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
쐐애애액-!
희미하게 귓가를 스치는 소음. 깜빡이는 시야 속으로 수십 갈래의 검격이 비친다.
은빛의 실선들이 살벌한 기세로 쇄도한다.
“쯧.”
나는 뒤로 스탭을 밟는다.
아슬아슬하게 회피를 시전하면서도 집요하게 파고드는 공격들은 직접 거두어낸다.
손에 들린 흑도에서 끊임없이 불꽃이 튄다.
-쾅 끼기긱…! 텅!!
치열하게 격돌하는 강철의 파편들.
걸음을 딛는 순간마다 주변의 지형이 비틀린다. 수풀은 칼날이 되어 솟아 오르고 살랑이는 꽃잎은 비수로 쏘아진다.
장미꽃들은 사방으로 가시를 세우며 진로를 방해한다.
코끝으로 비릿한 철 내음이 스친다.
나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쇄편들을 저지하며 신음한다.
‘…확실히 귀찮네.’
역시 대륙 최고의 천재라는 걸까.
아직 각성을 이루지 못한 시점이었음에도 어지간한 졸업생들 정도는 때려잡을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다시 한 번 날아오는 참격을 막아내며 눈을 굴린다.
채앵-!
원형 경기장 전체를 덮고 있는 결계.
평평한 모래 바닥이었던 지면은 어느새 차가운 쇠덩이의 질감으로 변해있었다.
가지런히 피어난 검의 꽃들이 요동친다.
마치 모든 것이 강철로 이루어진 화원을 보는 듯 했다.
‘잿빛 화원.’
이게 바로 샤를로테의 궁극기였다.
자신의 주변으로 절대적인 영역을 펼치는 것. 이 공간 안에서 샬롯은 무적에 가까운 판정을 받는다.
화려하게 피어난 장미의 정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전부 검으로 이루어진 바다였다.
소녀가 한 번 손짓을 내리면 수풀이 움직인다. 마치 파도를 치는 것처럼 수백 자루의 검날이 물결대로 쓸려나간다.
나는 휩쓸리지 않도록 자세를 잡는다.
채앵! 카그그극…!
뾰족한 꽃잎들이 검면을 요란하게 긁고 지나간다.
쏟아지는 강철의 빗줄기를 하나씩 튕겨내고 있으면 저 끝으로 보이는 백금발이 있다.
“흠.”
“크윽…!”
“연기야? 아니면 정말 약한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전력을 다하는 중입니다…!”
“…이상한데.”
샬롯은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린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기라도 한 것인지 어린 왕자는 쉽게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침음한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분명 연기는 완벽했다.
이번에는 힘 조절에 실수도 없었고 살기도 철저하게 감췄다.
뿐만 아니라 ‘거짓말’을 전신에 두르며 더할 나위 없는 약자의 모습을 꾸며내는 중이었다.
카앙-!
다시 한 번 검끝으로 불꽃이 튀어오른다.
마구잡이로 몰아붙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밀하게 강도 조절이 들어가 있는 공격이었다.
나는 시험해보겠다는 의지가 다분히 묻어있다.
샬롯은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나는 골치 아픈 머리를 굴리며 움직임을 이어간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시험한다는 것은 의심하고 있다는 뜻.
동시에 아직 확신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이유에서 내 ‘존재’를 의심하지는 모르겠지만 확신이 없는 이상 나는 뻔뻔하게 연기를 이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샬롯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을 테니.
“네가 궁금해. 어려워.”
“아까부터 무슨 말씀이신지 도저히…!”
“하지만 그래서 더 알고 싶어졌어”
터어엉-!
검면을 강타하는 묵직한 충격.
이전보다 확실히 무게가 실린 공격이었다.
출력을 높이기로 한 것일까.
나는 얼얼하게 떨려오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불세출의 재능이긴 하네.’
원작 ‘어린 왕자가 보는 세계’의 간판 미소녀들 중 하나.
압도적인 성능. 최고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라 평가 받던 그녀였으니 나만 아니었다면 확실히 수석을 차지했을 터였다.
이러니까 거품 수석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학생들의 눈에 샬롯은 평범을 초월한 무언가로 보였을 테니까.
‘스토리 초반이라서 그런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합격점으로 할까.’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어떻게 패배해야 자연스러울까.
휘몰아치는 강철의 파편들을 피해 도망치면서도 나는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마도구들을 곁눈질 했다.
화면 송신 마도구.
비록 경기장은 샬롯의 결계로 덮여있었지만 내부의 상황은 마도구를 통해 화면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아마 교직원들끼리 모여서 관전 중이겠지.
‘다른 학생들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입학 시험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학생들을 위한 전광판이 따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 마도구들은 오로지 채점을 위해서 준비된 것들.
