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6
내 아카데미 대항전 참가가 확정되고 운영위원회에 3서클 마법을 등록·제출한 바로 다음 날
중등부 선배들이 비밀리에 나를 호텔 방으로 불러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들을 나에게도 설명해주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재환 조수연 박준용 이민영· 이 4인방은 자기네들끼리 벌써 9년째 인연을 맺어왔는데 이민영을 제외하면 다들 집안도 한가닥 해서 좋게 말하면 학년 전체를 선도하는 무리들이야·]
[나쁘게 말하면?]
[그냥 세상 물정 모르고 머리만 좋은 일진들이지· 얘네 때문에 전학간 애들이 한둘이 아니래·]
주말을 제외하면 외출도 불가능한 알테어 아카데미의 폐쇄적인 특성 때문에 아이들은 그 작은 공간에서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축해나갔다고 한다·
[특히나 어머니가 녹색당 원내대표인 이재환하고 큰할아버지가 추기경인 조수연 이 두 사람이 가장 핵심인데· 이재환은 주로 생체모방기술을 응용한 자연결계마법을 사용하고 조수연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인만큼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자신의 철학으로 삼았어·]
[나머지 한 명은 그럼 누군데요?]
[오덕재라고 특이하게 우리 세피론 아카데미에서 졸업을 한 우리 바로 윗학년 선배더라고? 아마 1년 꿇었나봐· 부모님은 그냥 국방과학연구소 소속 연구원이라고 하고 음··· 딱히 별 특색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런 정보들을 선배는 어떻게 다 알았어요?]
[아 우리 부모님 아는 분 중에 국가정··· 흡!]
어째서 대한민국의 영재교육을 미국의 재단이 맡아서 하게 되었는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세피론이든 알테어든 대중들이 흔히 싸잡아 부르는 ‘적폐’ 세력들의 자녀를 한곳에 모아놨는데 한국 교육기관의 감독 하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할 리가 있겠나·
“이제 둘밖에 안 남았나?”
너덜너덜해진 셔츠 소매가 계속 거슬린다·
나는 손끝에 오러를 둘러 누더기를 말끔히 잘라냈다·
그동안 이재환이 탈락하고 오덕재가 마지막 주자로 들어왔다·
시작부터 필살기를 퍼붓는 아이들 때문에 정말 골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용사가 위기의 순간에만 전력을 해방하는 데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야·
“아오 목 아파 죽겠네·”
조수연이 머리를 비틀며 말했다·
대회 규칙상 교체 중에는 상대에게 위협을 가할 수 없기 때문에 아라베스크의 매듭 또한 자연스레 증발하였다·
그동안 몸을 추스른 조수연은 나를 살의 가득한 눈빛으로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조수연 일단 우리가 수적으로 우위에 있으니까 상황을 지켜보고 천천히·”
“입 닥쳐 오타쿠 새끼야· 이 싸움에 끼어들면 죽여버린다·”
오덕재의 말을 대차게 끊어버리는 조수연 그녀의 오러하트가 요동치기 시작하며 강대한 의지를 세상에 발현시켰다·
“저 꼬맹이는 내가 처리해·”
고오오오-
오러가 조수연의 의지에 반응한다·
곧이어 정순한 빛무리가 뿜어져나오더니 후광이 비치듯 그녀의 머리를 맴돌았다·
“외적발현의 초입?”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녀도 이미 심상세계의 외벽을 뚫은 뒤였다·
“개소리· 하느님의 은총이지·”
조수연이 입술을 깨물며 반박한다·
슈와악-!
맹목적인 믿음으로 구축된 내적세계는 소녀에게 강인한 육체를 선사해주었다·
몸을 지탱하는 다리가 폭발적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녀는 내게 달려오면서 경로상의 마나를 손으로 헤집어놓았다·
뒤틀린 마류를 점토처럼 뭉쳐 주먹을 꽉 쥐더니 이윽고 하얀 가시들이 손가락 끝에서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지가 늑대인간이야 뭐야·”
슈와아악-!
그녀가 손톱을 휘두를 때마다 가시 끝에서 나온 수십갈래의 하얀 섬광이 공기를 찢고 쇄도했다·
하나하나가 내가 감당하기에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내가 거리를 벌릴 때마다 조수연은 다시 성큼성큼 뛰어와 무차별적으로 난사를 퍼붓는다·
안구에 오러를 집중하며 치명적인 가시들을 골라내 땅으로 튕겨냈다·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이 대련장을 가로지르며 숨 막히는 공방이 계속 이어진다·
“한 대만 맞으라고! 한 대만! 맞아아아악!”
