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8
당장 나면파 무인들이 털썩털썩 쓰러져가니 모두 난리가 났다·
그나마 의리가 있는 놈들은 형님 아우 사형 사제를 외치며 지랄병이 난 동문을 붙들었다·
그러나 극독에 중독된 이를 함부로 건드려도 되는 사람은 이미 대비가 된 의원들 뿐이다·
나면파의 건달들 중 그나마 의리라도 있는 놈들이 괜히 식구를 챙기다 같이 쓰려져 몸을 떨었다·
그 와중에 청이 정문으로 달려드는 적을 세 명 정도 베어냈다·
그러고 나니 마당이 휑하니 잔경련을 일으키는 중독자들만 남았다·
생존을 위해 문파의 안위마저 포기하는 치욕을 감내한 것이다·
과거 한신이 가랑이 사이를 긴 고사와도 같았으니 참된 유협의 재능이 있다고도 하겠다·
설마 저 안쪽으로 들어가 버릴 줄이야·
나면파 무인들의 영악함에 놀랄 수밖에는·
“불이라도 붙일까? 근래에 봄비도 없었으니까 활활 잘 탈 텐데·”
“화계도 좋겠군요· 독탄을 뿌렸는데 불이라고 못 붙이겠습니까· 다만 누님 불이 크게 붙어버리면 반 노인의 손자가 무사하겠습니까?”
“에잉 걔는 왜 잡혀가지고· 싹 태워버리면 편한데·”
“음· 누님· 아주 조금만 정파의 여협으로서 품위를 지켜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음· 내 이참에 이 지저분한 사파의 마두들을 화계를 통해 일소하고자 하였다만! 그러나 무고한 아이가 휘말릴까 차마 실행할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도다·”
“하려면 하실 수 있으시잖습니까·”
제갈이현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품위 지키려다 입 다 부르트겠네· 두 마디면 되는 소리를 굳이 길게 늘여야 하나?”
“지키기 어렵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근육남 중 최고 지성다운 설득력이었다·
머리 좋은 놈들의 언변이란 분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 가서 그 손주놈이나 찾아보자· 아주 정신이 쪽 빠졌으니 아는 놈 나올 때까지 족치면 되겠지 뭐·”
그때였다·
“멍청한 놈들! 무색무취한 독이 천년만년 그 자리에 있다더냐! 적을 두고 도망치는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운 것이더냐! 거기 너 너 너· 독이 이미 날아갔으니 다시 모이라 전해!”
“예 예! 알겠습니다!”
주름 가득한 사나운 인상의 노인이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공력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청이 조심스레 상대를 가늠했다·
설마 또 화경이 튀어나오진 않겠지 하고·
그 사이 노인이 시체와 예비 시체들 가운데 당당히 서서 말했다·
“본 노는 사도련의 집법관보인 유차승이다· 그 위명을 너희도 들어는 보았겠지·”
“혈련검마!”
제갈이현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청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아군이고 적군이고 이름만 듣고 나면 꼭 별호를 외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무슨 강호의 상식 혹은 법도라도 되나?
“유명한 늙은이야? 아니다· 유명하니까 외쳤겠지· 쎈 늙은이야?”
“초절정 후기에 있는 대마두입니다·”
제갈이현이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그 말을 들은 청의 표정이 폈다·
“아· 그러면 할 만 하네 뭐·”
“누님 제가 혹시 절정 후기라 말했습니까? 말이 헛나온 모양입니다· 절정 후기가 아니라 초절정 후기의 대마두입니다만·”
“제대로 말한 거 맞아· 초절정 후기라며? 난 절정 초월 서문청이거든? 화경의 고수도 나한테 걸리면 개박살이야· 그치 난아야?”
“응· 응·”
“화경의 고수를 해치우셨단 말입니까? 아니 누님 우제에게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진작에 해주시지 않으시고는· 섭섭합니다·”
그 꼴을 바라보던 유차승의 표정이 굳었다·
강호에서 이름을 밝히는 의미는 경지 혹은 뒷배를 과시하여 기선제압을 하는 데에 있었다·
사도련과 초절정 후기라면 고만고만한 강호의 애송이들이 오들오들 떨며 도망칠 각을 보아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태연하게 잡담이나 하고 있다면?
