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5
설가놈은 일주야 전이나 지금이나 살점 없이 뼈와 가죽뿐으로 눈도 볼도 옴팍 패였다·
근데 왜 뭔가 이뻐진 느낌이지?
청의 관찰력은 딱 그 출신의 수준이었다·
만약 집안에 누가 몰래 살아서 집기의 자리가 바뀌고 먹을 것이 조금씩 사라져도 기분 탓인가 해서 일주일은 넉넉하게 모를 자신이 있었다·
내가 알 정도면 뭔가 획기적인 변화인데?
뭐지? 왜 이뻐진 것 같지?
콧망울이 좀 좁아졌나?
두상이 좀 갸름해진 것도 같고·
청이 설가놈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결국 결정적인 차이점을 알아냈다·
그래 눈!
본래 좌우로 긴 눈에 눈동자는 좁쌀만큼 작아 영락없이 눈 뜨고 다니는 실눈 흑막처럼 생긴 설가놈이다·
그런데 그 눈에 아니 무슨 아니·
뭔 남자 눈에 에라이·
청이 질색팔색을 하며 생각했다·
속눈썹 뭐야····
물론 청이 속으로만 생각하진 않았다·
청은 참지 않기 때문이었다·
“속눈썹 붙였어요?”
설가놈이 담담하게 말했다·
“부작용이네·”
“소녀환희경이 선녀공이긴 한데 그정돈가?”
소녀환희경은 구결에서부터 선녀가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근데 용모 능력치가 그렇게 작동하나?
만약 청이 성별을 남성으로 골랐더라도 용모 능력치는 여전했을 것이다·
그때 용모가 올라가면 잘생겨지지 이뻐지지는 않았을 테고·
설가놈이 청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본래 태음옥녀신공을 익힌 몸이니까·”
“태음옥녀신공?”
청이 모를 때는 세상 사람들이 그 무지함을 한눈에 보고 알 수 있었다·
“계집 꼴이 되고 마는 고약한 마공일세· 수라빙천마공을 익혀 갈음했건만· 내 소녀환희공이 정통한 도맥의 가르침일 줄은 몰랐군· 환희궁이 음란한 탕녀 소굴인 줄만 알았건만·”
소녀환희공은 마를 제압하여 정순한 진기로 바꾸는 신공이었다·
또한 도가의 중용을 따르는 무공이기도 했다·
소녀환희공이 수라빙천마공을 제압하고 품어 정화하니 본래 갈음하기 전의 태음옥녀신공이 부활하게 된 것이다·
옥녀란 옥과 같이 깨끗한 여인으로 겉과 속이 동시에 청순하다는 뜻이었다·
태음은 정순하여 큰 한기 정음을 말했다·
바르고 청순한 미인의 공부·
이는 정도를 걷는 것이다·
즉 소녀환희공의 선택적 상생 대상이었다·
“어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겨우 익힌 빙천수라마공이 흩어지고 버렸던 태음신공의 성취가 돌아왔다는 뜻일세· 아니 오히려 전보다 성취가 더 늘었군·”
그래· 저게 정상인데····
내가 비정상이지· 나만· 혼자·
청이 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꾹 억눌렀다·
저게 고대 원시 미개 중국의 원주민이 가지는 당연한 내공의 특성이었다·
호환되는 진기는 가장 높은 하나로 흡수되고 그렇지 못한 나머지는 흩어져버린다·
격이 같을 때만 서로 배척하지 않는 심법끼리 상생으로 동시에 존재했다·
그도 아니면 소녀환희공처럼 아예 따로 남는 신비한 몇몇 심법이라던가·
청처럼 아무거나 익힐 수가 없는 것이다·
서로 맞지 않는 진기가 따로따로 싸워 주인의 의지 없이 혈맥을 막 돌아다닌다?
