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3
원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후방으로 전진하는 천마의 모습은 몇 번을 보아도 아니 보고만 있어도 계속해서 신기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그리는 원이 찌그러진 데가 없이 완벽하며 모든 동작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아 조금의 인간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시간이 갈수록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 점점 피어올랐다·
속 사정을 마교도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정신을 둘이나 달고도 외부로 나타난 정신이 없는 상태이며 감정표현 ‘춤’ 이라는 명령에 그저 반복된 동작을 계속하고 있다고·
지승주가 한 번씩 제게 와닿는 불경한 시선 감히 천마지존을 외면하고 한눈을 파는 그러한 불충한 눈길에 굉장한 난감함을 느꼈다·
비각주 마뇌라고 해서 아는 바가 없으니까·
뭔가 말이라도 좀 붙여 보라고 꾹꾹 찔러대는 시선들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양 애써 무시할 수밖에는·
—-
천마는 이미 수십번 몸을 갈아타면서 같은 숫자의 정신을 제압한 경험이 있었다·
그 말은 정신에 있어서는 중원을 넘어 변방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권위자인 것이다·
(중원인에게 중원 외에 나머지는 모조리 변방이다·)
그에 비하면 청의 실력이야 그저 원룸 차려 닭튀김이나 만들어 먹는 정도였다·
특출난 데가 하나도 없이 딱 평범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는 역대 신체의 주인들도 다 했다·
몸 뺏기고 나면 사람이 가장 익숙한 장소를 형상화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본능적 방어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천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청의 정신체가 가진 기이한 불사성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저 짐작하기로는 청의 정신체가 만든 풍광이 천마의 긴 생애에서도 낯설기만 한 것이라 어디 변방 끝 새외의 인물이 아닌가· 그쪽의 오랑캐들이 정신을 다루는 술법을 발전시키지 않았나 할 뿐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
퍽· 털썩·
“아씨· 나도 아가리좀 털게 좀 냅둬·”
퍽· 털썩·
“슬슬 안 질려요? 이쯤이면 소용없·”
“도대체가· 학습능력이란·”
“우우 패배자·”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털썩 털썩 털썩·
머리 잃은 시체가 대지에 무수히 깔렸다·
“거참· 해도해도 안 되면 방법을 바꿔야 하는 거라고 이미 말해주지 않았어요? 이렇게 말이에요·”
이번에는 청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천마가 신경질적인 눈빛을 하고는 연신 두리번거리며 지옥 아가리의 주인을 찾았다·
“생각해보면 신혈이라는 게 다 아저씨네 자식들로 쭉 이어진거 아닌가? 그러면 뭐야 님이 애비이자 자식인 거잖아· 그럼 아내가 곧 엄마 아니에요? 전쟁 준비하다 심심하면 옛날 생각 나서 어머님 불러다 한 번씩 따먹고 그래요?”
“어디 어디서 지껄이는 것이냐!”
“자식새끼 보면서 무슨 생각 해요? 나중에 내가 차지할 몸이니까 귀하게 다뤄야겠다? 그럼 적어도 인성 교육은 안 해도 되니까 편하겠다· 어차피 내 손에 뒈질 자식 밉기라도 하면 정 안 줘도 되잖아·”
청이 시체들 사이에 숨어서 입만 놀리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수작을 부렸다·
핏물 뒤집어쓰고 시체인 척을 하는 주제에 아주 입만 살았다·
하지만 같은 옷 같은 모양을 한 몸뚱이들이 대지에 한 겹 층을 쌓았다·
그 사이에 머리 달린 한 개가 숨어서야 불지옥 난이도의 틀린 그림 찾기다·
불지옥 난이도는커녕 접대용 7세 이하 수준의 틀린 그림 찾기도 해본 적이 없는 천마였다·
결국 천마가 거칠게 울분을 토해냈다·
“네년이 네년이 뭘 아나! 저 가증스런 중원 놈들! 그 후손들을 보아라! 감히 잘 먹고 잘 사는 모든 것이 제 조상들의 악행으로 이루어진 것을 모르겠나!”