유차승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러고 보니 무색무취한 극독이 아무 흑시에나 가서 돈 준다고 구할 수 있는 만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독성이 강하면 색과 냄새가 진하고 무색무취 눈치채기 어려운 것은 독성이 약하다·
둘 모두를 만족하는 독이란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으니·
거기에 계집 하나의 미색이 늙은이에게도 음심이 동할 정도였으니 둘을 합하면 얼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거기 아해는 당가의 해어독화가 아니더냐·”
“어? 저를 아세요?”
음· 유차승이 신음을 삼켰다·
설마 하면 역시라더니 하필이면 당가와 엮인 일이란 말인가 하고·
그리고 나니 산만 한 덩치를 한 아해도 달리 보이는 것이 무림대회 앞두고 모인 후기지수들이라면 분명 맹신현뇌라 하는 제갈가의 후계가 틀림없으리라·
그러고 나니 때까지 좋지 않았다·
무림대회란 정파 무림의 단합회였으니 절대 빌미를 주면 안 되는 시기라고 하겠다·
본래 단합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적을 만드는 것이 아니던가·
“크흠· 본 노는 사도련의 집법관보로 나면파 문주가 사악한 탕약을 제조한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다· 너희 역시 그러하겠지?”
그에 제갈이현이 말을 받았다·
“저희는 그저 납치되었다는 아이를 구출하려 하였을 뿐입니다만· 탕약이라 하면 설마·”
나면파 문주는 문둥병자다·
그리고 문둥병자가 제조하는 사악한 탕약이라 하면 입에 담기도 끔찍한 물건이었다·
“음· 안타깝게 되었구나· 소문은 사실인 것 같으니 사도련 집법관보의 권한으로 나면파를 제명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본 노는 나면파와는 이제 상관이 없지·”
유차승의 결론은 손절이었다·
“본 노는 이제 떠나야겠네· 격무가 바빠 아무 상관도 없는 장소에 지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니·”
청이 무어라 말하려는 때에 제갈이현이 그 어깨를 붙잡아 고개를 저었다·
“왜?”
“나면파 문주 역시 초절정에 든 무인입니다· 혹시 초절정 무인 둘을 상대로도 자신이 있으십니까?”
“음· 그건 좀· 그렇지·”
청이 혀를 차며 윽박을 질렀다·
“노인네 운 좋은 줄 알아요· 밤길 조심하고· 다음에 만나면 죽어·”
얼굴은 안 보여도 목소리가 새파란 계집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유차승이 왈칵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혔다·
“얼굴 가린 아해가 말도 거칠구나· 그런 말은 이름을 밝히고 하는 법이 아니냐·”
“내 이름은 서문청이고 스승님이 여중제일인이시다· 됐어요? 노인네 다음에 만나면 죽어·”
“크흠· 거 성질머리도 물려받았나···”
유차승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참기를 잘했다고 잘못하면 여광견의 제자를 건드릴 뻔하지 않았나·
성까지 물려줄 정도라면 보통 아끼는 제자가 아닐 터이니 걸어 다니는 인간 함정이었다·
“크흠· 노부는 이만· 좀 비켜 주겠나?”
“꼭 이쪽으로 지나갈 필요가 있나? 그냥 담 넘어가면 되지· 원래 나쁜 놈들은 담 넘는 거 좋아하지 않나? 도둑 강도 자객 방화범 납치범에 관음증 가진 변태까지· 죄다 나쁜 새끼들이 담을 넘던데·”
청이 다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제갈이현이 왜 굳이 긁느냐는 책망의 눈빛을 보내니 청이 못 본 척 딴청을 피웠다·
굳이 들리도록 말했으니 유차승이 담을 넘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담을 넘으면 도둑 강도 자객 방화범 납치범 혹은 관음증 가진 변태 중 하나가 되는 꼴이었으니까·
유차승이 끓는 혈압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여광견의 제자라서 소광견쯤 되는 개년이다 하고 애써 무시하며 척척 걸어가 대문을 통과하려는 때였다·
“아· 맞다· 저기요· 노인네·”
“···뭔가?”