한마디로 교직원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결계 내부의 상황을 알 도리가 없었다.
평범한 학생이 펼친 결계였다면 속이 투명하게 비쳤겠지만 이건 무려 어린 왕자가 창조해낸 ‘영역’이었다.
범인의 동공에는 상조차 맺히지 않을 터.
“허억 허억…!”
“이상해. 정말 그냥 약한 거야? 아무런 숨기는 것도 없어?”
“아까부터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카득 크그극…! 챙 텅!!
슬슬 쓰러져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뭔가 큰 거 한 방이 날아오면 좋겠는데… 아까부터 애매한 공격들만 쏟아지는지라 곤란했다.
내가 받아칠 수 있는 선에 맞추는 힘 조절.
어쩌면 다치지 않도록 나를 배려하는 것일지도.
‘이렇게 되면 끝이 안 나잖아.’
물론 감동이지만! 배려 당하는 게 너무 기쁘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 하지 않겠나.
치열하게 울려 퍼지는 철의 파열음 속에서 나는 은근슬쩍 손가락을 까딱였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한 가닥의 거짓말.
그림자는 뱀처럼 몇 번 꿈틀거리더니 곧 백금발의 소녀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는.
콰악-!
지체 없이 발목을 물었다.
“으읏…!?”
흐릿한 신음을 토해내는 입술.
순간이지만 샤를로테의 다리가 비틀거린다.
맹렬하게 춤을 추던 꽃잎들이 제자리에 떨어진다. 소녀는 돌처럼 굳은 채로 서있다.
“…전하?”
왜 그러냐는 듯이 물음을 던진다.
걱정스러운 말투였으나 입가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미소가 묻어있었다.
계획대로 순조롭네.
나는 불길하게 웃는다.
***
“후우.”
샤를로테는 조용히 숨을 고른다.
넓은 범위의 영역을 전개하고 있어서 그런지 예상했던 것보다 마나가 빠르게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너무 과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금세 털어낸다.
지독한 철 내음으로 가득한 풍경.
화려하게 피어있는 장미꽃들. 잔혹하면서도 한 없이 아름다운 화원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서있다.
“….”
소녀는 잠연히 앞을 바라본다.
투명한 벽안 위로 비치는 것은 금발에 실눈을 하고 있는 특이한 외형의 소년.
대충 유다라고 하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채앵! 카그그극…!
소년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검격을 막아내기 바빴다.
흥건하게 이마를 적시고 있는 땀방울은 마치 그가 정말 벼랑 끝까지 몰려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샤를로테는 넌지시 물었다.
“흠.”
“크윽…!”
“연기야? 아니면 정말 약한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전력을 다하는 중입니다…!”
“…이상한데.”
헐떡이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샤를로테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오히려 의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의심에는 이유가 있었다.
보름 전에 목격했던 어느 장면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슬럼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납치 살인 실종 등의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교도들이 다시금 판을 치는 것 같습니다.
직속 정보책으로부터 보고 받은 내용이었다.
해당 부분의 확인을 위해 샬롯은 직접 빈민굴로 향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단서 수집을 이어가던 때 우연히 깊은 골목에서 섬뜩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저는 분명 기회를 드렸습니다.
-그걸 차버린 것은 당신이고요.
-그러게~ 사람이 주제라는 걸 알아야 하는 거잖아요?
기이하게 꿈틀거리는 그림자.
그것은 곧 거대한 검정으로 번지며 주변을 집어삼킨다. 일말의 빛조차 없는 풍경은 태초의 어둠을 닮아있다.
그런 새까만 안개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없었다.
단지 즐겁다는 듯이 미소 짓는 금발의 남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샤를로테는 단지 숨을 죽여야 했다.
조금이라도 기척을 보이면 그대로 생이 끊어질 것만 같았기에.
고요의 밧줄이 소녀의 목을 조른다. 흔들리는 눈동자 위로는 멀어지는 ‘괴물’의 뒷모습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렇게 끔찍한 건 처음이었어.’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권능.
단순히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무저갱에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을 선사한다.
문자 그대로 재앙… 아니 멸망이었다.
소녀는 짧지만 멸망의 편린을 목격한 것이었다.
섬뜩한 긴장감에 호흡이 떨린다.
샤를로테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눈앞의 상대를 향해 집중을 다했다.
‘저 유다라는 학생… 그때의 남자를 닮았어.’
물론 많은 부분이 다르기는 했다.
그때 남자에 비하면 기운도 옅었고 실력도 자신에게 한참이나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니.
하지만 딱 하나 닮은 것이 있었다.
바로 분위기였다.
끈적거리면서 달큰하고 불길한… 특유의 분위기가 존재했다.
한 번 맡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냄새였다.
