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8
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돌고 돌아 또 내 가슴 이야기냐···”
청이 모용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순수한 눈망울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흐음·”
청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이거 일부러 이러는 거 아냐?
“그런데 하필이면 모르는 거지의 가슴을 아씨 말이 좀 그렇네· 그래 차라리 누나라던가 없어?”
“어 누나가 있기는 한데···”
“예쁘냐? 가 아니라· 그러면-”
“우리 누나 되게 예뻐요! 근데 우리 누나를 모르세요? 되게 유명한데· 무림오화 중에 금양검화가 우리 누나래요·”
“그럼 너네 누나한테나 가서 부탁하지 왜· 음· 내가 왜 이런 소릴 하고 있지· 어쨌거나 한 가족 놔두고 아니 맞나? 그게 더 이상한가?”
청이 되는대로 떠들다 잠깐 오류에 빠졌다·
남매지간이면 더 안 되나? 남보단 낫나?
청이 혼란에 빠진 사이 모용준이 묻지도 않은 누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누나는 하북에 친구 만나러 갔는데요 여기에서 누나랑 누나 친구분이랑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개봉에 갈 거래요·”
“그럼 그 누나 친구분한테· 아니· 이것도 좀 이상하네· 뭘 해도 그림이 이상하잖아· 쪼그만 게 아주 발랑 까져가지고는·”
“친구분은 사내라서···”
“히야 너 진짜 잘 빠져나간다·”
청이 감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용준이 쓸모없는 이야기를 계속 꺼냈다·
“그치만 우리 누나는 가슴이 아예 없는걸요· 정원 관리 하시는 유 아저씨보다도 평평한데····”
“그럼 유 아저씨라도 어차피 눈 감으면 뭐 비슷하지 않을까? 어차피 살덩어리잖아· 음· 너나 아저씨나 어느 쪽이건 인간의 존엄은 좀 상하겠지만 그래도· 음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기분이 드네·”
“그치만 유 아저씨 가슴은 다 근육이에요· 한겨울에도 사나이는 추위를 모른다! 막 이러시면서·”
청이 머리를 북북 긁었다·
아 유 아저씨가 후덕하신 분이 아니라 제갈 과에 속하신 분이었구나·
그나저나 대흉근에 밀릴 정도라니·
이름 모를 금양검화가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물론 청의 경험으로는 커봐야 이득이 없다·
맨날 어깨가 당기고 잘 때는 어느 자세를 해도 압박이 심해 불편하고 날 더우면 땀이 차서 고역이니 도대체 장점이라곤 없다·
환골탈태 이후로 사라진 불편함이긴 해도·
그렇더라도 무인으로서도 큰 문제다·
아래쪽 시야가 보이지 않아 취약하고 팔을 휘두르는 범위 자체에 제한을 준다·
저번에 반토막이 나 보았으니 피할 수 있는 공격을 굳이 맞아서 아프기만 하고·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치명적인 약점을 하나도 아닌 무려 세 개나 만들어낸다·
물론 절정 초월인 서문청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하시지만·
그래도 금양검화가 부럽진 않았다·
근데 왜 부럽지 않지?
그야 자랑스러운 내 가슴-
음···? 왜 왜 자랑스럽지?
내가 가슴 달아봐야 뭐 한다고····
뭔가 더 생각하면 안 되는 기분이었다·
청이 급히 아무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 비밀 통로로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훔쳐보기까지 하니? 누나 가슴이 없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아뇨 중추절에 같이 목욕하면서 봤어요·”
중추절이면 대충 추석쯤 되는 명절이었다·
그런데 추석에 목욕이라니·
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중추절이라니· 무슨 명절마다 한 번 목욕탕 가서 때 미는 것도 아니고· 근데 중추절? 춘절엔 어쩌고?”
