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6
사람이 따뜻하여 난방이 잘 된 방에서 값비싼 침상 위에 푹신하게 몸을 묻어놓고 자면 그야말로 실신 기절에 준한 깊은 잠을 잔다·
그와 반대로 춥고 시끄러우며 딱딱하고 돌이 배긴 땅 위에서 눈을 감으면 잠이란 비 내린 후 고인 웅덩이처럼 얄팍하기 그지없다·
워낙에 얕은 잠은 자는지 깨어있는지 중간쯤에 자리를 잡는다·
내가 잠을 좀 자기는 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잠깐이라도 눈을 붙였는지 아니면 두 눈 감고 그저 긴 시간을 때웠는지 구분이 안 된다·
그렇게 눈 감은 청이 더더욱 몸을 움츠렸다·
춥다· 축축하다· 볕이 드는 데만 뜨뜻하네·
좋은 꿈을 꿨다 싶었다·
좋은 스승님 만나고 좋은 친구들 만나서 호의호식 좋은 옷 입고 맛난 밥 먹고 돌아다니는 그런 꿈이었다·
음· 꿈이었나 아니었나?
청이 확인을 위해 게슴츠레 눈을 떴다·
모로 누운 세상 한 번씩 쳐다보곤 못 볼 꼴을 봣다는 듯이 혀를 차며 지나가는 사람들·
청이 다시 눈을 감았다·
아· 다 꿈이었구나·
어쩐지 이 빌어먹을 중세 중국에 그런 좋은 일들이 일어날 수가 없지·
배가 고프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은데 오늘은 쥐느님 한 마리만 제발· 고기 먹고 싶어·
아니면 평찬채루 가서 아 그 씨발놈들 돼지 준다고 이제 안 내놓는다고 했지·
아· 움직이기 싫다·
일 년 차 청은 원래 안 움직였다·
괜히 움직여봐야 배만 꺼지고 딱히 영양가 있는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해봐야 거지들 눈에 띄면 몰매나 맞지·
몸에 힘이 쭉 빠져 아 더 안 먹으면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을 때 슬금슬금 눈치 보며 뭐라도 주워 먹는 식이었다·
그때였다·
눈 감고 있는 청의 앞으로 인기척이 들었다·
청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흐릿한 면사의 질감 너머 수상하게 대지를 딛고 선 두 발이 보였다·
눈동자를 최대한 굴리자 삐딱하게 누운 시야 안쪽으로 허리를 굽힌 발 주인이 보였다·
조심조심 섬세하게 팔을 움직이길래 눈깔이 아플 지경까지 돌리고 나니 그 손에 쥔 익숙한 모양의 검손잡이가 눈에 들어왔다·
월광검(8호)의 손잡이였다·
응? 월광검?
순간 꿈과 현실 사이쯤 묘한 경계에 있던 청의 정신이 번쩍 제자리로 돌아왔다·
와 시발· 그때로 돌아간 줄 알았네·
그리고 살다살다 검 도둑을 다 보네?
검 도둑이란 무림인에게 생소한 단어다·
검 강도라고 하면 친근하고 익숙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인의 병기는 애첩과도 같은 것이라서(중원인도 부인은 그냥 가족이다) 타인이 함부로 건드리면 그야말로 칼부림이 난다·
그러니 무인의 병기는 훔치는 물건이 아니라 죽이고서야 그 유품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청이 조용히 자는 척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집에서 칼이 조금씩 빠져나오니 잘 관리되었다고는 하기 힘든 속살이 점점 번진다·
그리고 마침내 전부 빠져나왔을 때에·
“어딜!”
청이 수도가 대지와 한 치 정도 높이로 평행선을 그렸다·
도둑의 양 발목이 거기에 걸려 허공으로 붕 날아오른다·
콰당!
검 도둑이 어깨로부터 땅에 착지하곤 이 차로 머리를 박고 활처럼 휜 허리가 되돌아오며 삼 차로 골반이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하핫 무인의 검을 훔치려 들다니 네 놈이 정녕 돌아버린 것이로구나!”
청이 벌떡 일어나 검 도둑의 손목을 발 아래 깔아두며 외쳤다·
그래놓고는 활짝 핀 얼굴이 거의 오매불망 기다리던 님이 돌아오신 수준이다·
“아악! 손! 손! 손!”
“국법에 도둑질한 놈은 손을 자르게 되어 있는데· 감히 네놈이 신성한 법치를 거역하느냐!”
신성한 법치라니 신성과 법치라는 두 개념 모두 기분이 팍 상해 상욕을 퍼부을 소리였다·
유사 이래 신성은 단 한 번도 신성한 적이 없고 법치는 태생부터 기득권들의 이득을 수호하기 위해 세워진 높은 성벽이었다·
개소리를 내뱉는 것을 보니 청의 정신이 아주 온전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이 사람들도 참 못됐네· 검 훔쳐 가는 걸 알려주지는 못할망정 구경이나 하고·”
청이 거리를 향해 눈깔을 부라렸다·
면사 너머라 죽 훑어내는 모양새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래도 말과 함께였으니 흥미진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슬며시 시선을 피해 땅 혹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검 도둑이 계속 소리를 질렀다·
“손!! 손!! 손!!”
