진파랑대가 주춤 뒷걸음질을 치고 대정문의 무사들이 함성으로 기세를 높였다·
청이 손을 들어 화답하며 전장을 살폈다·
저쪽에 남궁신재가 보였다·
검치라는 말에 걸맞게 그저 묵묵히 검만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검결지를 편 왼손은 하는 일이 없다·
저럴 거면 쌍수를 하던가 하다못해 방패라도 드는 게 낫지 않나?
뭐·
본인이 좋다는데야· 어째·
그리고 저편에 창빈의 모습이 보였다·
청이 깜짝 놀랐다·
뭐야 쟤는 왜 저리 잘 싸워요·
검기가 그린 궤적이 남아 부서져 흩어져 휘날렸다·
희고 붉어 휘날리는 부서진 검기의 잔상들·
그야말로 바람 불어와 온 세상 가득 흐드러진 낙화 찬란한 꽃놀이였다·
그저 보기에 아름다움이 끝이 아니었다·
몰아치는 검이 부는 서슬에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흐른다·
떨어진 꽃잎이 적에게 닿아 핏빛으로 만개해 다시 피었다·
쓰러지는 적의 모습이 청에 눈에 담겼다·
꽃잎 검기에 손톱만큼 뜯어먹힌 상처가 몸통 전신 한 군데 성한 데가 없이 전신에서 피가 새며 비틀비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청은 조금 억울해졌다·
저래놓고 저건 마공 아니고 뭐 다른 건가?
왜 내가 쓰는 건 천하십대마공이라더니·
저것도 잔인한 건 마찬가진데 왜 나만?
사실 청의 감상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
본래 화산의 검은 잔인하다·
화산의 절기 탈명연환삼선검은 강력하다·
그러나 너무 잔인했다·
도저히 도문이 쓸 검술이 아니라면서 화산의 문도들조차 익히기를 꺼릴 정도였다·
그리하여 후대가 발전된 무학으로 탈명연환삼선검의 진득한 악의를 감췄다·
그리고 변과 쾌의 형으로 화려함을 더했다·
그 유명한 매화검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화려함으로 감춘다고 있던 잔인함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검기와 피로 흐르고 넘치는 만개·
대정문도들의 감사가 모여 눌러놓았던 살성이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치들었다·
그래· 나도 질 수 없지!
청이 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
염사래달은 상황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많이 늦게 알아차렸다·
전진파랑대는 최소 일류의 경지로 이루어진 마교의 특작부대였다·
정파의 떨거지 놈들을 단숨에 쓸어버리고 난 후 구경이나 하러 몰려들었어야 하는데·
오히려 제대로 썰려나가고 있었다·
검기를 쭉쭉 뽑는 청년 고수들 때문이었다·
최소 절정 수준의 고수들이다·
게다가 개중엔 화산파의 매화검수까지·
염사래달의 속이 타들어갔다·
아안량 염사래달이 하고 싶었던 것:
적 스스로의 모자람 때문에 부하가 죽어가는 자책감 그리고 제가 만든 집단의 멸망을 눈과 소리로 듣는 좌절감 속에 적을 빠뜨려 천천히 말려 죽이기·
아안량 염사래달이 실제로 겪고 있는 것:
적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머저리 때문에 신교의 전투부대를 잃게 된 위기감·
부하들이 죽어 나가 속이 바짝 타들어가기·
정든 부하들이 죽는 건 아쉽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인의 안위다·
부대를 말아먹은 대장이 어떤 꼴을 맞이할까·
신교의 높은 분들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텐데·
염사래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정파와 사파 백도와 흑도 무인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위험한 때에 우리를 찾는 사람과 나를 찾는 놈의 차이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정파라 해서 전부 사람 좋은 선인들의 집단은 아니었지만·
결국 염사래달이 결단을 내렸다·
유성추를 크게 휘둘러 온 기파를 쏘아내니 왕개육과 기 호법이 거리를 벌려 피했다·
그러자 염사래달이 제 품을 더듬었다·
비장의 한 수인가 싶어 대정문의 둘이 경계하는 사이 염사래달의 손이 주머니를 꺼내더니 거칠게 내동댕이를 쳤다·
땅에 떨어진 주머니 안쪽의 유리병이 깨지며 주머니 속의 분과 섞였다·
이윽고 폭발적인 기세로 짙은 연무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왕개육과 기 호법이 소매로 입과 코를 가리며 호다다닥 뒷걸음질을 쳤다·
“독이다! 모두 물러나라!”
실제로는 정말 독인지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수상한 연기를 보면 이리 외치는 것이 무림의 법도였다·
연기 속 삑삑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진파랑단의 후퇴 신호였다·
마교의 악적들이 연기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독이 아니라 단순한 연막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이는 많았지만 정작 그렇다고 연기 속으로 뛰어드는 행동은 또 달랐다·
만에 하나라도 독분이 섞였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연기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은 두 종류 뿐이었다·
첫째는 연기에 독 성분이 전혀 없음을 명백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후퇴하는 전진파랑대 대원이 바로 이런 종류였다·
둘째는 연기에 독이 있건 말건 신경 쓸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해독제를 미리 먹었다던가 이미 대처를 한 사람·
아니면 독이 듣지 않는 희귀한 체질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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