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6
오 친왕· 좀 쩌는데·
청의 감상이었다·
사실 자유가 딱히 잘 사는 집 아들임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청이 딱히 그에 개의치 않았기도 했다·
서로 모른 척해주자는 무언의 합의나 마찬가지라서 청이 생각하기에 딱히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있었던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친왕이라는 제도의 생소함도 한몫했다·
한민족이 중세 무림에 와서 지배자라 하면 와 황제! 하고 끝이 아니겠는가·
무슨무슨 왕부가 있고 지방의 실질적 주인이라거나 한 성의 군사를 총괄할 수도 있다거나 천자 아래 왕후장상 계급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잘 모른다·
중세 중국 따위는 세상 어느 민족도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손들인 중국인마저 궁금하지 않아서 불태워버린 역사였으니 아는 쪽이 더 이상하다 할 것이다·
아예 고대 중국에 유비와 형제들 뛰놀던 때나 조금 수요가 있을 뿐이지·
(그마저도 만화라는 매체가 아니었다면 턱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청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했다·
“어 음· 친왕 전하? 뭐라고 불러야·”
“무엄하다! 제대로 된 예를 갖추지 못할까!”
아씨· 뭔데 얘는 계속 떽떽거리지·
청이 시끄러운 여인을 찌릿 한 번 쏘아보고는 다시 자유 덕현친왕을 바라보았다·
“왕야라 부르거라·”
“아· 왕야·”
“근데 뭐예요? 왜 죽은 척을 했는데? 아닌가 그때 소식 들린 게 같이 밥 먹을 때였나?”
“아니 네년! 왕야시다! 당장 의복을 정제하고 공손히 엎드려도 모자랄 것을! 지금 네가 왕야께 조그만한 친분이 있었다고 그에 기대어 줄을 잡았다 생각하냔 말이다!”
여인이 다시 거품을 물었다·
그러나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니 왕이 심심해서 정체 숨기고 나왔으니 그때 조금 친해졌다고 해서 계속 친구로 남는 것도 아니긴 하다·
굳이 비유하자면 생산직 신입으로 잠깐 기분 전환이나 하러 온 재벌집 후계자쯤 될까·
자동사냥 게임이니 자체 휴식 자비 회식같은 기상천외한 생산직 문화가 얼마나 웃기고 같잖게 보이겠어·
그러고 나니 청도 기분이 상했다·
갑자기 짠 나 친왕이었어 하면 우와 개쩐다 짝짝짝 박수라도 쳐줄 줄 알았나?
가진 게 돈과 권력인데 뭐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없나 하고 달려들 속물처럼 보였나?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정체가 탄로나더라도 사정상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는데 그래도 그간 고마웠다느니 아니면 계속 친구로 남고 싶다느니 제대로 된 관계 정리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게다가 왕야가 딱히 여인을 제지하지 않았다·
원래 높은 분쯤 되면 저 하기 싫은 소리를 남이 대신 해주기 마련인 것이다·
청이 곧장 삐딱한 자세를 바로잡았다·
사람이 무슨 둘이나 되는 것처럼 곧장 얌전하고 다소곳한 기색을 띠었다·
“천녀가 앎이 모자라 왕야께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모르고 한 일이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겠어요?”
“고가 사복을 하고 나왔으니 네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않더냐· 개의치 않을 터이니 그게 달리 걱정할 필요는 없느니라·”
“예· 그간 감사했습니다 왕야·”
“아니· 흠· 흠·”
덕현친왕이 당황한 기색으로 여인을 살폈다·
여인 역시 함께 당황한 기색이었다·
감사했습니다 라는 말은 보통 관계의 종언을 뜻하는 말이었으니까·
“크흠· 창여인·”
창여인이 낭패감을 느꼈다·
청을 검증해야 한다고 우긴 것이 창여인이었으니까·
견 노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그저 왕야께 아가씨 한 명만 붙어도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작은 주인님 모시느니 어쩌느니 난리를 쳐도 그게 왕부 하인들 모두의 의견은 아니었다·
창여인이 듣기로는 딱 권세가의 아들이라고 꼬리나 치는 여인이었다·
왕야께서 정체를 드러내고 나면 필히 친한 척이나 하면서 비의 자리를 노리지 않겠냐고·
뭐 그러한 검증이었는데·
그 동안 청은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아니 사람 이름이 어떻게 창여인이야?