“네가 궁금해. 어려워.”
“아까부터 무슨 말씀이신지 도저히…!”
“하지만 그래서 더 알고 싶어졌어.”
터어엉-!
그래서 샤를로테는 더욱 몰아붙였다.
소년의 정체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을 해보기 위해서. 또 그렇지 않기를 바라며.
화원의 꽃잎은 처연하게 휘날린다.
“허억 허억…!”
그러나 상황이 이어질수록 혼란은 가중될 뿐이었다.
본질적인 감각은 소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싸우는 모습을 보면 연약한 학생에 불과했다.
기껏해야 아슬아슬하게 10위 권에 걸치는 정도.
“이상해. 정말 그냥 약한 거야? 아무런 숨기는 것도 없어?”
“아까부터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점점 확신이 사라진다.
샤를로테는 생각했다.
단순히 착각이었던 것일까. 자신이 그저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서서히 물들어간다.
마음이 약해진다.
당연히 공격에 실리는 힘 또한 옅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조금씩 소녀의 의심이 떨어져 나가던 때… 무언가 소녀의 발목을 물었다.
“으읏…!?”
순간적으로 멀미가 올라온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어지러움에 의식이 몽롱하게 물들어간다. 마치 지독한 알코올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갈무리하고 있던 마나가 흐트러지며 집중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나간다.
잠시 휘청이는 샤를로테.
비틀거리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팔을 휘두른다.
멀미로 인한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지만 그것이 불러오는 결과는 더 없이 거대했다.
쿠구구구구-!
이 강철로 이루어진 화원은 소녀의 몸짓을 따라서 반응한다.
더 큰 동작일수록 더 넓은 위력이 발생하는 구조.
아까부터 샤를로테가 제자리에 선 채로 손가락만 까딱이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 으…?”
소년의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공격은 하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세심한 조정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돌연 외부에서 알 수 없는 힘이 개입했다. 덕분에 발생한 컨트롤 미스.
촤르르륵-!
지면이 울부짖는다.
광활한 배경을 뒤로 덩굴 장미 수풀 등 모든 구조물들이 꿈틀거리며 떠오른다.
그것들은 서로 뒤섞이며 정렬하는 듯 싶더니 이내 거대한 흐름이 되어 파도를 친다.
단순히 과장으로 비롯된 표현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거대한 강철의 해일이 몰아치는 중이었으니까.
콰아아아아!!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칼날들은 주변의 모든 것을 찢어발긴다.
재앙이 바라보는 곳에는 금발의 소년이 서있다. 당황한 것인지 바짝 굳어있는 모습.
“아 안돼…!”
샬롯의 의식은 그제서야 돌아온다.
황급히 손을 움직여보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화원의 흐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하게 흘러가는 중이었으니 이를 피해 없이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아무리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는 샬롯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건 아니야.’
소년을 시험하기로 했지만.
이런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타인이 다치는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샤를로테의 세계에서 아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이었기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흐읍…!”
흐름을 부수지 못한다면 살짝 틀어서 되돌린다.
소녀는 공격의 타겟팅을 재설정한다.
소년이 아닌 자신에게로.
소년을 노리고 달려들던 해일이 방향을 비튼다.
꽉 쥐어 보이는 주먹 뒤를 따라서 칼날의 파도가 자석처럼 이끌려온다. 그녀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촤르륵 콰아아아-!
사나운 울음 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폭풍.
샤를로테는 가만히 선 채로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피해 없이 막아내는 건 힘들어 보였다.
적어도 의무실에 실려갈 정도로는 다치겠지.
“…아프겠다.”
샬롯은 점잖게 중얼거린다.
이런 상황에 있음에도 소녀는 특유의 평온을 잃지 않았다.
단지 소년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점에 만족할 뿐이었다.
쐐애애액…!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장미 한 자루.
소녀는 다음으로 들이닥칠 충격에 대비하며 눈을 감았다. 직후 귓가를 때리는 파열음.
콰아아앙-!
“….”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요란한 소리가 울린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샤를로테의 몸에는 아무런 고통이 전해져 오지 않았다.
설마 너무 다쳐서 감각도 남아있지 않은 걸까.
“…?”
그런 의문과 함께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보면….
“괜찮으십니까?”
태연하게 햇살에 비치는 금발이 있다.
시선이 마주치자 드물게 뜨여있던 하얀색 눈동자가 다시금 덮이며 실눈으로 돌아간다.
“이거 이거… 저에게 한 번 빚지신 거라고 봐도 될까요?
자신을 품에 안은 채로 실실 미소 짓는 소년.
그의 등 뒤로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잔해들 먼지로 흩어지는 화원의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마법소녀G 님 1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다진오렌지3스푼 님 5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