“조상님들 죄를 대신 갚으라구요? 그건 좀·”
“당연하지 않으냐! 애비애미 재산과 인맥은 물려받아 당연한 제 것으로 누리면서! 추악한 죄악과 착취한 역사만 쏙 빼놓겠다는 것이냐!”
“어···?”
청이 멈칫했다·
일리가··· 있다?
“명문 정파를 보아라! 태어나서 곧장 기혈을 뚫고 영약을 처먹으며 귀한 무공을 수련하니 천하의 둔재라도 죽기 전엔 초절정을 이룬다! 착취로 얻은 부귀와 영화가 영원불멸한 중원의 지배자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도 죄가 없다고!”
“죄가··· 있죠?”
청이 차마 그것까지 부정하진 못했다·
당장 떠오르는 섬나라가 있고 그 옆에 붙은 대륙에서 아무 데나 짚어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렇다고 할 말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님이 딱히 징벌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닌데요·”
“아니! 세상에 단 한 명 자격이 있다면! 그게 바로 나다! 과거의 죄악을 똑똑히 지켜보고 그 만행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내가 있다!”
“이상하다? 남의 몸이나 뺏는 그렇게 뺏어서 심지어 한 번도 못 이긴 연패 전문 잡귀신이 할 소린가?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세상에 어떤 인간이 죽음을 뛰어넘겠는가! 이는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으라 내려주신 천신 아후다 마즈다의 의지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란 말이다!”
청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늘의 뜻이 세상 악인을 처단하라고 초인이라도 만들어 내렸다는 소리야 뭐야·
왜 아예 그 마후라인지 뭔지 하는 신이 직접 말을 건다고 하지·
“엥? 하늘이 천벌을 내리라고 댁을 만들었다고요? 직접 하는게 아니라? 아니 진짜 어이가 없어서-”
-더는 못 들어 주겠네·
청의 목소리가 돌연 하늘에서 울려퍼졌다·
세상을 가득 메우는 천둥 같은 소리였다·
천마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 위 거대한 사각을 이루는 틀이 보였다·
하늘에 달려 더 높은 세상을 비추는 창이다·
그 너머로 비치는 거대한 얼굴 청의 시선이 한심함을 감추지 않고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이 이 무슨···”
-뭐긴·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거지·
세상이 날카로운 조각으로 부서져 쏟아졌다·
무수한 시체들도 질퍽한 핏물도 이제는 없고 드러나는 대지는 그저 희고 고운 살결로 이루어진 손바닥으로 본 모습을 드러냈다·
청이 자신의 손바닥 위 천마를 내려다보았다·
천마가 악을 쓰며 소리질렀다·
“말도 안 돼! 어찌 네깟 것의 의식이 나보다 더 거대할 수가 있단 말이냐! 고작 절정의 그 미천한 경지를 하고서는!”
-나도 몰라· 한 번 죽고 나선 이렇더라고·
청이 마치 신과 같은 거대한 형상으로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다시 주장해 봐요· 하늘이 뭐?
천마가 이를 악물었다·
“하늘이 아니라면 그 누가 죽은 이를 되살린단 말이냐! 바로 나다! 내가 천명을 받았다!”
청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님이 하늘의 뜻 해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하늘의 뜻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뜻이 바로 내게 있다! 내가 바로 하늘의 뜻이다!”
그리고 그 하늘의 뜻이 청의 손 안에 있었다·
천마가 선 대지 위로 살빛의 기둥이 산맥이 융기하여 솟았다·
청이 주먹을 꽉 쥐었기 때문이다·
겨우 손바닥 위에 벌레 한 마리·
가볍게 으스러지고 남은 핏물조차 몇 방울 뿐이라 밖으로 흐르지 않는 하찮은 것이었다·
마침내 홀로 남은 청이 낄낄거렸다·
“유감· 하늘의 뜻은 여기까지· 하늘 거 별거 아니네 뭐·”
청이 동시에 투명한 창을 보았다·
천마혼을 흡수한 순간으로부터 계속해서 앞에 알짱거리며 정신 사납게 굴던 문구였다·
[현재 천마 형태로 자동 진행 중입니다·]
[천마 형태의 해제가 가능합니다·]
[해제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아니오를 선택할 경우 당신의 여정은 끝이 나 천마신교 결말로 이어집니다·]
곧 ‘예’의 글자가 몇 번 반짝이고는 상태창이 스르륵 자취를 감췄다·
청이 생각했다·
본래 게임 내에서도 몸을 빼앗긴다는 식으로 히든 엔딩을 준비한 모양이지?