그것도 여인한테!
아니겠지? 별호 같은 거겠지?
아니 어떻게 사람 별호가 창여인이야?
그것도 여인한테!
그 때에 불쌍한 이름 혹은 별호를 가진 비운의 여인 창여인이 한참 누그러진 태도로 민망한듯 말을 걸어왔다·
“앗 커흠· 음· 서문 소저라고 하였던가· 사람 인연이라 하는 것이 어찌 그리 냉정하게 내칠 것인가·”
“아닌 인연을 억지로 붙들어봐야 구차한 구걸로나 비칠 뿐이 아니겠어요? 그럴 바에야 그냥 내가 왕년에 왕야께 친구라고 불려 보았다고 자랑거리나 하나 남기는 게 낫지·”
“아니 그것이· 굳이 왕년이 아니어도 되는·”
“됐고· 할 말 있으면 본인이 하라고 하세요· 뭐 대변인 세워다가 사람 무안이나 주고· 없이 산 년이라고 높으신 분이라고 하면 환장해서 달려들 줄 아나·”
그에 듣고 있던 당가 사람들이 희게 질렸다·
청이 생각하는 대충 재벌집 아들하고 친왕은 들어맞기는 해도 세상에 완벽한 비유는 없는 법인 것이다·
불경도 이런 불경이 없었으니 구명줄로 여긴 친왕이 알고 보니 도화선이 될 판이었다·
“그···· 미안하구나· 고가 그럴 생각은 아니었느니라· 일부러 숨긴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 노여워하지 말거라·”
눈치를 보던 당가 사람들이 결국 다시 헛숨을 들이쉬고 말았다·
그걸 또 순순히 사과한단 말인가!
“일부러가 아니시라면 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가만히 계셨나요? 애초에 왕야께서 고가 살아있으니라 한 마디면 이 난리통도 안 나는 거 아니었나요?”
“그게 고 역시 고가 훙거했단 소식을 듣지 않았느냐· 자리를 비운 때에 대역을 맡은 자가 쓰러졌으니 고 역시 알아볼 시간은 있어야지···”
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유가 진땀을 흘리다 문득 생각했다·
근데 왜 고가 죄인처럼 이러고 있나·
“흠흠 고는 친왕이니라·”
“예 친왕 전하· 그리고 여긴 포격 맞은 당가 지하구요· 아주 개박살이 났던데·”
흠흠· 당가주가 불편한 헛기침을 하여 중얼거렸다· 개박살까지는 아닌데····
“···고를 너무 냉혈한으로 보지 말라·”
자유가 다시 쪼그라들었다·
그에 당가 사람들이 생각했다·
완전 잡혔네· 완전 잡혔어·
그냥 꽉 잡혀 휘둘리는구나·
시선을 느낀 자유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 자리를 좀 옮겨야 하겠구나·”
—-
황제는 무림을 증오한다·
무천대제 이후 대물림된 증오는 이미 상식의 선을 넘었으니 심지어 무림을 가장 증오하는 자식에게 황위를 넘겨줄 수준이 되고 말았다·
무림인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무천대체처럼 하늘에 이르는 거인이 아니라면 수십만 강병에 맞서 살아남을 정도는 아니다·
군사라고 무공을 안 익히지 않는다·
고수의 내공이 무한한 것도 아니다·
진기가 고갈되면 그저 튼튼하고 잘 싸우는 한 필부에 불과하니 그냥 머릿수로 무식하게 때려 박으면 피해는 클지언정 밀어버리지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피해가 크면 무림이고 뭐고 그 이후에 황조가 바뀔 것이니 함부로 들이받지 못하겠지만·
그러니 눈치를 보며 하나 치우려니 이왕이면 가장 위험한 것을 지우는 것이 낫겠다고 여긴 모양이라고·
그게 사천당가였다·
무인 한 사람당 군사의 교환비를 압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생화학 병기들이라서·
“어쩐지 형님께서 고를 사천으로 보내주었나 싶었지· 이 또한 왕이 난 고도가 아니느냐·”
현명한 자는 최악을 가정한다·
덕현왕부가 생긴 것이 십여년 전이니 아마도 그때부터 암살 이후 당가의 처리를 꿈꾸었다 치면 함부로 몸을 드러내 위험해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름 눈 밖에 나지 않게 잘 처신했다 여겼다마는 역시 제거할 생각이신 게지·”
그래서 아예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백성들이 칭송하는 좋은 왕도 실은 허상이다·
