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3
“사저 어떻게 됐어요?”
“응? 뭐가?”
“설가놈 말이에요· 이마에 변소라고 써진·”
“아! 그 손님? 환희궁 제자랑은 안 잔다던데? 아무리 급해도 요녀 아래에 깔리고 싶진 않군· 아·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네· 그저 내 목숨이 소중해서 그런 것이니· 막 이래·”
청이 깜짝 놀랐다·
견포희가 거의 완벽하게 설가놈의 목소리를 따라 했기 때문이었다·
얼굴 안 보고 들었다면 청조차도 깜빡 속았을 정도의 현장감이었다·
뭐지?
받침대가 성대모사에 이리 뛰어난 재능이?
그리고 어떻게 재능이 있어도 이렇게 쓸모를 찾아볼 수 없는 재능을 골라 있을 수가 있지?
청이 새삼 그 하찮음에 감탄하며 물었다·
“그거 말구요· 중원 갈 거에요?”
“엥? 그건 저번에 말했잖아? 간다니까·”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투였다·
청이 답답한 가슴을 쳤다·
“아니 설가놈의 뭘 믿고? 의심도 안 돼요? 모르는 사람 막 따라가기 있기 없기?”
“엥? 사매 친구라면서? 이마에 변소라고 써진 설가놈이 그 사람 말고 또 있어?”
“그건 그렇긴 한데·”
설가놈은 운남 지역으로 이사하겠다고 했다·
운남은 지도 상으로는 사천 아래 붙어 중원에 가까운 땅이다·
그러나 지도로 알 수 없는 차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 높이였다·
세상 가장 높은 산맥에 속한 땅인 것이다·
게다가 칼날같이 솟은 산세로 사람 살기 힘든 땅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고작 한 걸음 차이로 계절이 바뀐다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실제로 수직 절벽에서 한 걸음 떼면 겨울이 봄으로 변하고 중간에 튀어나온 부분에서 또 한 걸음 걸어 나가면 저 아래 여름에 닿았다·
“아! 그 사람이 전해달래· 짧은 인연이나마 퍽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군· 언젠가 또 인연이 닿는다면 술이나 한잔 하세나·”
“뭐· 그렇지 나도 고마웠다고 전해 줄래요?”
“응!”
마교 탈출을 꿈꾸는 설가놈이 특급 손님으로 있는 청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원래 인생 이런 바가 아닌가·
잘 가· 설가놈·
네가 없는 중원 생활은 다소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래도 원래 없어도 잘만 살았으니까·
이젠 안녕· 지역 수준에서 최고의 두뇌·
당신은 내 처음이자 마지막 책사였어요·
이제 이쪽에는 없지만 저쪽에선 부디 당당한 사나이로 살 수 있기를·
음· 이별 끝!
머리도 좋은데 알아서 잘 살겠지 뭐·
책사는 또 구하면 그만이고·
하나 있으니까 편하고 좋았더란다·
청이 받침대를 바라보았다·
얘도 이제 보름 안 돼서 이별이었다·
“새로 쓸 이름도 하나 정해놓으랬어· 거기? 사천? 거기서 쓸 이름·”
설가놈은 받침대를 사천 땅에 내려주겠다고 했다·
청의 계획대로라면 탈주한 이대 제자 한 명쯤 신경쓸 겨를도 않을 테고 이름 바꿔서 신분 세탁하면 누가 마교도인 줄 알겠냐는 것이다·
대충 그럴듯한 직업까지 물색해 준 후에 사천에서 다섯 번째로 큰 기루에 전언을 남겨놓겠다고·
과연 동네 최고의 두뇌다운 뒤처리라고 할 수 있었다·
“새 이름이라· 뭐 생각해 둔 거 있어요?”
“응·”
“뭔데요?”
”···서희·”
견포희가 수줍게 입을 뗐다·
“그럼 견서희에요?”
“아니 이름이 희야· 성은··· 사매랑 같이·”
청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아니 무식한 년이 아직도 사람 성씨를 몰라 갈고 앉았네?
생각해보니 딱히 알려준 적이 없었던가?
새삼 자신의 무심함에 반성하며 청이 드디어 제대로 된 성명을 알려주었다·
“사저· 서 문청이 아니라 서문 청이에요·”
“엥!? 뭉청이가 아니었어?”
“발음에 쪼금만 유의해 주실래요? 사저한테서 듣기에는 좀 수치스러운 단어 같잖아요·”
“그럼 내 이름은 서문희로 해두··· 그래두 괜찮을까?”
