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7
문 앞에 입구 옆으로 거슬리지 않게 기다리고 있자니 점소이가 금세 채반을 건넸다·
만두빵 여섯 개 탕국이 하나 그리고 큰 대접에 찰랑찰랑한 술이 들었다·
아무리 식사 시간 벗어났다 해도 대단한 인심이라 할 수 있겠다·
“와 고마워요· 복 받으시겠어요·”
“흠흠· 후딱 먹고 가게나·”
청이 거슬리지 않는 구석 땅바닥에 그 큼직한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일단 행낭에 들었던 육포 풀어다 탕국에 퐁당 빠뜨려 놓고 대접에 가득 부어놓은 술부터 한 모금 급히 넘겼다·
시큼하니 좀 상한 화주가 텅텅 빈 속에 스며 찌르르하니 불길이 치솟았다·
“히야 좋다· 여기 인심도 참 좋네· 자주 오면 안 되겠다·”
인심 좋은 가게는 가끔만 가야 한다·
거지가 자주 가면 인심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탕국에 큼직하니 무우 덩어리도 하나 들었으니 놀라운 인심이었다·
만두빵이야 뭐 중원 어디를 가도 똑같이 슴슴하고 밍밍하니 퍽퍽한 맛이다·
곰팡이가 슬지 않았다면 파리 날리는 반점이나 성내 최고 요리점이나 뭐 똑같은 맛이라서·
그렇게 만두나 천천히 씹으면서 한 문 짜리 만두는 아무 맛도 안 나서 천천히 계속 씹어야 좀 달기 때문에 청이 그렇게 기계적으로 턱을 놀리며 생각했다·
사실 지금이라도 도시의 정파 문 두드리며 스승님 이름 팔면야 지극 정성으로 대접이야 받을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뭐 괴력 살려서 목수일이나 좀 도와도 세끼 잘 먹는 데야 문제도 아닐 거고·
하지만 그러다가 현상금이 걸어다닌다! 하고 누군가 달려들면 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았다·
그냥 누구랑 친해지기가 미안한 상황이었다·
청은 비열한 수작질로는 석학의 지위를 주며 모셔도 모자랄 최고 권위자였기에 누군가 또 죄 없는 이를 인질 잡으면 나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니 뭐· 그냥 거지로 좀 살지 무어·
어차피 무림대회도 두 달이 좀 안 되니까·
거지로 사는 것도 능력 없고 물정 모를 때나 서러웠지 지금이야 외려 너무 심심할까 걱정이 되는 정도였다·
식사를 마친 청이 벌떡 일어나 본격적인 거지 생활 준비를 시작했다·
일단 검 도둑이 베풀어준 옷으로 갈아입고·
품은 넉넉한데 소매와 바짓단이 좀 짧다·
빨래터 가서 도복을 북북 빨아 공동 빨래줄에 척 걸어두고 포목점 들러 제일 싼 광목천을 사다 발과 발목 위 종아리까지 바짓단을 감싸서 둘러맸다·
이것이 그 유명한 거지발싸개였다·
이러면 거지 생활 준비도 끝이다·
너무 간단하지 않나 싶겠지만 거지로 사는 데 무슨 거창한 준비가 필요하겠는가·
없이 사니까 거지인 법이었다·
—-
열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못 보던 여자 거지의 등장에 심지어 칼을 두 자루나 찼으니 도시 사람들도 처음엔 경계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딱히 하는 일 없이 무해하여 가만히 퍼질러져 있을 뿐이니 경계심도 금방 사그라들고 말았다·
두 자루 검을 든 거지가 이상하냐 이상하지 않으냐 물어보면 ‘글쎄 막 이상하지는 않지 않은 것도 같고·’ 하는 애매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왜냐면 원래 정통 거지는 쌍수 지팡이라서·
거지의 가장 전통적인 구걸 방식은 남의 집 대문 앞을 막고 서서 양손에 든 지팡이 딱딱 두드려 박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가사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밥 내놔라 줄 때까지 안 갈거다 하는 내용이었다·
요즘에는 할 수 없는 방법이기도 했다·
밥 대신 몽둥이가 날아드는 시대라· 안 가는 게 아니라 영영 저세상으로 가는 수가 있다·
그래서 이제 이 전통적인 구걸 방식은 좋은 일 기념하는 잔치집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한편 이렇게 지팡이 겸 호신병기 겸 타악기의 기능까지 갖춘 거지의 필수품을 개 때리는 봉이라 하여 타구봉이라 불렀다·
도대체 무슨 동물학대적인 무식한 이름이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타구봉이라는 명칭을 붙여준 사람이 바로 중화 철학의 아버지 공자님 되시겠다·
아주 짧게 요약하면 이러했다·
판단이 공자에게 물었다·
···구걸하러 갔는데 집주인이 큰 개를 키워 곤란하면 어떡합니까·
공자가 감히! 하고 분노하며 대답했다·
그럼 개를 두들겨 패시오! 하고·
그리고 이 타구봉을 쓰는 무술로 유명한 거지들이 바로 개방이었다·
개방의 본산이 바로 개봉이고 개봉에 가까운 도시인 장원시도 완전히 개봉 거지들이 장악한 땅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거지들이 포악한 텃세가 청에게도 그 마수를 들이미는 것이었다··· 만·