이러한 현상을 중원에서는 주화입마라 했다·
청이 멀쩡한 이유는 캐릭터 보정이었다·
캐릭터의 몸이라서·
사람이 아니라·
나는·
그때였다·
돌연 청의 단전에서 진기가 흘러나왔다·
청의 전신 혈도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천천히 전신으로 흘러 따스함을 전했다·
대정선공의 대자대비한 자비심이었다·
어쩐지 부드러운 미소처럼 느껴지는 심상에 울적한 마음이 단숨에 올올히 풀려나갔다·
그래· 나는 생각하고 그럼 존재하는 거지·
세상에 존재하는 네 인종 그러니까 황인종 홍인종 깜둥이 짱깨놈에 더불어 다섯 번째로 서문청이 존재하는 셈 치지 뭐·
청이 싱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와 한 방에 고자 탈출? 축하해야 하는 각?”
“안타깝게도· 북해에서는 태음신공을 석녀공이라 부르기도 한다네·”
“에이 거기서 거기라는 소리네요· 안타깝게 됐어요·”
청이 진심을 담아 위로했다·
내 친구가 여전히 고자라니!
음· 사실 좀 웃기긴 하지만· 이크 표정 관리·
슬픈 생각····
잠깐 그럼 나도 고자 아닌가?
청의 얼굴에 처연한 슬픔이 떠올랐다·
설가놈이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흠흠 고자는 이미 탈출했네· 그저 엄청나게 둔할 뿐· 그래도 오래 없던 감각이라 그런지 요즘엔 스치기만 해도 좆이 벌떡 서곤 하지· 사실 지금도 서 있으니 한 번·”
“구경해 볼 거냐고 물어보면 진짜 고자 넘어 설가놈이 설가년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사내새끼 좆은 보이는 족족 잘라버려야 해·”
청이 진저리를 내며 목소리를 깔았다·
어쩐지 엉거주춤 앉은 자세가 묘하더라니·
그러자 설가놈이 아주 만족스러했다·
처음으로 성희롱이 먹혔다고 여긴 모양·
애초에 성희롱을 아주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해 내던 설가놈이었으니까·
청은 그저 사나이끼리의 잘못된 우정을 혐오할 뿐이었지만 굳이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떠들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웃는 표정을 한 설가놈이 품에서 책자를 한 권 꺼냈다·
“어쨌든 이거나 받게·”
청이 받아들자마자 무공창이 깜박거렸다·
비급이라는 뜻이었다·
책자에 제목이 쓰여 있었기에 굳이 무공창을 확인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태음옥녀신공의 비급이었다·
안 그래도 소녀환희공의 성장세가 매서웠다·
청의 내공심법은 명확한 성장 한계가 정해져 있다·
빙천수라마공 하나로는 턱도 없는 때에 새로 둔하게 만들어줄 신공이 반가울 수밖에는·
“와· 비급! 나 주는 거예요?”
“하나를 받았으니 하나를 내줄 뿐일세· 흠·”
설가놈이 고민하는 듯 하더니 말을 이었다·
“혹시 북해빙궁이나 설산의 인물을 만나거든 전해주게나· 굳이 찾아다닐 필요까지는 없네· 어쩌다 만나면 그래· 그 정도로·”
“왜 직접 안 전하고요?”
“나는 이미 빙궁을 용서했지만 빙궁에서는 그렇지 않겠지· 그러니 서로 안 마주치고 사는 것이 좋지 않겠나·”
“오우·”
청이 설가놈의 대인배다운 풍모에 감탄했다·
과연 중원의 빛나는 지성에 걸맞은 드넓은 아량이 아닌가·
아저씨 성희롱을 좀 해대는 것이 유일한 흠이지만 사실 나도 그런 농담 좋아하니까 오히려 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뭐 용서라고 거창하진 않네· 나야 그 빌어먹을 연놈들 죽이고 궁에 불도 놓고 비급까지 훔쳐서 나오고 나니 속이 후련하더군· 복수를 마친 사람은 발 뻗고 잘 자는 법이네·”
청이 설가놈의 악업을 보았다·
악업이 사백을 넘는 대마두였다·
물론 이 동네는 조용히 사는 마두들의 악업이 오히려 높은 편이기는 했다·
이웃사촌 죽이면 선업이 쌓이는 동네라서·
설가놈과의 첫 만남에는 재미도 있고 쓸모도 있는 놈 같아서 살려두었다·
이후로는 드나들면서 정이 붙은 데에다 유용해서 죽일 생각도 안 했다·
청에게 악업이란 어떤 자격에 불과했다·
세 자리 이상이면 죽어도 되는 놈일 뿐·
애초에 청의 악인참은 세상 평화와 의협과는 별 관련이 없는 행동이었다·
청이 악인참을 시작한 이유부터가 그랬다·
수련점 모아 고수 되어 살아남기 위해서·
이 순위로 경제적인 풍족함을 위해서·
