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9
붕대남이 급히 집법관보를 살폈다·
청의 키가 큰 편에 환골탈태한 무인은 본래 손발이 긴 법이다·
청이 손목을 쥔 손을 끝까지 치드니 늙은이의 시체가 반 치 정도 허공에 떠올라 흔들거렸다·
이중고로 모골이 송연한 장면이었다·
일단은 눈앞에 초절정 후기를 제압한 대적이 존재하기에 한 번 시리고 사파련의 집법관보가 죽었으니 그 후환을 생각하니 시린 등 뒤로 서리가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란 말 그대로였다·
“본인은 나면파 문주 단운삭이라 한다· 그대들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리도 무도한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단운삭이 떨리지 않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노래 기교 같은 진동이 조금 섞였다·
“쓰레기를 치우는 데에 굳이 이름까지 밝힐 것이 있나? 거슬리는 사람이 치우는 법인데·”
“으음···”
단운삭이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둘의 대화를 무림 식으로 통역하면 이랬다·
‘우리 대화로 합시다·’
‘닥치고 덤벼·’
이제 오 년 차 무림인답게 청 역시 해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훌륭한 무림어語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응용까지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구명의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 반 노인의 손주놈을 내놓아라·”
옆에서 제갈이현이 속으로만 감탄했다·
역시 누님! 내놓더라도 물러나겠다는 소리는 안 하시는군요!
가능성이라고 하셨으니 아니면 말고 하시는 협잡질 개사기 개수작이 아닙니까!
이제 제갈이현도 청이라는 인물상을 거진 팔 할은 이해하고 만 것이다·
한 번 조져야겠다 마음을 먹으면 불리하기 전까지는 입이며 칼 독과 불의 어떤 수단이라도 가리지 않는 집요하고 비열한 협객이었다·
체면이란 개념을 아예 모르지만 또 정의로운 것 같기는 하니 딱 맞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큭· 말이야 쓰레기니 해도 너희 역시 결국 반 노인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
“손주의 납치보다는 손주의 구출이 훨씬 남들 보기에 좋고 자랑하기도 좋지· 어딜 갖다 대? 보름 푹 썩은 음식이랑 갓 차려진 잔칫상이랑 비교하게 되어 있냐? 먹을 거라고 다 음식이라 하는 줄 알아?”
“그리 포장해도 결국 천하의 검장을 가지려는 추악한 욕심임은 다를 것이 없”
“됐고· 반 노인 손주 내놔· 허약한 새끼들이 내놔 하면 ‘알겠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하고 척 내놓지는 못하고· 왜 혓바닥이 길어?”
“그건····”
그때 제갈이현이 청의 귓가로 추정되는 면사 부분으로 얼굴을 들이대며 속삭였다·
“누님 아마 반 노인의 손주를 내놓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감찰관보가 말하기를 사악한 탕약이라 하였으니 아마도···”
나병 환자가 아이를 잡아먹는다고 하는 소문은 본래 혐오에서 나타난 누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문이란 놈은 세상 지독한 악질이다·
간절한 이의 마음을 흔들어 진실처럼 믿어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나병은 살점이 산 채로 썩어 떨어지니 하늘의 심판(천형天刑) 이라 불릴 정도로 참혹한 질병이었다·
청의 눈빛이 광택을 잃어 무기질한 질감으로 식었다·
면사 너머 눈구멍 자리에 희미한 보랏빛 안광이 새어나온다·
사람이 본능으로 피하게 되는 저것은 매우 해롭고 끔찍한 것이라고 보자마자 깨닫게 되는 흉성의 별빛이었다·
“아까 확 불을 질러버렸어야 했는데·”
“동감입니다·”
청이 늙은 대마두의 시체를 툭 놓아버리고는 월광검을 오른손으로 고쳐잡았다·
왼손으로도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오른손에는 검이 들려야 익숙하니 알맞게 손에 딱 들어오는 것이다·
“얼굴 가린 거 보니 너가 나면파 두목이구나? 강호 사람들이 말하기를 얼굴 가린 새끼들 중에 멀쩡한 면상을 한 놈이 없다던데·”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묘한 눈빛으로 청을 바라보았지만·
하지만 청은 당당한 미인이라서 거리낄 것이 없다·
“얼마나 추한 꼴을 하고 있는지 내가 높이 걸어서 세상 사람들한테 알려줘야겠다· 먹을 게 없어서 사람을 처먹어? 이 개 같은-”
“잠깐! 오해다! 오해가 있습니다!”
단운삭이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청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오해? 무슨 오해?”
“탕약이니 뭐니 하는 끔찍한 소문은 진실이 아닙니다! 누가 그딴 소문을 믿는단 말입니까!”