춘절이면 대충 설날쯤 되는 명절이다·
“그게 아니라요 왜 누나는 여인인데도 가슴이 없고 사내처럼 평평한 건지 물어봤는데 막 화를 내더니 그때부터 목욕을 같이 안 해줘요···”
“네가 아주 누나 가슴에 대못을 박았구나·”
“그래서 누나한테는 말 못 해요· 가슴 이야기하면 엄청 화낼 거예요· 좀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누나는 가슴도 없으면서···”
아이가 불만인 듯이 볼을 부풀렸다·
너무한 건 너네 누나가 아니라 바로 너란다·
하지만 듣는 청은 재미있었으므로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음· 이쯤에서 청이 판단을 내렸다·
얘는 그저 할 소리 못할 소리 구분을 배우지 못했을 뿐인 호기심 많은 똑똑한 꼬맹이었다·
호기심이 가득하니 비밀 통로 쏘다니며 남들 말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머리가 좋으니 그걸 기억하고 있을 뿐·
입이 싼 거야 원래 모든 꼬마의 특징이다·
말문 터지면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몽당 꺼내놓아 목이 쉴 때까지 떠들어대곤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아이에게 무른 청이었다·
그래도 애는 참 착한 모양인데····
무려 오대세가 귀한 집 도련님께서 하인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붙여 말하는 모양새부터가 그 맑은 인성의 증명이었다·
당난아를 보면 안다·
하인은 물론이거니와 그냥 지나가던 모르는 노인을 부를 때도 ‘야’ 아니면 ‘거기’ 둘 중 하나였으니 여류 의원으로 무료 봉사가 아니었으면 아주 천하의 나쁜 년이 탄생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 함부로 하면 안 돼· 너네 누나가 그 말 하면서 속상한 것 같지 않든?”
“어· 맞아요····”
“누가 너 이불에 오줌 쌌다고 떠들고 다니면 기분이 좋겠니?”
“앗·”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에 청이 확신했다·
이 녀석 쌌구나·
“그건 싫어요····”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애는 착한데····
말이 통하는 것만 해도 꼬맹이 중에 최상위 인성이었다·
청의 삐딱한 자세가 다시 편안해지는 때에 모용준이 청을 재촉했다·
“그런데 누나 가슴은 언제 만질 수 있어요? 저 오래 돌아다니면 혼나는데···· ”
“아니 나한테 가슴 맡겨놨니? 내 가슴이 무슨 빨랫감이야? 가슴을 주무르게? 이게 아주 색마 꿈나무야· 아주 큰 색마가 되겠어·”
“그치만 금자 받으셨잔 앗 이런! 아저씨들이 저 찾으시나봐요! 가슴은 다음에요!”
청이 그제야 아직 금자를 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과 또 연인 아닌 여인의 가슴을 탐내는 행위가 얼마나 잔학무도한 범죄인지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용준이 그 아담한 발을 콩 하고 구르더니 부드럽게 떠올라 허공을 갈랐다·
아이답지 않은 훌륭하고 절륜한 경공이었다·
급격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청이 고함을 질렀다·
“야 금자 가져가! 야! 색마 꿈나무!”
그리고는 청의 수중에 노오란 금자가 하나·
심지어 사람 손때도 안 탄 새것이었다·
물론 지저분하나 깨끗하나 가치는 같다·
하지만 거지가 쓸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게다가 사실 청은 금전이 급하지 않다·
그냥 전당포 가서 월광검(9호) 맡겨놓으면 또 이게 대단한 명검이라서 금자를 한 무더기나 내어줄 것이 뻔했다·
전당포라는 가게가 나중에 웃돈 주고서 찾아오면 되는 것이니 개봉에서 의매 만나면 전표책으로 돌려받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거지가 요리를 사 먹고 다니면 멀끔한 여류 무인보다도 훨씬 눈에 띄고 만다·
그리고 사 먹을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경우와 지금처럼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비싼 요리를 가득 차려 먹을 수 있음에도 굳이 안 하는 때의 마음가짐이 완전 달랐다·
“이걸 돌려주긴 해야 하는데···”
모용세가가 머무는 도장에 가서 ‘나· 서문청· 도가의 큰어르신 엣헴·’ 하면 색마 꿈나무 꼬맹이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왜 내가?