견포희가 청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차피 서문씨가 내 전용 성씨도 아니고 본인이 이뻐 보여서 쓰겠다는데 딱히 말릴 이유도 없다·
어차피 족보로 따지자면 나도 개족보고 얘도 개족보가 되는 건데 무얼·
“사저가 그러고 싶으면 그러는 거지·”
“진짜!? 고마워! 이제는 진짜로 가족인 거네!”
“오잉?”
“의자매라는 거 왠지 쑥쓰럽고 그러네·”
청이 눈을 끔벅거렸다·
의자매라니?
청이 그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소리냐고 따져 물으려다가 해처럼 찬란한 견포희의 표정을 보고 그냥 속으로 꿀꺽 삼켰다·
그래· 네가 좋으면 그걸로 된 거겠지 하고·
—-
청이 견포희에게 소녀환희공과 천리비행을 전수하며 시간을 보냈다·
소녀환희공은 원래 환희궁 비전이니 견포희가 이어받을 자격이 있었다·
거기에 착하지 않은 모자란 받침대가 비상시 발이라도 빼라고 천리비행을 가르친 것이다·
금색에다가 빠르고 멀리 뛰는 데에 특화가 된 유지력 좋은 경신법이었다·
물론 때문에 불가피하게 탕선탈의무의 수련이 중지될 수밖에는 없었다·
청이 전혀 예상한 안타깝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결국 천심화음을 완성해내고 말았다·
받침대와 담담하게 다시 만나자고 한 그 날 밤이었다·
무공창도 이쯤에서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밤산책으로 자유수련점이 많이 쌓였다·
경신법인 천리비행과 풍진보를 12성 대성까지 쭈욱 올려버리고 유용했던 흑영투잠도 대성을 이뤘다·
그 외 잡다한 희고 파란 경신법들을 최대치인 10성까지 끌어올리고 나니 근질근질하니 몸에 변화가 이는 미묘한 간지럼이 솟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설가놈의 유품인 태음옥녀신공을 아직 안 익혔네·
무려 금색 테두리니까 일단 삼 성만·
천마총에서는 더 둔해야 할 것 같으니까·
청이 심호흡을 했다·
“후우우·”
일단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나는 아무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어억··· 으윽··· 어으윽····”
보이지 않는 손이 뇌를 주물럭주물럭거렸다·
청의 기분이 완전히 음수로 치달아 저 연옥 밑바닥을 뚫고 처박히려는 순간이었다·
순간 치밀어오르는 불가의 자비로운 웃음이 뇌로 스미며 한결 편안함을 선사해주었다·
대정선공 또 당신인가요····
생각해보니 도문 능력이 좀 모자라지 않나?
보라색 심법이 두개나 되는데 어째 제대로 뭐 해준 것도 없고·
캐릭터 이름을 아청 말고 보리달마로 지어야 했는데·
그러면 불가 최고 신공들 다 가지고 시작하게 된다고 그랬는데····
공략글씨 어째서 보리달마 말고 아청을 추천하셨나요·
만약 돌아가게 되면 소고기는 취소·
대신 김치찌개나 사줄 줄 알아라·
어?
아···
김치찌개 먹고 싶다···
김치찌개에 소주 한 잔 꺾었으면···
청의 눈에서 또로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
중원 말로 밥은 반이라 했다·
여기서 반은 쌀을 포함한 주식을 말했다·
큰 요리점에서 요리를 시키면 주식은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하는 물음이 돌아온다·
남쪽 사람은 미반 즉 밥을 달라고 한다·
동쪽 출신이라면 만두나 물만두를 북쪽에서 온 사람은 국수나 죽을 주문할 것이다·
그리고 사천을 제외한 서쪽 사람들은 애초에 고급 요리점에 들어갈 수 없는 가난뱅이들이라 그쪽 주식은 취급하지도 않았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이지는 않으니 집성촌으로 몰려 사는 특성상 한 도성 내에서도 여러 주식이 갈리는 편이었다·
이러한 개념 하에 중원에서는 쌀밥과 반찬을 하나로 묶어 미반이라는 말로 퉁쳤다·
중원의 반찬이란 불을 대지 않으면서도 딱히 조리의 과정이 없는 절임과 무침에 한정된 밥의 곁들임일 뿐·
그 외에 나머지는 모두 요리였다·
중원 말로는 채라고 했다·
특히나 맛으로 유명한 네 지방 요리를 중원사대요리라고도 했다·
천채 사천 요리· 노채 산동 요리·
회양채 강소 요리· 월채 광동 요리·
그 외에도 중원에는 넓은 대지만큼의 식생이 피어오르니 곧 전 세계의 식문화를 선도하는 미식의 도원향인 것이다!