“소문이 아니라고? 분명 저 죽은 보안관보”
“누님 집법관보입니다· 그런데 보안관이라 왜 멋진 단어인지 모르겠군요· 어쩐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듯한”
“됐고· 저 집법관보가 말하기는 너네가 보약 지어 먹었다던데·”
그러자 단운삭이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정말로 억울한 목소리였다·
“반 늙은이네 손자놈은 흑시에 팔아넘겼지 그딴 효과도 없는 미신 같은 처방은 진작 그만둔 지 오래란 말입니다!”
“먹어보긴 했단 소리네? 문답무용!”
청이 지면을 밟아 화살처럼 쏘아져나갔다·
이제는 거대한 한 줄기 거검의 형상을 이룬 검사가 월광검을 온통 뒤덮어 노을빛 두꺼운 궤적으로 이어졌다·
“핫 젠장! 뭐해! 쳐라!”
단운삭이 그리 소리지르며 검을 뽑았다·
칼날에 희미하게 어리는 별빛 초절정 후기쯤 되면 덜 압축된 것이라도 검강에는 능숙하다·
검기와 검강은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청의 무식한 출력을 뚫어내려면 초절정 고수의 덜 압축된 검강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청이 기세를 몰아 연신 검격을 이었다·
풍림화산 몰아칠 때는 폭풍처럼·
백팔수라검의 후반 초식 일만일천격 무수한 잔상과 함께 야성에 의존한 쾌검이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을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연신 물러나며 검격을 걷어내던 단운삭이 속으로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할 만하지 않은가 하고·
흉흉하니 꼬리를 그리는 보랏빛 안광은 섬뜩하기 그지없는 것이나 그리고 한 뭉치로 뻗는 검사 역시 해괴하고 들은 적이 없는 것이나-
그럼에도 검강을 쓰지 않으니 절정 고수가 무식하게 내공만 늘리면 이런 꼴이었다·
“젠장! 속았다! 이년 고수가 아니었구나!”
“무슨 소리? 이 몸· 고수·”
“뭣들 해! 당장 달려들지 않고!”
단운삭이 소리를 질렀으나 문도들은 오히려 뒤로 물러나며 주춤거렸다·
안목 없는 하류들은 문주의 희미한 검강보다 청의 흉악한 검사가 백 배는 위험한 것으로 보였다·
안목 있는 일류와 몇 명의 절정 무인들은 청의 뒤편으로 거리를 지키는 일행들의 눈치를 보았다·
어쨌거나 혈련검마가 죽었으니 개중에 고수가 있거나 그에 준하는 수법 따위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여겼으니까·
그러니 대장전을 구경하다 문주가 유리하면 달려들어 빠르게 전세를 뒤집고 문주가 당해버리면 항복을 하는 편이 낫겠다고·
애초에 사파에 속한 문파들이 한결같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유협의 의리였다·
의리가 없는 놈들이라서 귀에 딱지가 얹도록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이다·
“이 빌어먹을 놈들!”
단운삭이 이를 부득 갈았다·
결국 그가 해내야 했다·
내공이 아무리 막대하다고 해도 고작 절정에 불과한 계집 하나 이기지 못할까·
단운삭이 일부러 곤란한 표정으로 한 발짝씩 물러나며 수세에 몰린 연기를 시작했다·
그러다 검과 검이 이어지는 틈새에 눈을 번뜩이니 청의 팔이 빠진 사이로 날카로운 검로를 그려 파고들었다·
단운삭 인생에서도 몇 없는 훌륭한 한 수 후발제인의 정수가 담긴 일격이었다·
순간적으로 가속된 사고 속 그만큼 느려진 세상에서 계집이 팔을 들어올려 검의 궤적을 가로막는다·
느리게 흐르는 세상에서 단운삭의 입가가 천천히 길게 호선을 그린다·
멍청한 년 같으니 사람의 피륙으로 검강을 막을 수 있겠느냐·
마침내 비스듬히 세운 청의 팔뚝에 단운삭의 검강이 닿았다·
이제는 거의 멈춰버린 것만 같은 시간 속에 흰 피부로 스며드는 검강이 보인다·
이제 저 고운 팔뚝이 뎅겅 잘려나가고 말 것이라고 단운삭이 믿어 의심치 않는 순간-
손아귀에 와닿는 강렬한 충격!