어차피 꼬맹이가 집요한 구석이 있으니 다시 찾아올 것이 뻔하다·
그때 돌려주면 되겠지·
그리고 겸사겸사 성교육을 좀 실시해야겠다·
이대로 놔두면 오대세가가 사대세가로 아주 가문 제대로 말아먹을 색마가 탄생할 꼴이다·
청이 반성했다·
생각해보니 사부님께서 날 지도하실 때에도 눈물을 머금고 방사능 그 해로운 물질을 친히 주먹에 바르시지 않으셨던가·
덕분에 제자가 이렇게 당당한 정파의 여협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아 사부님 보고 싶다·
아이의 교육은 마땅히 가문에서 해야 한다·
그렇다고 내 아이 아니니 내 알 바 아니라며 저 꼴을 그냥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길 잃은 아이를 이끄는 것은 어른의 의무·
그러니 청 역시 그 의무를 다해야 할 떄였다·
이놈의 애새끼· 돌아오기만 해봐라·
청이 독재자처럼 정신적 핵무장을 시작했다·
오늘의 저녁은 모처럼 서량반점이었다·
서량반점은 항상 뭐든 푸짐하게 내어주니 거지 대접이 참 좋았다·
그냥 동전 열 문 주고 반상 주세요 하면 그날 대량으로 해다 놓은 볶음들 담아 내어준다·
사실 장사가 잘되지는 않으니 맛은 밥집 중에서는 좀 떨어지는 편이기 때문이다·
대신 양으로 승부하기에 또 장사가 안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그런 밥집이었다·
특히나 술 인심이 좋았다·
다 쉬어 시큼한 술이라고 해도 조리에 식초를 대신하여 쓸 수 있는 것이다·
쉰 술을 쉬었다고 대접에다가 퍼 주는 인심은 상가에서 보기 힘든 공덕인 것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꽃거지가 또 왔구나·”
꽃거지는 서량반점에서 청을 부르는 말이다·
사실 서량반점이 그냥 인심이 좋아서 청에게 잘하는 것이 아니다·
밥 갖다주면 워낙에 맛있게 처먹는지라(욕이 아니라 처먹는다는 표현이 정확해서) 그 모습에 혹한 손님이 제법 들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좀 오래 있으라고 점점 청에게 주는 밥의 양이 늘어나는 중이었다·
사정 모르는 청이야 단골이라고 인심이 점점 후해지나 생각할 뿐이었지만·
청은 거지지도道 말고는 아는 게 없다·
“이제 슬슬 덥더라구요·”
“그래 이제 낮에는 완전 봄이로구나· 그래 이번에도 반상 내 주랴?”
“네 부탁드릴게요·”
아씨 친해지면 안 되는데·
하지만 청이 그래서는 아니고 암살자 대비해 인연 안 맺으려고 거지 행세를 하는데 이렇게 또 아는 얼굴이 생겨버리고 만 것이다·
이제 여기도 그만 와야 하나····
음 이런 고민 하고 있으니 좀 기분이·
이러면 내가 좀 그런 사람 같잖아·
참고로 청의 고향에는 점원이 알아보기 시작하면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발걸음을 끊는 초내성적 단신주의자들이 존재했다·
청이 보기에는 인사 몇 마디 하면 그만이지 점원하고 내내 떠들 것도 아닌데 왜 유난인가 싶지마는 십인십색 모든 이는 저마다의 고충을 가지고 있어 그 크기 역시 다른 법이라고·
점소이가 쟁반을 가져다주니 고봉으로 쌓인 보리-쌀-겨 혼합 찜과 갖가지 채소볶음 그리고 커다란 대접 든 술이-
세상에 두 대접이나 내 줬내·
청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반주 곁들이며 기깔나게 처먹고 있는 와중이었다·
와장창창 와르르르·
반점 안쪽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뒤이어 급한 발소리들이 가까워졌다·
이내 손님들이 다급하게 뛰쳐나오니 누구는 새파랗게 질리고 또 누구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였다·
전자는 놀란 사람이고 후자는 이미 강호에서 흔한 객잔 소란이 익숙하여 음식값 떼먹었다며 좋아하는 치다·
반점 안에서는 챙챙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
청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모양 빠지게 객잔도 아니고 다점도 아니고 요리점도 아닌 양껏 먹어도 은자 쓸 일이 없는 싸구려 밥집에서 칼부림을 벌이는 놈들은 또 뭐야?
궁금하니까 빨리 구경해야겠다·
청이 살금살금 객잔 안으로 향했다·
청이 마교에서 익힌 잠행술 흑영투잠은 무려 빨간색 등급이다·
일인석 아래 막힌 긴 식탁 뒤에 웅크려 있던 점소이가 감히 알아채기 힘든 기예기도 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래요?”
“워매! 깜짝이야! 아 꽃거지냐? 흠흠 여긴 또 왜 왔느냐· 괜히 욕보지 말고 나가 있거라·”
청에게만 말투가 근엄해지는 점소이가 놀란 탓에 순간 본래 말투가 튀어나왔다·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라잖아요·”
“싸움도 싸움 나름이지 무림 고수들 싸움을 우리가 봐야 뭘 알겠느냐· 길바닥에 어깨 핀 건달놈들 싸움이나 봐야 재미있지·”
싸움은 좆밥 싸움이 재미있다는 뜻이었다·
청이 그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는 건달이나 쟤네나 뭐 비슷해요· 음·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0월 26일 오전 07시 24분 경 수정되었습니다
이 시각 이전에 달린 댓글은 위 시각 전 수정 전의 내용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패치 내역
핵공격으로 교정하려던 무지함을 좀 덜 맞아도 되도록 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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