어지간히 아파야 청의 발목을 때리든 어쩌건 사태를 모면할 수작을 부릴 수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당장 손목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
감히 과년한 처자의 신발을 붙들고 어떻게든 틈새를 벌려보려 노력하는 수밖에는·
음? 이건?
청이 발로 가하는 압력에 변화를 주었다·
“손! 손!!!! 손! 손!! 손! 손!!! 손!!!!!”
좀 재미있는데·
힘을 주면 목소리가 커지는 구조네?
청의 입매가 가학적인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검 도둑의 악업을 확인한 청이 아쉬운 표정으로 발을 치웠다·
아깝다·
딱 삼 점 삼 점만 더 높았으면 좋았을 텐데·
검 도둑이 그제야 폭풍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제 손목을 감싸 쥐고 흐느낌과 신음 사이 어중간한 소리를 냈다·
월광검을 주워든 청이 삐딱하게 서서 그 꼴을 내려다보았다·
“야· 도둑질하다 걸린 새끼가 뭘 잘했다고 처울고 자빠졌어? 무인의 검을 건드려? 무슨 뜻인지 알지?”
“헙·”
“여러분 이 새끼가 검 훔치는 거 보셨죠? 강호의 율법에 따라 목 쳐도 무죄인 거 아시죠!”
옳소! 누군가 거기에 호응해서 외쳤다·
대낮부터 피를 보고싶은 모양이었다·
사실 이 시대 최대의 구경거리 중 하나가 목 뎅강 피분수 츄아악 데구르르 털썩 참수 공연이었다·
굳이 중원이 미개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이 시대에는 전 세계 모든 인종에게 있어서 참수 공연의 인기가 대단히 높았다·
인류 보편적 감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굳이 우열을 가리자면 중원 사람들은 참수를 눈으로만 점잖게 즐길 뿐이다·
흐르는 피에다가 빵조각 찍어 먹겠다고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서로를 밀치고 밀쳐 아비규환 깔려 죽는 사람까지도 나오는 서역인들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었다·
“자· 알았으면 알아서 목 빼고 자세 잡아라· 안 아프게 한 방에 보내줄 터이니·”
“사 살려 주십쇼!”
“다른 것도 아니고 무인의 병기를 건드리고서 살려달라고? 너는 니 마누라 건드린 놈한테도 아량을 베푸냐?”
“그 마누라는 이미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음· 뭐···· 힘내라·”
잠시 장내가 숙연해졌다·
어차피 죽일 생각도 없었던 청이라서 사내가 무슨 말을 하건 용서해주었을 터다·
마누라가 바람이 난 게 아니라 뭐 으레 도둑놈들이 주워 삼키는 노모가 어쩌구 품번 아니 대상 같은 마누라에 원수 같은 자식들이 뭐라뭐라 하는 원시 고대 작위적 신파라고 해도·
참고도 대상이란 코끼리의 중원 말이다·
“그래·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이 있는 것 같으니 내 목숨만은 살려주마· 가진 거 다 내놓고 썩 꺼지도록”
그에 검 도둑이 가진 행낭과 전낭을 풀어 청 앞에 다소곳이 내려놓았다·
“이제 가도 되는지···”
“장난해? 가진 거 다 내놓으라고· 사내새끼 덜렁거리는 구경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딱 속옷 한 장만 봐준다· 실시·”
그렇게 전혀 불쌍하지 않은 검 도둑이 입은 옷 훌렁 벗어놓으니 발목에 끈으로 감아 꿍쳐둔 은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이 새끼가· 목숨 살려준대도 은편을 꿍쳐놓았네?”
“앗! 여기에 왜 은편이! 누가 은편을 남의 발목에 묶어두었단 말인가! 참으로 기이하구나!”
검 도둑이 누가 봐도 어색한 소리를 하면서 은편을 풀어 행낭 위에 척 올려두었다·
청이 어이가 없어 말했다·
“미친놈이 지랄을 하고 자빠졌네· 진짜 도륙을 내버려야 할까·”
청에게는 ‘참아’ 하고 그 살의를 말려줄 왼팔의 흑염룡이나 종속 정령 따위가 없었으므로 무시무시한 살기와 함께 칼 든 오른팔이 번쩍 들렸다·
“히익!”
