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1
노을빛 검기가 월광검을 휘감아 빛을 발했다·
그 순간 초곽의 머리가 민활하게 굴렀다·
‘타는 듯한 노을빛의 진기· 신녀문의 신공인 주양세심경의 특징· 서문수린의 제자라는 것이 거짓이 아니로군·’
황궁 무인들은 황제가 이를 갈며 무림 타도를 위해 길러낸 자들이다·
무림의 굵직한 무공은 전부 꿰고 있으며 그 약점과 상대법 또한 가지고 있었다·
‘월녀검은 문제가 없고·’
월녀검법은 본래 월나라 병사들이 익혀 쓰던 것이고 그것이 쭉 내려와 아직까지도 군문의 입문 무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초곽 역시 눈 감고도 펼칠 수 있다·
‘신녀신수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서문수린이 창안한 무공인가? 감히 신수라 이름을 붙질 정도라면 보통의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호신강기를 쓰는 화경의 고수에게 고작 절정 고수의 수공 따위가 위험할 것 같지는 않고·
‘그렇게까지 까다롭지는 않겠군· 저기 불가의 이름 모를 늙은이만 제외하면·’
최리옹과 불가 무인 모두가 정색할 생각이다·
어쨌든 초곽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사실 절정 무인과 화경 고수의 결투는 거의 애와 어른의 싸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애가 조금(엄청나게) 싸가지 없게 굴었다고 날름 죽여버리겠다 생사결을 받은 것이 치졸한 일이기는 했어도 사실 제압하려면 번거로울 뿐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순간 청의 검날에서 검기가 한 치나 솟았다·
검강 아니라 검기로는 절대 불가능한 기예다·
검기라고 검 밖으로 쭉쭉 뺄 수 있으면 다들 은장도 하나 주머니에 휴대하여 뽑아 모 유명 작중의 광선검처럼 뽑아서 휘두르지 무겁게 칼 차고 다니겠는가·
그러니 검기가 치솟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사실 검기가 아니라 높은 밀도의 검사들이 뭉쳐서 하나로 보이는 것이다·
역근세수경의 공능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 기경팔맥 진기가 흐르는 혈도가 크게 확장되어 그야말로 초고출력 진기 분사기 노릇이 가능해졌다·
현대인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하면 소모 진기 두 배에 위력은 한 배 반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청의 축기가 이미 경지를 한참 초월한 상태이며 강을 이루지 못한 검기가 딱히 많은 진기를 소모하는 것도 아니다·
“일 수!”
청이 그리 외치며 정직한 직선을 그렸다·
두꺼운 검기가 초곽의 검에 둘러진 강기와 부딪친다·
칼과 칼이 마주하지 않아 소리는 나지 않으나 순간 그 중심으로 충격파가 바람이 되어 사방으로 훅 끼쳤다·
다만 청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초곽의 면상은 조금 펴졌으니 첫 격돌의 결과는 알 만했다·
아이 씨 검사로는 역시 안 되나·
초곽의 검이 청의 검기 속으로 파고들다 못해 월광검의 검날마저 슬쩍 떼어먹었다·
강환이란 화경 고수가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원거리 기예에 불과한 것이다·
전문적으로 강환을 다루는 강기공이 아니라면 그 위력이 그저 암기에 강기 실어 던지는 것만 못한 것이다·
그러니 화경 고수의 진정한 두려움은 강환이 아니라 한층 압축되어 두른 강기가 병장기 밖으로 눈에 보일 만큼이나 발출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었다·
초곽의 검에서 보랏빛 강기가 일렁이며 그 두께를 더했다·
화산의 도사들이 거품을 물 장면이기도 했다·
황은자하공 황궁 개조판 자하신공이었다·
청이 깜짝 놀라 검을 거뒀으나 이미 칼날에 큼지막하게 이가 빠진 상태였다·
내 월광검!
얼마 쓰지도 못했는데!
몇 번 쓰지도 못하고 월광검 9호를 맞이해야 하게 생긴 청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고수신데 열 수만 양보하실 생각은·”
“헛소리!”
초곽의 검이 바삐 움직였다·
황은복마검 마를 제압하는 지독한 결단으로 빚어진 지독한 살검이었다·
다만 상성이 조금 나빴는데 복마검은 정파의 무공 중에서도 살기가 가장 강한 무공 중 하나인 것이다·
그 살검으로 상대의 요혈을 피해 공격하려니 어색할 수밖에는·
청의 죽음이 곧 일가 몰살인 초곽에게는 적의 급소가 본인의 급소인 상황이나 매한가지다·
“우왓! 꺅! 악! 앗 앗! 앗! 끄악! 악!”
청이 연신 가쁜 탄성 겸 비명 겸 감탄이 전부 섞인 정신 사나운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피하기에 바빴다·
부딪쳤다간 검이 남아나지 못한다·
일단 소리나 지르며 정신을 흩뜨려 기회를 노리려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급소를 노리지 않는 공격이라도 상대는 화경의 고수이자 검의 달인이며 심지어 그 검술이 절세의 신공이어서야·
청이 무공창으로 확인해 보았다면 복마검의 영롱한 보라색 테두리를 보았을 것이다·
청이 허리를 비틀어 강기 실린 칼날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냈다·
그러나 강기는 그 예리함이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미치는 것이다·
곧장 허리춤의 의복과 함께 피부를 베여 붉은 얼룩이 살짝 번졌다·
“악! 잠깐! 진짜 베였· 꺅!”