쇳덩이를 내리친 것과 같으니 손가죽이 비명을 지르고 모든 뼈마디에 충격이 전해져 시큰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어찌···”
때에 맞춰 집 나간 청의 오른팔이 돌아온다·
허리를 베어오는 참격에 피할 길 없음을 깨달은 단운삭이 아예 다리에 힘을 빼며 뒤로 확 드러눕는다·
청의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단운삭의 코끝을 스쳐 반달을 그렸다·
단운삭이 안도하며 등짝에 와닿는 충격을 받아들이고 곧장 몸을 힘차게 뒤집었다·
나려타곤· 몸을 뒤집는 게으른 나귀라는 뜻을 가진 경신법의 일종으로 다른 것 없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수법이다·
체면을 목숨처럼 여기는 무림인들은 볼품없이 바닥을 구르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으지만 정작 위기의 때에 구르지 않고 체면보다 죽음을 택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 놓고는 한신이 어쩌고 가랑이 저쩌고·
천 년이 넘도록 두고두고 우려먹을 핑곗거리를 내준 한신의 큰 잘못이었다·
청이 발을 쿵 굴렀다·
천마군림보의 거친 압력이 주변을 콱 찍어누른다·
천마군림보의 장점이라면 발바닥으로 기운이 모이니 그 징그러운 눈깔 가득한 진천마기를 볼 일이 없다는 것이다·
눈치 안 보고 대충 써도 된다는 뜻이었다·
몇 번 구르지도 못한 단운삭이 갑자기 배가된 압력에 낑낑거렸다·
뒤이어 데엥 여래신장의 종소리와 함게 촤악 누운 놈의 허벅지에서 피가 팍 튀었다·
“끄아악!”
단운삭이 제 허벅지를 붙들고 죽어라 비명을 질렀다·
허벅지 안쪽은 의외로 치명적인 급소들 중 하나다·
가장 굵은 혈관 중 하나가 근육의 보호 없이 무방비로 지나가는 길목이라 대퇴 동맥이 터져나간 단운삭의 골반 아래에서 걷잡을 수 없는 큰 출혈이 일었다·
그래도 꼴에 고수라고 상처를 헤집어 손가락으로 혈관을 꽉 쥐었으니 삼매진화의 수법인지 흰 연기 두어 줄기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스몄다·
출혈은 잡았지만 다리 한짝은 버렸다·
다리 한 짝 없는 초절정은 서문청 아닌 다른 절정의 무인이라도 충분히 요리할 수 있다·
청이 씩 웃으며 단운삭을 내려다보았다·
“고수를 몰라본 죄 사형·”
사실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검에 대한 깨달음부터 차이가 나니 정신없는 연격 속에서도 단운삭이 빈틈을 찾아 치명적인 반격을 날리지 않았던가·
소수마공의 금강불괴 아니 절정 수준이라 좀 약해서 도금강불괴 혹은 은강불괴 소수가 아니었으면 팔뚝과 함께 몸통도 예쁘게 잘렸을 터다·
천마군림보가 아니었다면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려들었을 테고 여래신장이 아니면 어떻게 허공을 격해 허벅지를 터뜨릴 수 있었을까·
그러나 무인이 비장의 수법 한둘 정도 감추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한 전법이기도 했다·
청은 남들보다 좀 많이 감추고 있었을 뿐·
전문적인 표현으로는 모르면 맞아야 한다고·
인류의 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귀한 진리인 것이다·
그리고 승패가 갈린 때에 패배자가 할 일도 예로부터 정해져 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원하는 게 무엇이든 전부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건 이미 말했잖아· 반 노인네 손주· 지금 당장 데려올 수 있어?”
“시간을 시간을 주십시오· 흑시에 넘겼으니 수소문을 하면 분명 찾을 수 있을····”
“흐음· 빈틈! 이건 내 팔의 몫이다!”
청이 턱을 긁적이고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리다가 돌연 팔을 뻗더니 데엥!
파악! 피가 터지며 단운삭의 팔꿈치 아래가 툭 떨어져 검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끄아악! 왜! 어째서!”
“눈깔 굴리는 게 수상하잖아· 애초에 자세가 안 됐어· 살고 싶으면 양 손 모아서 파리처럼 비빌 줄을 알아야지 왜 칼을 꽉 쥐고 허옇게 변하도록 힘을 줘?”
실제로 파검이라는 수법이 있다·
검신에 진기를 난폭하게 불어넣어 깨뜨리는 수법으로 어설프게 하면 그냥 무기 하나만 해 먹고 끝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연마한 파검은 그야말로 대장군포와도 같아 수천이 넘는 날카로운 파편이 진기를 듬뿍 머금은 채로 발사된다·
청은 그냥 수상했을 뿐이지만 실제로 단운삭이 몰래 준비하던 최후의 수법이었다·
원래 청의 싸움이란 눈치와 잔머리라서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민감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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