검 도둑이 속옷 한 장 걸친 채로 호다닥 뛰어 도망을 쳤다·
도망가는 길을 따라 땅이 검게 물들어 한 줄기 불규칙한 선과 점점이 뿌려진 무수한 방울들만 남긴 채였다·
“음· 그걸 지리네·”
구경하던 양민들도 기겁하며 자리를 비켰다·
시커먼 사내놈이 오줌 지리며 달려오면 천하 절세 고수라도 두려워서 비켜서고 말 것이다·
덕분에 검 도둑이 금세 자취를 감췄다·
청이 자리에 남은 전리품을 보았다·
“히히 달다 달아·”
전낭엔 동전이 한 줌 정도·
그리고 은편이 하나로 들어 보니 대충 은자 반의 반개쯤을 두드려 펴 놓은 무게였다·
다 합쳐봐야 은자 한 개도 안 되는 푼돈이긴 해도 행낭을 얻었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행낭은 척 보기에도 부피가 없고 흐물흐물하게 늘어져 속에 든 것이 없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행낭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가방 하나 있고 없고가 얼마나 큰 차이인지는 이미 일 년 차에 겪어서 알았다·
그래도 뭐가 있나 들여다보니 지저분한 수건 하나 기름먹인 넓은 잎에 싼 것이 하나·
“오우 육포·”
육포가 맛있으려면 아예 기호품으로 만들어진 고급품이여야 한다·
이건 잡고기 빠짝 말려서 이빨도 안 들어가는 데에다 위생 상태도 장담할 수 없는 흔하고 평범하여 누구나 먹는 그런 건량이었다·
그러나 이게 어디랴·
그냥 먹기는 비리고 딱딱해도 탕국에 넣어서 오래 불리면 그럭저럭 고기 씹는 기분은 난다·
꼬르륵·
고기 생각을 했더니 배 안쪽에서부터 멍청한 짓 좀 그만하고 밥 좀 넣어 달라고 성화였다·
“음· 밥이나 먹을까· 오랜만에 만두빵 먹고 술이나 한 잔 꺾어야지·”
어차피 어설프게 요리를 처먹느니 싸구려 만두로 배나 채우고 독한 술을 밀어 넣는 편이 나았다·
마침 시간도 딱 좋았다·
태양을 보니 대충 미시 말 신시 초 청의 시간 단위로는 세 시쯤 되는 모양이다·
뭐야 꽤 오래 잤잖아·
전혀 잔 것 같은 기분도 아닌데·
어쨌거나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는 객잔에서 거지에게도 음식을 팔아주기 마련이다·
물론 안에서 먹진 못하고 가게 앞 거슬리지 않는 자리에 앉아서 먹어야 하긴 해도·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기 그지없었다·
아까 강호의 모험들이 전부 꿈인 줄 알았던 때는 묵직하니 가라앉아 살기 싫었던 기분이 또 이제는 오랜만에 거지 행세를 하려니 뭔가 익숙하니 그리운 느낌이었다·
언제든 거지 신세 탈출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그냥 거지 행세나 하면서 시간 때우다가 날짜 맞춰서 개봉에 가면 되겠다·
현상금이고 뭐고 길가에 거지 행세하고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하고·
청이 슬금슬금 머리 북북 긁으며 돌아다니며 적당한 밥집을 물색했다·
너무 고급이면 문전박대를 당하고 너무 장사가 안되는 집은 팔지 못해 남아 맛이 간 것들이나 내어주니 걸러야 한다·
그러니 무난한 그리고 점원들의 표정이 밝고 서로 분위기가 좋은 밥집을 찾아야 했다·
가게 앞에 먹기 좋은 장소도 있어야 하고·
그에 청이 마땅한 밥집을 찾았다·
서량반점·
반점은 요리점(채점)보다 한 단계 낮은 급의 밥집이다·
청이 반점 입구에서 비슬비슬 눈치 보는 척을 했다·
칼 찬 거지 등장에 점소이가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오자 청이 부러 잔뜩 죽인 목소리로 주문을 걸었다·
“그 만두 다섯 개 하구요· 되게 싼데 되게 독한 술이 없을까요····”
거지는 원래 거지새끼지만 무공 익힌 거지는 거지님이다·
그런데 무려 칼을 하나도 아니고 두 자루나 찬 거지님이 공손하게 주문을 걸었다·
게다가 얼굴 가린 추녀라도 여인이라고 목소리 하나는 기깔나게 고왔으니·
점소이의 자존심이 차오르다 못해 하늘로 솟구쳤다·
점소이의 어깨가 치솟음과 동시에 태도가 눈에 띄게 온화해졌다·
“세상에 싼데 독한 술이 어디에 있나·”
독한 술은 비싸다·
왜냐하면 독한 술이란 어차피 약한 술을 기화하든 어쩌든 압축해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쉰 술도 괜찮은데···”
“흠· 동전 한 문만 더 주게· 알아서 가져다 줄 터이니·”
그리 대답하는 점소이의 말투가 고풍스럽기 그지없었다·
점소이가 또 언제 이러한 어른 말투를 써 보겠는가·
이게 다 생활로 익힌 지혜였다·
무림의 여협으로서의 청은 똥멍청이지만 한 명의 거지로서는 이미 당당한 일 인분을 넘어 현자라 불리기에 마땅한 지혜를 갖춘 것이다·
아주 천성이 거지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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