해제가 가능한 상태였던 이유는 모르겠다·
대뜸 게임 오버를 들이밀면 화가 날 사람도 있으니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거나·
아니면 특정한 조건을 이미 갖추어서 곧바로 해제할 수 있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예를 들면 천살성이라던가 시혈독인이 중독으로 간주해 해제가 가능한 것일수도 있고·
혹은 익힌 무공 덕택일 수도 있었다·
불가의 대정선공이 존재하는 아我의 불법을 세웠을수도 있고· 구천 세상 위와 아래의 경계를 담당하는 구천현녀의 월녀심결이 힘을 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 청은 몰랐다·
그 이유가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서문수린이라면 달리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배화교는 불을 숭상하고 곧 성스러운 불이란 아후라 마즈다 태양신을 말함이었다·
파괴신 앙그라 마이뉴는 깜깜한 암흑 인간이 원초로 두려워한 밤을 뜻했다·
밤을 밝히는 것이 태양이니 앙그라 마이뉴는 감히 태양신을 대적하지 못하고 설설 기는 하위신에 불과했다·
그리고 주양세심경이 염제의 심상이었다·
염제는 중화 민족이 섬기는 태양신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다 할 것이 아니겠냐고·
청에게 그 정도의 학식은 없었다·
그러나 가능하다는 사실만 알면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점을 앎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 몸 내놔 임마·”
—-
시대를 앞선 무용을 선보이던 천마가 마침내 움직임을 멈춰 자리에 섰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니 다시 최리옹 늙은이의 앞이었다·
최리옹의 멍한 눈동자가 발치를 맴돌았다·
그때였다·
돌연 천마의 발이 움직이니 최리옹이 제압해 바닥에 깔아놓은 지존의 아랫배를 향했다·
퍽!!!
“아악!”
단전이 박살나는 통증에 지존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것이 죽은 정신도 되살리는 의학의 정수 물리 치료다·
“이 씨발 새끼· 내가 가만 안 놔둔다고 했지? 음? 아닌가? 입 밖으로 말은 안 했나?”
청이 비열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뭐? 자연경이 어쩌고 마음을 먹어서 어째? 이제 단전도 깨졌겠다 자연경 아니라 자연인 되고 나니까 기분이 어떠냐 이 새끼야·”
그러자 덩달아 최리옹도 정신을 차렸다·
물리 치료는 본래 피시술자만이 아니라 관전 중인 예비 환자에게도 뛰어난 효능이 있었다·
“얘야 청이 청이냐?”
“음? 할아범? 다시 정신 차렸어요? 자꾸 딸이니 뭐지 헷갈리지 좀 마요· 남의 족보를 왜 자꾸 건드려요? 음· 족발 보쌈 먹고 싶다·”
아까 상상대로 될 때 시켜 먹을걸·
꼭 이런 건 생각이 안 난단 말이지·
청이 후회했지만 가벼운 아쉬움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더는 고향 음식에 연연하지 않기는 개뿔 족발 보쌈은 중원에도 있기 때문이었다·
원조 족발 홍소저제와 원조 보쌈인 동파육을 원조 비빔국수 반면과 동시에 즐기는 문화는 없었지만·
그야 시키는 사람 마음이 아니겠는가·
거기에 청주 하나 시켜다가 그냥 아주 싹·
“당신!”
청이 뜬금없이 미식의 나래를 펼치며 침을 꿀꺽 삼키는 도중이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 목소리가 쨍 울렸다·
청이 고개를 돌렸다·
기세등등한 미소와 함께·
“아· 꼬맹이· 그래· 너도 있었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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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공식적인 수준의 밈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일까요·
김갈비뼈님에게 무한한 존경을 보내드리며 Res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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