“아· 매듭· 개방 분들이시네· 누곡 할아버지는 잘 지내세요?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거지 행세를 하고 있으니까 양해 좀 부탁드릴게요·”
“아· 집법장로님을 아시오? 어떻게 아는 사이이신지·”
“사정이 있어서 말씀드릴 수가 없는데 이번 무림대회에 오시나요? 그때 인사드리지 뭐·”
“아· 예· 그럼 즐거운 거지 생활 되십시오·”
개방의 삼결개 장원 분타주가 그리 말하고 물러났다·
정파 무림의 ‘우리가 우리다’였다·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지면 그때 몽둥이찜질을 놓아도 늦지 않다·
하지만 진짜 아는 사이인데 괜히 건드렸다가는 사달이 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믿는 쪽이 무조건 이득이기도 하고·
일단은 집법장로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여자 거지가 있다고 총타에 기별을 넣고 개방도들 불러 모아 괜히 관심 주거나 말 붙이지 말라고 당부해둘 수밖에·
게다가 이제 무림 대회 앞두고 귀한 손님들 지나갈 텐데 괜한 소란 있어 봐야 좋을 일도 없다·
“캬· 역시 중원 인맥빨이구만·”
거지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청이었지만 아는 이름 한 번 팔았다고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가 될 줄은 몰랐다·
이래서야 예전 고생이 억울할 정도였다·
건드는 이도 없으니 청이 볕 드는 낮에는 땅에 붙어 구걸하는 척 반쯤 졸았다·
그러다 보니 밤에는 말똥말똥 쌩쌩한데 딱히 할 일이 없다·
게다가 온종일 누워있었더니 몸이 찌뿌등하니 굳어 여기저기 쑤시기도 하고·
결국 심심함을 견디다 못한 청이 한밤중에 수련을 시작했다·
오죽 할 것이 없었으면 밤중에 칼을 휘두르고 난리일까·
그렇게 낮에 자고 밤에 수련하는 날들이 쭉 이어졌다·
호의호식 무림의 여협으로 호사를 누릴 때보다 오히려 더 성실한 무인의 삶을 사는 중이라고 하겠다·
삼월도 스무닷새가 지나가니 슬슬 두꺼운 솜옷이 조금 덥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밤에는 쌀쌀하니 수련하기 딱 좋은 날씨기도 했다·
오늘도 전낭 펼쳐두고 개방도들에게 두 장 얻어온 거적때기 위에서 시체 흉내를 내고 있을 때였다·
자박자박 가벼운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곧장 바로 앞에 인기척이 되어 멈췄다·
청이 게슴츠레 반개한 눈으로 객을 확인했다·
대충 열 살 쯤 되어 보이는 꼬맹이 하나가 청을 신기한 동물 보듯이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딱 보기에도 좋은 옷 입고 얼굴에는 귀티가 자르르 흐르니 누가 봐도 부잣집 도련님인 것은 알겠다·
허리에는 칼을 찼으니 무가의 꼬맹이인 모양·
뭐· 무림 대회가 얼마 안 남았으니 개봉 가는 가문이 데리고 가는 아이인가 보다 하고·
알고 보니 개봉이 여기서 금방이라더라·
뭐 그래서 나랑은 별 상관이 없지·
청이 다시 눈을 감을 때였다·
“저기요·”
“왜·”
청이 눈을 감은 채로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 있잖아요·”
“없으니까 저리 가지 않으련·”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 건데···”
아이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뒷말을 흐렸다·
솔직히 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씨· 나는 마음이 약해서 탈이라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이에게 약한 청이었다·
청이 몸을 일으켜 앉아 머리를 북북 긁었다·
“뭔데?”
“아· 있잖아요· 누나는 여자 거지 맞죠?”
“보면 몰라?”
“그럼 혹시 창기님이세요? 맞죠?”
“···?”
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지?
귀여워서 말이라도 좀 섞어주려 했더니·
이 면전에서 날아오는 모욕은?
물론 청은 모욕을 참지 않았다·
“꼬마야 혹시 애미 없단 소리 안 듣니? 내가 봤을 때는 엄마가 없어 보이는데·”
“앗·”
아이의 눈이 두 배쯤 커지며 놀란 모양으로 동그랗게 변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우리 엄마는 저 낳다가 돌아가셨대요·”
“아· 그러냐·”
청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면전에서 대뜸 창녀년아 박는 애새끼한테 미안한 것도 아니다·
“볼일 다 봤으면 이제 가 줄래?”
“그 저···· 이거요····”
꼬맹이가 쪼매난 손으로 큼직한 금자를 하나 내밀었다·
뭐지? 갑자기 화해의 표시인가?
뭐 이 정도 성의라면 어른답게 아량을 베풀어야겠지·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청이 받아들자 아이가 아이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가슴 만져봐도 돼요?”