삼 순위로는 재미있어서였다·
요 열흘 쯤 미쳐 날뛸 때는 재미가 일 순위가 되어버렸을 뿐 이 위가 생존이었다·
언연영처럼 악업 높은 사람이 수상하면 바짝 쫄아서 쭈구리가 되는 이유도 결국엔 살기 위한 발악이었으니까·
나쁜 놈 죽이겠다고 찾아다니는 처단자 역할을 한 적도 없고 앞으로 할 생각도 없었다·
청이 명확하게는 깨닫지 못했지만 현재 사람 아니면 악인뿐이었던 분류에 친구라는 새로운 종이 불완전하게 끼어든 상태였다·
청이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아·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요즘 깨달은 바가 있어서요·”
설가놈이 반색을 했다·
이제야 정파의 여협다운 맑고 청량한 눈빛을 보인다 했다·
이제야 무의미한 살업을 멈출 생각인 모양·
“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그러면 이제·”
마음이 통했구나!
청이 기쁘게 설가놈의 말을 이어받았다·
“제대로 골라서 죽여야지· 그동안 너무 개나 소나 막 죽이고 다녔잖아요?”
“···?”
설가놈이 귀를 의심했다·
뭔가 잘못 들었나? 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청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마교 놈들한테 꼭 필요한 놈들로 명단을 좀 짜 줄래요? 나중에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구멍이 숭숭 뚫릴 수 있게·”
청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후에 가장 크게 반성한 부분이었다·
탈출용 무공 찾으러 다니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탈출의 순간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음· 말 바꿔 미안하네만 지금이라도 비급을 돌려받을 수 있겠나? 그러다 개죽음을 당하면 비급이 마교 손에 들어갈 텐데· 괜히 나까지 엮이지 않나·”
“어허이 낙장불입 몰라요? 사나이가 한 입으로 두말하려고?”
“사나이 아닐 때도 살고 싶어서 밤마다 물을 뒤집어썼는데 지금에야 오죽 그렇겠나·”
과연 설가놈 뭐라 반박할 말이 없다·
그래서 청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게 사실은 한 달? 뭐 그 정도 후에····”
청이 그간 알아낸 사실을 털어놓았다·
지존 호소인과 천마총에 대해서·
그리고 순순히 협조하는 척을 하다가 천마혼 깨부수고 도망칠 예정이었으니 그때를 대비해 중요 인물들을 미리 조져놓아야 했다·
청은 자신의 모자람을 곧잘 인정했다·
그러니 빛나는 지성을 가진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에도 당당했다·
평소에 마교 놈들이라며 멸칭을 서슴지 않던 설가놈이었다·
설가놈이 청의 계획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쪽으로는 잔머리가 있군· 지금 도망쳐도 마교 놈들이 열쇠인 자네를 포기하진 않을 테고· 그렇다고 대적할 정도는 아니라서 최대한 치명상을 놔 주고 도망치겠다· 맞나?”
“정확해요·”
“흠· 어디 보지·”
설가놈이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자네 편을 만드는 거네·”
“설가놈처럼요?”
설가놈의 눈썹이 위로 아래로 한 번씩 이동했다·
“뭐 자네 생각이야 자유겠다만·”
“뭐야? 친구인데? 친구 버려? 친구 안 해?”
“친구가 항상 같은 편일 수는 없는 법일세· 믿음을 배신하지 않음이야말로 친우의 덕이지· 무슨 일이든 맹목으로 편들어 같이 다녀 봐야 서로의 눈이나 가리는 악우가 아닌가·”
맞는 말이라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래서 청이 그냥 인상이나 구겼다·
“아씨· 할 말 없게· 그래서 설명이나 해요· 그래서 내 편을 만들라는 건?”
“자네야 어리고 미색이 뛰어난 데에다 젖도 큼직하니 마두 몇 꼬셔다가···”
“기각·”
청이 즉답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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