“아까 얼굴 가린 년이 어쩌구 하길래· 내가 못생겨서 감춘 거 아니거든요?”
“꼭 얼굴 가린 년이 그런 소릴 하지·”
“하· 다들 보면 깜짝 놀란다니까·”
“뭐 곰보라도 되느냐? 그리 당당하면 까 보면 될 것이 아니냐·”
그러자 청이 면사를 걷어올렸다·
유차승의 눈이 휘둥그레 크게 떠졌다·
그때 청의 오른손이 슬그머니 뻗어나가더니 유차승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는 것이었다·
“무엇이냐?”
청이 씩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초절정 후기쯤 되면 어지간해선 신체를 잡혀주지 않으니 살짝 놀라게 해주었더니 제대로 효과 만점이었다·
“여래신장이라고 아세요?”
“무·”
순간 청의 단전으로부터 막대한 내력이 일시에 용솟음치며 솟구쳐올랐다·
식인마군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렬한 흐름이었다·
그때보다 몇 배는 늘어난 내공도 내공에다가 환골탈태에 더해 역근세수경까지 넓어진 기경팔맥의 흐름 역시 전과 같지 않았으므로·
불가의 신공이라 대정선기와 역근세수기가 앞장을 서서 자 드가자 신난 외침을 토하니 주양진기와 도가 식구들이 뒤를 따랐다·
그에 부러운 듯 마기들이 눈치를 보니 중용의 도리를 수호하는 월녀진기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호출에 신이 난 진기들이 저마다 까불거리며 와글와글 시끌벅쩍 단전을 빠져나간다·
데엥-!
거대하나 시끄럽지 않은 불가의 범종 소리·
돌연 흙먼지가 자욱하게 솟아올랐다·
그 속에서 유차승의 잡힌 손목어귀가 부풀어 올록볼록 솟는 살덩이가 팔꿈치를 타고 올라 어깨를 넘는다·
옷이 찢어져라 전신이 부풀어오르고 머리가 두 배로 커졌다가 이내 거짓말처럼 본래대로 돌아와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흙먼지가 가시자 유차승이 쓰러진 뒤편으로 한 장에 이르는 담벼락이 사라지고 잔해만이 남았다·
오랜만에 전력으로 펼친 여래신장의 내가중수법 여의륜관음의 형태였다·
청이 노곤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아아· 진기가 쪽 빠지네· 아주·”
“누님? 이 무슨···”
“아 이건 여래신장이라고 해·”
“여래신장을 어째서 누님이 아! 이게 굳이 담벼락 운운하며 도발하신 이유였습니까! 그 소리를 듣고도 담을 넘어갈 무인이 있을 리가 없지요!”
“응· 일단 붙잡으면 초절정 정도야 뭐· 아예 작정하고 내가중수법끼리 붙자 해도 상대해 볼 만한데 방심하고 있으면 답도 없지·”
“역시! 적의 방심을 유도하여 허를 찌른다! 아주 비열하기 짝이 없는 휼륭한 전술이 아닙니까! 누님께선 항상 이 우제를 놀라게 만드시는군요!”
아니 뭐지? 칭찬 맞나?
이전부터 이거 계속 돌려멕이는 느낌인데·
내가중수법은 상급의 묘리니 어쩌니 해도 그 본질은 무식하게 내공을 겨루는 수법이었다·
그래서 식인마군 때도 도발하고 굴러다니며 내공을 소모시키느라 진땀을 빼지 않았던가·
그러나 스승님의 확인으로도 화경에 준하는 내공을 가졌다고 하니 이제는 초절정 정도야 뭐·
그때였다·
그제야 나면파 무인들이 우르르 다시 몰려들었으니 개중 얼굴이며 손이며 드러난 살이 한 군데도 없이 붕대로 꽁꽁 싸맨 놈이 선두였다·
붕대남이 다급한 기색을 하고 외쳤다·
“집법관보님!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게 되어 죄송스럽게··· 집법관보님?”
“너네 집법관보? 이거 말인가?”
그에 청이 아직도 손목을 쥐고 있는 집법관보(였던 것)을 척 들어보였다·
문득 당난아가 그 모습에 의문을 가졌다·
응? 얘는 오른팔 못 쓰는 거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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