허벅지 옆구리 어깨에만 조금씩 생채기가 늘어나니 딱 그 부분에만 도복이 얼룩덜룩했다·
분명 피했음에도 피부가 갈라져 시큰거리고 통증 때문에 어떤 상태인가 혹시 크게 베인 건 아닌가 신경은 쓰이지 쓰라린 상처의 고통은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 것만 같은···
“악!! 악! 악!? 음? 어? 왜? 뭐?”
청의 엄살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뭐지?
분명 아픈데? 의외로 괜찮은?
아니 뭐랄까·
후끈후끈하니 나쁘지 않은 것도 같고·
따끔따끔 찌르는 게 묘한 오묘한 모기 물린 자리에 손톱자국을 내는 듯한 쓰라린 쾌감이·
그러고 나니 청의 회피 동작이 간결해졌다·
쓸데없는 움직임이 줄어드니 시선의 흔들림이 덜하고 보는 것이 안정되니 동작은 간결하나 검격을 피해내며 더 이상 상처가 늘지 않았다·
초곽이 곧장 이상을 눈치챘다·
‘이년 점차 회피에 능숙해지고 있지 않나!’
부아가 치솟은 초곽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갈!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계속 피하기만 할 셈이냐!”
“그럼!? 맞아줄까!?”
그리 외치며 청이 무릎이 확 접었다·
땅에 발을 붙인 채로 무릎 위의 몸통이 지상과 수평이 되게 누워 팔로 땅을 받쳤다·
초곽이 돌연 땅으로 꺼져 사라져버린 청의 신형을 놓쳐버린 탓에 순간 멈칫거렸다·
이것이 바로 고절한 신법의 한 수로 용기병 이 아니라 철판교라고 하는 기예였다·
청이 그 자세에서 팔로 지상을 박차니 초곽이 보기에는 순식간에 시야 아래서 솟아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청이 깜짝 등장과 함께 검을 밀어넣었다·
“흥! 어림없다!”
그러나 경지의 차이가 워낙 심해야지·
초곽이 무심하게 검을 휘두르니 칼 든 채로 청의 팔이 튕겨 훤히 열렸다·
순간 청의 눈이 번뜩이더니 그 왼손이 불쑥 뻗어나갔다·
팍! 초곽이 급한 대로 팔뚝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는 왼손을 펴 손끝을 구부리니 조수라 하는 조법의 기본 모양을 취해 휘두른다·
황은신풍조·
공동파 도사가 보았다면 신풍귀조 문파의 진산절기를 훔쳤다며 비명을 질렀겠지만·
그러나 소수마공은 마공의 성질을 떼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신묘한 수공에 속했다·
손끝으로 찌르고 구부려 할퀴고 손날로 베어낸 후 손등으로 후려치고 장심으로 밀고 검지와 중지 둘만을 세워 솟은 관절뼈로 때리니 한 호흡에 여섯 수가 연달아 펼쳐졌다·
손 전체를 쓰는 것을 수공이라 하니 그야말로 수공의 정수와 같은 연격이었다·
보조로 배운 조공의 공부가 이에 미치지 못하니 초곽의 강기 두른 손이 그저 얻어맞으며 억지로 버텨 걷어내기에 급급했다·
이때 멀리 나갔던 오른팔들이 되돌아왔다·
청의 검에서 다시 폭발하듯 검기가 솟구쳤다·
초곽의 시선이 그리로 향하는 순간 시리게 붉은 빛을 띈 소수가 파고들며 적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그 반동으로 청이 훌쩍 거리를 벌렸다·
몇 대 멋지게 먹였으나 청의 표정이 어둡다·
“에이씨 호신강기· 재미 보기 힘드네·”
청이 얼얼한 왼팔을 탈탈 털며 중얼거렸다·
그에 반해 초곽의 표정은 조금 더 풀렸다·
“하·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그래 기예의 정교함 만큼 내 인정하마· 하지만 무학의 공부가 굳이 경지를 나누니 그 차이가 태산과 같은 것임을 모르겠느냐? 이제라도 물러난다면 내 선배의 아량을 베풀어 음?”
어떻게 말로 물러나게 구슬려보려던 초곽이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문득 옆구리에서 시린 듯한 저린 듯한 기묘한 얼얼함이 밀려든 까닭이었다·
왼손과 팔뚝 역시 미묘하게 차게 시큰거린다·
급히 기맥을 더듬은 초곽이 은밀하게 침투한 암경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시리도록 사음한 암경이 혈맥을 찢어내며 은은히 퍼지고 있으나 기이하게도 동시에 정양한 온기가 함께 휘감고 있으니 통증이 덜하여 단박에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이로써 진기를 섞어 쓰는 청의 신녀신수가 외려 원본 소수마공의 사악함을 뛰어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무슨 이건·”
초곽이 그제야 청의 시리도록 희고 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섬섬옥수를 눈치채고 말았다·
얼굴이 절세의 미인이면 손마저 당연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여기는 것이 사람의 생리가 아니겠는가·
이제 보고 나니 떠오르는 무공이 있었다·
“이건 소수·”
“와악!!! 와아아악!! 다시 갑니다!”