그만큼 중원인에게 식사는 중대한 문제였다·
오죽하면 중원의 인삿말 중 하나가 밥은 먹었느냐는 식사의 여부겠는가·
한편 중원만큼이나 밥을 중요시하는 민족이 또 있었다·
이름부터 너무나 위대하여 떠올리는 것만으로 어쩐지 펄럭거리는 환상이 비쳐보이는 공룡의 대멸종 이전 판게아 시절에 이미 인류의 거대제국인 환제국을 건설했던(이는 수박도에 그려져 있는 사실이다) 조상들의 존귀한 피를 이은 민족이 있었다·
바로 한민족이었다!
다만 한민족에게는 특별한 병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한식을 먹지 않으면 향수병이라는 중병이 도지고 마는 것이었다·
이는 정말로 큰 문제였다·
한민족이 한식을 오래 먹지 않으면 사무치는 고향으로의 그리움에 몸져눕고 만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은 혼몽해 제대로 서지 않으며 의욕과 의지가 하나로 뭉쳐 곤두박질쳤다·
청의 증상이었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유사 한식으로 버텨온 청이었지만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던 장막 너머 금단의 지식에 우연찮게 닿고 말았다·
김치찌개····
선혈처럼 시뻘건 핏빛 국물 뇌수같이 하얗고 부드러운 두부에 잘 끓여진 김치 한 짝 양손 손가락으로 잡고 잔혹하게 쭉 찢어서····
“안색이 좋지 않은데· 괜찮으냐?”
“안 괜찮아요··· 집에 가고 싶어···”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천마혼만 되찾게 되면 무사히 돌려보내줄 것이니· 노부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맹세하마·”
“내 집이 어딘 줄 알구요? 할아범 목숨에다 아예 수천 개를 더해도 안 될 것 같은데···”
수천의 목숨을 바쳐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음···?
이쪽 세상에도 한국이 있지 않으려나?
조선인가? 고려? 쨌든 한식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나라들이 내가 아는 그 나라일까?
사람이 검에서 광선 쏘는 세상이었다·
달려서 마차의 속도를 뛰어넘는 세상이다·
어쩌면 중원 너머로는 아무것도 없이 바다가 펼쳐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유사 지구 지구 호소행성일지도····
몰라· 알 게 뭐야·
청이 최리옹에 품 속에서 축 늘어졌다·
청이 웹소설의 애독자였다면 아 나도 드디어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당해 본다는 그 빙의를 당했구나 하고 신나서 날뛰었을 수도 있었다·
사람 열심히 썰고 다니다가 복귀한 후에 인방으로 돈 많이 벌어서 건물주가 되는 행복한 꿈에 잠겨 있을 수도 있었고·
하지만 청은 게임하는 시간조차 모자랐던 한 생산직 근로자에 불과했다·
재미있는 게임 찾으려고 접속한 정보의 바다에서 몇 개 밈이나 보고 알았지 이쪽으로는 아예 문외한인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웹소설을 읽어야 하는 법이다·
스페인어보다 웹소설이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이미 각계의 석학들이 연구해 과학적 철학적 인문학적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몰라· 나는 그냥 집에 가고 싶은데·
청은 그저 무기력하게 그리 생각했다·
만약 서문수린이 이 상태를 보고 대화라도 좀 나누었다면 사고뭉치 제자가 이번에는 제대로 심마에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심마라는 것이 그저 잔혹해지거나 인간성의 손실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진한 그리움으로 인한 심마는 정종의 위대한 가르침조차 막지 못하는 종류였다·
자신을 놓아버리는 형태의 심마란 어찌 보면 불가와 도가에서 말하는 무아와 비슷한 형태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향수로 인한 심마는 흔하면서도 해소하기가 아주아주 쉬운 하찮은 문제에 불과했다·
좋은 사람들과 따뜻한 관심 속에서 웃고 떠들며 하는 식사 한 끼면 해결이 될 문제다·
하지만 그 쉬운 방법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존재했고·
천마총을 향한 진격도 벌써 열흘 차·
청에게는 그저 맥없이 지나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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