거슬리지 않기 위해 가산을 쌓지 않을 뿐이니 곡식이라도 사다가 빈민들에게 버렸다·
관의 요직에 황제의 관리 대신 제 입김 닿는 사람을 꽂아 넣다 보니 탐관오리들을 몰아냈다 난리를 치더라·
다스리지 않는 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황제 무서워서 얼굴 내보이고 다니지 않았을 뿐이었다고·
“그럼 뭐· 어쩔 수 없네요· 살려고 한 거면·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데요?”
“이 기회에 당가의 협조를 구해 아예 사천을 장악할 수도 있겠지· 사천의 관과 무림이 힘을 합친다면야 황상께서도 답이 없으실 것이 아니겠느냐· 다만·”
“다만?”
친왕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자 무공 하나 익히지 않은 몸임에도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위엄이 있었다·
청이 새삼 느끼기를 왕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닌가보다 하고·
“굳이 무림이 존재하여야 할 이유가 있느냐? 황상께서 하늘의 아들로 하늘의 명을 받아 적통한 권한으로 지상을 통치하신다· 이 넓은 땅에 그 준엄한 법이 그에서 나오거늘 감히 칼 찬 무리들이 제멋대로 땅의 주인을 자처하며 양민을 수탈하지 않느냐·”
덕현친왕이 사천당가의 편을 드는 일은 쉬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이미 황제가 도어사와 금의위를 보내 당가를 지우고자 하였으니 친왕이 그에 반기를 들어 대립하는 꼴이었다·
그러고 나면 진짜로 반역이 되는 것이다·
물론 황제가 친왕을 죽이려 들기는 했다·
그러나 황제란 백성에게 죽음을 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덕현친왕이 묻는 이유가 그저 궁금해서 네 의견이나 들어보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간 친왕이 홀로 고민하여 결론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무림이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하여 그 통치의 권한을 나누어도 좋은 것인지에 대해·
사천의 친왕이 한낱 무림 문파를 도와 황실에 칼을 세워야 하겠느냐고 묻는 돌이킬 수 없는 한 결정에 대한 마지막 질문이었다·
그리하여 청이 대답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요?”
자유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음· 뭔가 대단히 중요한 것을 묻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나? 너 아니지· 친구 역시 당가를 도왔으니 무림의 일원으로 그 의무를 다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고의 백성이 아닌 친구인 무림인에게 묻는 것이노라만·”
“무림의 일원은 무슨· 그냥 내가 보기에 당가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니까 도와줬던 거지· 공짜 의술도 베풀고 평판도 좋았잖아요·”
“베풀다니· 그저 저희 의술을 발전시키겠다고 한 일이 아니냐? 제 잇속 챙기는 일에 결과가 좋았을 뿐이니 그게 좋은 일이더냐?”
청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결과만 좋으면 되지 그럼· 어쨌거나 남들이 좋아하면 좋은 일 아닌가? 내가 보기엔 악명만 높은 황제보다는 공짜 의원 역할 하는 당가가 훨씬 세상에 이로운 사람들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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