청이 소리를 지르며 재차 달려들었다·
청이 사람의 말을 막을 때 쓰는 수법이었다·
동시에 월광검을 두손으로 단단히 쥐어 어깨 옆으로 양껏 밀어내니 그 광채가 붉고 희고 보랏빛으로 화려하게 뒤섞여 거칠게 뿜어졌다·
누가 보아도 사력을 다한 최후의 한 수가 분명한 것이라·
초곽의 검에서도 별빛이 진하게 흘렀다·
아예 검을 베어버려 전의를 꺾어낼 생각으로·
청의 어깨 너머로 뻗었던 거대한 기의 검이 돌연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거대한 색채가 허공에 굵디굵은 획을 그린다·
그에 맞서는 강기 두른 검은 오히려 왜소하고 작은 것이나 이 자리의 누구라도 더 위험한 것임을 본능으로 아는 파괴적인 별빛이었다·
그리하여 두 기운이 막 부딪치려는 그 찰나!
청의 검이 맥없이 슝 하늘을 날았다·
양손으로 쥐고 힘껏 휘두르던 물체를 놓으면 당연히 저 멀리 날아갈 수밖에는·
아예 검을 베어내려 궤적에 맞서던 초곽이다·
청의 칼이 사라졌으니 초곽의 칼은 허공만을 베고 틀어쥔 손과 함께 옆구리 바깥 멀리까지 외출을 나갔다·
“빈틈!”
청의 오른손이 등 뒤로 돌아가 길쭉한 것의 손잡이를 콱 쥐었다·
소리가 나는 잡기능이 달린 만년한철 단봉의 끄트머리였다·
초곽이 이를 악물며 호신강기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가운데 청이 그대로 온 힘을 다해 복신적을 아래에서 모로 올려쳤다·
빠악!!!
항우장사조차 한 수 접어야 할 괴력이 실린 복신적이 초곽의 가슴 옆을 강타했다·
초곽의 뒷꿈치가 땅에서 떨어지며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호신강기가 몸으로 전해지는 충격을 막아줄 수는 있어도 순수한 물리력이 미는 힘까지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미리 알았다면 천근추로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큰 키와 푹 퍼질러진 가슴팍 외에는 여리여리한 소녀의 형상을 하고 괴력을 뿜을 것이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청이 우악스러운 힘으로 복신적과 왼손을 번갈아서 휘둘러댔다·
최리옹이 각법에 핀잔을 줄 때에 말했다·
무인의 힘은 단단히 디딘 중심 대지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그러니 한 번 자세를 잃고 중심마저 잃은 초곽이 수세에 몰렸다·
그저 호신강기 두르고 몸을 웅크리고 연신 뒷걸음질 치며 필사적으로 버티기에만 급급할 수밖에는·
청 역시 필사적이었다·
이 와중에서도 살이 터지고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원하는 촉감이 와닿지 않는 것이다·
진짜 시발· 화경이 대체 뭔데? 무적이야!?
나도 강기! 강기 쓰고 싶다!
강기 없어서 서러워서 절정따리 살겠냐!
그래도 계속 후려치다 보면 죽겠지?
내가 누구?
절정 후기지만 화경을 때려죽인 세기의 천재·
사부님한테 자랑해야지·
청이 그런 생각으로 다시 복신적을 번쩍 치들었을 때였다·
문득 전신을 내달리는 한기에 온몸 전신의 솜털이 바짝 서고 피부가 일어서 소름이 돋았다·
화경 고수의 살기다·
기와 반응한 의념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거대한 살의에 청의 본능이 반응하고 만 것이다·
“이 개녀언!!! 죽어!!”
청이 다급히 땅을 디뎌 몸을 반대로 밀었다·
그러나 이미 한 발 늦었다·
별빛 궤적이 초승달을 그리며 청을 훑었다·
서걱·
몸의 가죽이 찢기고 날붙이가 드나드는 촉감이 선명하게 와닿는다·
제대로 베이면 귀가 아닌 몸으로 소리가 전해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나니 고통보다도 들끓어 치솟는 것이 열화와 같은 분노였다·
아니 이 개 같은 새끼가! 감히 나한테 칼질을 먹여!?
악업 잔뜩 붙인 개쌍놈의 새끼 주제에!
나쁜 짓이나 처하던 새끼가!
얌전히 수련점이나 주고 죽을 것이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이딴 개새끼에게 베여서는 안 된다·
이건 불공평하잖아·
나쁜 새끼는 칼을 맞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아야 하는 건데·
그리고 내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잖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귀한 사람이란 말야·
그런데 이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 엔피씨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청의 눈동자 속 흉험한 붉은 별이 기지개를 펴며 광채를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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