“흐읍·”
자칫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여도 그녀의 보폭과 움직임은 정교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마왕의 뿔을 다시는 시전하지 못하도록 계속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며 리치 차이로 나를 압도하려는 생각일 것이다·
본능이든 본능이 아니든 그녀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수십 번의 연격에 점점 뒤로 밀려 대련장 벽까지 내몰리자 그녀는 진각을 밟아 눈을 부릅뜨고 덤볐다·
“이건 몰랐겠지!”
승부처임을 직감하듯 땅에서 끌어올리듯 아래에서 위로 주먹을 날리는 조수연·
“···!”
나는 그녀보다 키가 훨씬 작다·
따라서 그녀가 허리를 심하게 굽히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어퍼컷으로 머리를 맞을 일은 없었다·
그 순간 내가 서 있는 바닥에서 빛의 고리가 튀어나와 상체를 휘감았다·
쿠웅-!
옴짝달싹 못하게 포박당하자마자 조수연은 내 멱살을 휘어잡고 나를 그녀와 같은 높이의 시선까지 끌어올렸다·
두 발이 너무나도 쉽게 땅에서 떨어졌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땀에 푹 젖은 소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하핳 씨발··· 넌 이 상황에서도 비명 하나를 안 지르냐?”
“···”
“하아하아 후우우··· 나메야 내가 대항전에 선봉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를 이제 알겠어? 세피론 자식들하고는 도저히 수준이 안 맞아서 그래· 불신자들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거든·”
파지직-
다시 한번 아크 방전 마법진을 뿔로 작성한다·
그러나 조수연이 다른 손으로 내 뿔을 포악하게 움켜쥐며 마나를 전부 해산시켰다·
“몹쓸 짓은 하지 말고 친구야· 네가 어떤 몸부림을 치든 간에 언니는 항상 너보다 7년을 앞서갈 거야· 꼬우면 더 일찍 태어났어야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중등부 시합에 쳐들어오면 네가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뿔의 형태가 점점 일그러진다·
마나의 상태로 돌아가기 일보 직전 나는 반개했던 눈을 확실하게 치켜뜨며 그녀의 표정을 면밀히 훑었다·
“당신의 신은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나요?”
“뭐?”
“충고 하나 드리자면 제 뿔은 함부로 만지면 안 돼요· 그러다 다치거든요·”
[역시전: 마왕의 뿔 – 각인]
[시전: 통각 동기화]
쨍그랑-!
머리의 뿔이 산산조각나며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아아아악 뭐야!”
마나의 파편들을 맞은 조수연은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부르르 털었다·
하지만 곧 마나가 자연의 상태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뿔은 반영구기관이기도 하지만 석판이나 마력석처럼 각인의 매개체로도 사용할 수 있죠·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
“게임으로 치면 언니는 제 함정카드에 걸린 거라고요·”
대회에서 스크롤을 반입할 수는 없지만 각인 마법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조수연이 롱기누스의 창에 연쇄시전 마법진을 숨겨놓은 것처럼 나도 마왕의 뿔에 특별한 각인을 해놓았다·
발동 트리거는 뿔의 결손과 신체의 접촉·
그리고 각인 마법은 통각 동기화·
나는 내 왼쪽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앗!”
눈을 찡그리며 얼굴을 문지르는 조수연·
나는 이번엔 오른쪽 볼을 꼬집었다·
“으읍!”
“이제 언니한테 흥미는 다 떨어졌어요· 어서 빨리 항복해주세요·”
“겨우 그런 조잡한 마법 가지고 내가 항복할 것 같아? 그래봤자 간지럽히기나-”
[연성: 이산화규소 – 무정형 고체]
곧바로 유리조각을 만들어낸다·
나는 날카로운 파편을 하늘 위로 높이 들어 그녀에게 똑똑히 보여주었다·
“뭐하려고! 설마 너 미쳤어···?”
“옛날옛날에 흑마법사들은 이런 게 일상이었대요·”
“야! 멈춰!”
물론 마나가 득실대는 전생 세계의 기준이지만·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갑고도 날카로운 유리의 촉·
끼기긱-
소립자 방벽을 뚫어내기 위해 힘을 더욱 세게 주었다·
살갗을 긁어 판 자리에는 선홍색 피가 주르륵 흘러 나와 모래바닥 위에 방울지어 떨어졌다·
귀청을 찢는 비명이 들려온 건 바로 다음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조수연이 내지른 날것의 비명에 대중들이 술렁인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이 박혔다던데 어째 그의 신도는 이리도 연약한지·”
굳세었던 조수연의 다리가 처절하게 무너진다·
손을 부여잡고 뒹굴어보아도 통각은 여전히 전기신호의 형태로 그녀의 뇌를 어지럽혔다·
“아카데미에서 안 배웠어요? 상호연결 마법진을 파훼하는 것 정도는 쉽잖아요· 중등부 과정으로 알고 있는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그녀에게 찬찬히 발걸음을 옮겼다·
“흐으으윽···! 그마아아안!”