청의 이마에 힘줄이 볼록 솟았다·
“꼬맹야· 대체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벌써부터 싹수가 노오란지 모르겠네· 야· 이게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어디서 나쁜 것만 배워와서는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지금 내가 칼 차고 있는 거 안 보여?”
“어? 그게 아니라···”
“아니라 뭐?”
아이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창기는 원래 금자 꽂아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하게 해준다고 그래서···”
“아니 누가 그래? 애한테 할 소리 있고 못 할 소리가 있지· 당장 엄마한테 가서 아 엄마 없다고 그랬지· 아빠한테 가서 말해· 누가 너한테 창녀 가슴 주무르는 법 가르쳐 줬다고·”
“가르쳐 준 건 아니고 짐꾼 아저씨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요· 창녀 가슴 주무르러 갈 거라고 하시면서· 아 금자라서 그래요? 은자로 드리면···”
“이게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르겠네· 아니지 그래서 기어코 가슴 만져보겠다고 온 걸 보면 순진한 건 아니고· 그 짐꾼들이 또 그러든? 여자 거지는 다 더러운 창기라고?”
“그건 백 무사님이 그러셨어요· 여자 거지는 하나같이 다 더러운 창기니까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하셔서···”
“백 무사는 또 무슨 그래· 정리를 해 보자· 그러니까 백 무사라는 놈이 여자 거지는 창기라고 했고 짐꾼 아저씨들이 창녀 가슴은 돈 주면 만지게 해준다고 했다는 거지?”
“정확히는 물고빨고 떡 주무르듯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넌 가슴을 만지고 싶은 거고·”
“그게·”
아이가 얼굴을 붉혔다·
“찬모 아주머니들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아들들이 열 살이 넘도록 어미 가슴을 주물러댄다고 하셨는데요·”
“그럼 너도 너네 엄마한테· 아· 없다고 했지· 그래서?”
“그러니까 다른 아주머니가 사내새끼는 아주 어린 새끼라도 가슴을 잊지 못해서 평생 찾아다닌다고 그랬는데 그게 무슨 느낌인지 너무 궁금한데 저는 엄마가 없으니까···”
청이 어이가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뭔 놈의 집구석이 하나같이 할 말 못 할 말 구분을 못하고 떠들어? 애 있는 집이·”
이래서 애가 있는 집은 말조심을 해야 하는 법이었다·
애가 도대체 뭘 보고 배우냐고·
근데 또 듣다 보니 은근 재미가 있었다·
청이 한층 온화해진 말투로 다시 물었다·
“또 뭐 주워들은 소린 없고?”
“으음··· 가슴 만질 때? 가운데는 건드리지 말고 그 주변부터 살살 긁어주다가 홍수가 나면 그때 파바박! 하면 극락에 간다고도 하셨는데· 홍수는 뭐고 파바박은 또 뭘까요? 극락은 왜 가요? 착한 사람이 죽어서 가는 데 아니에요?”
“음· 그건 내가 가르쳐 줄 수가 없네· 그래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긴 못 들었어?”
“아! 그리구요 또···”
아이의 입에서 온갖 종류의 음담패설들이 죽 쏟아졌다·
야한 이야기 좋아하는 청이 또 또 또를 계속해서 아이가 더 생각나는 것이 없을 때까지 다 캐다 전해들었다·
“그게 다인 것 같아요·”
“음· 그래· 잘 들었다· 그건 그렇고 그런 말을 네 앞에서 막 했단 말야?”
“그게···· 아니요···· 비밀 통로가 있길래 돌아다니다가 그···· 엿듣는 건 나쁜 짓이라고 배우긴 했는데요···· 너무 재미있게들 이야기를 하시니까····”
원래는 그러면 이제 너네 아빠한테 가서 방금 한 이야기 그대로 들려주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인제 보니 딱히 하인들이 부주의하지는 않았던 모양·
비밀 통로에서 엿들었다는데 어째·
근무 중에 야한 이야기 정도야 사내들이 할 수도 있는 거고·
그걸 저네들 도련님이 무려 비밀 통로에서 엿듣고 있을 줄이라곤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걸로 밥그릇 끊기에는 좀 가혹하기도 하고·
그런데 얘는 뭐 맨날 집구석에서 남들 하는 소리만 엿듣고 다니나?
청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아이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짝 치며 제 소개를 하는 것이다·
“아· 맞다· 저는 모용준이에요·”
“모용? 모용세가? 그 모용세가야? 그 어디랬더라···”
“요녕의 모용세가라면 저희 가문이 맞아요·”
“아! 그래· 맞아· 요녕성·”
청도 이제는 오대세가 성씨쯤은 안다·
어디에 있는지도 들으면 안다·
뭐야 그냥 도련님이 아니었네·
아주 잘사는 도련님이었잖아·
“나는 음· 그냥 거지란다·”
사정상 친해질 생각은 없는 청이 둘러댔다·
어느 천재적인 추적의 대가 혹은 명탐정 자객이 들지 모르는데 귀한 집 도련님이 휘말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러자 모용준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러엄 이제 가슴 만져봐도 돼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지각 아니었는데·· 억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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