내 말을 듣고 마법진을 향해 조수연이 손을 뻗었다·
그렇다고 파훼하게 둘 수는 없지·
손바닥에 박힌 유리조각을 서서히 손목쪽으로 이동시켰다·
키기기깅-!
방벽이 깨졌다 복구되다를 반복하며 이번에는 더욱 많은 양의 피를 바닥에 흩뿌렸다·
왼쪽 팔을 가로지르는 일직선의 균열·
“흐으으읍! 흐읍! 하아아악!”
어느새 눈물범벅이 된 조수연의 턱을 들어 마주보았다·
내 팔에서 흘러나온 생생한 피가 그녀의 얼굴 위로 낙하해 물과 뒤섞였다·
“무서워··· 아파··· 흐윽 흑 흐으윽· 제발요· 그만해주세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서러운 울음 속에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온다·
표독스러웠던 얼굴이 한층 순해졌다·
나는 유리조각을 내던져버리고 무릎을 꿇어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말 좀 이쁘게 하고 사람들 무시하고 다니지 말기로 우리 약속해요· 아 그 오글거리는 말투도 아까 전부터 계속 거슬렸으니까 꼭 고치고· 알겠죠 언니?”
“흐윽···”
“그래 수고했다· 이만 쉬어·”
종교쟁이의 등을 툭툭 두어번 두드려주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살 피우는 주제에 고집은 또 정말 강하네·’
중간에 항복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한테 지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모양이다·
결국 심판진들에 판단에 따라 전투 불능 판정을 받은 조수연은 즉시 들것에 실려갔다·
[시전: 조직재생]
마법으로 만든 유리인지라 깔끔하게 잘린 단면이 완벽하게 봉합되었다·
그리고 정말 조수연의 말대로 전투가 이 지경이 날 때까지 참견하지 않은 소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노나메···”
“제일 재밌는 게 남아있었잖아?”
최근 카츠하타 에미카를 만나보고는 눈이 너무 높아져서 그런지 아카데미 대항전에 출전하는 아이들로는 좀처럼 성에 차지 않았다·
그냥 일본으로 떠나 그녀와 무한 대련이나 즐길까 했던 계획은 오덕재를 보고 잠시나마 보류하게 되었다·
조수연의 위협적인 가시를 선별하기 위해 마류를 읽어나가고 있을 때 그의 기척이 동시에 느껴졌다·
먼 발치에서부터 마치 자신의 싸움인 양 분석하는 태도도 더없이 훌륭한데 심지어 그의 판단은 내것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기까지 했다·
놀란 것은 내쪽 뿐만이 아니었다·
“노나메 네 재능은 도대체 어디까지야?”
오덕재가 안경을 고쳐쓰며 물었다·
“어떻게 조수연의 오러를 전부 파악했지? 도대체 인간이··· 아니 여덟 살이 이게 가능한 일이야?”
160센티 초반으로 또래보다는 다소 작은 키 넓적한 체구 2차성징의 영향으로 오돌토돌한 피부까지·
언뜻 보기엔 별로 특색 없는 외모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오덕재가 힘을 줄 때마다 그의 팔다리에 있는 근육이 크게 부풀어올랐고 좌우로 길게 째진 눈은 언제나 전장의 핵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돌연 와이셔츠 소매를 걷고 넥타이를 풀어 바닥에 내던졌다·
무릎을 굽혀 무게중심을 낮추고 왼손은 바닥을 향한 채 오른손은 허리 뒤로 숨긴다·
이는 ‘대련’ 시작의 정석적인 자세이다·
승률에 0·1%라도 유의미하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을 실시해보임으로써 그는 이 대련에 진심을 쏟아낸다는 뜻을 내비쳤다·
나이라는 편견을 모두 벗어던지고 나를 제대로 적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드디어··· 드디어···!’
나도 그럼 허투루 싸울 수는 없겠지·
백봉곤 훈장에게 선물받은 마공품 금빛 머리핀과 머리끈을 전부 대련장 구석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미리 챙겨놓은 심플한 고무줄 머리끈을 꺼내 긴 머리칼을 다시 두 갈래로 팽팽하게 높이 묶었다·
오러하트의 출력을 제한하는 답답한 느낌이 모두 사라지고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뻥 뚫린 기분을 만끽했다·
“그렇게 궁금하시면 선배가 확인해주세요· 제 재능이 어디까지인지·”
너만큼은 내가 확실하게 굴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양심없음님 5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양아치 나메에게 크레페를 바치겠습니다··!! 언제나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에 4인방은 최종보스가 아니었습니다!! 과연 오덕재는 나메와 호각을 이룰 수 있을 것인지!!
참고로 카츠하타 에미카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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